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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잠시, 천 년이/김현

에세이향기 2022. 2. 28. 12:52

잠시, 천 년이

김현

잠시, 천년이

 

우리가

어느 생에서

만나고

헤어 졌기에

 

너는

오지도 않고

이미다녀 갓나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잠시, 천 년이

지난다

 

김현 1946

 

 

출처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시

 

깊을 대로 깊은 가을, 저무는 단풍들이 도심 고샅까지 뒤흔들며 가고 있다. 꽃보다 뜨겁게 타오르던 만산홍엽도 이제 떠나는 몸짓으로 스산하다. 앙상한 뼈대 같은 나뭇가지들만 전열을 가다듬듯 결연한 자세로 찬 바람을 맞는다. 그 사이로 아직 남아 있는 단풍 끝물이며 마른 풀잎들이 바람을 붙잡다 놓치다 몸부림을 친다. 미련 같은, 회한 같은 쓸쓸함 속으로 미처 불태우지 못한 채 입동을 맞은 어물쩍 단풍의 당혹감 같은 게 스친다.
항상 그랬던가. 하고 보면 뭔가 늘 놓치거나 뒤늦게 허둥대는 회한 따위를 더 많이 끼고 왔지 싶다. 올해도 원하던 시나 사랑이나 먼 산 너머로 지나갔는지 소출이 턱없이 허전하다. 시절을 변명 삼아 넘어온 탄식의 반복. 그렇게 '잠시, 천년이' 가버린 것인가. 아니 가버릴 것인가. 그런데 너는 '오지도 않고 / 이미 다녀'간 것인가. 다시 또 잎 다 진 등나무 아래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것인가.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올라가는 등나무, 어느 생에 다시 만나 마음을 저리 꽃피워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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