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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다산 정약용(丁若鏞)

에세이향기 2021. 5. 1. 04:42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다산 정약용(丁若鏞)


경오년 여름에 쉬파리가 말할 수 없이 들끓었다. 온 집안에 가득 차고, 바글바글 번식하여 산이나 골이나 쉬파리로 득실거렸다. 높다란 누각에서도 일찍이 얼어죽지 않더니, 술집과 떡집에 구름처럼 몰려와 윙윙거리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그러니 노인들은 탄식하며 괴변이 났다 하고, 소년들은 떨쳐 일어나 한바탕 때려잡을 궁리를 하였다. 어떤 사람은 파리 통발을 놓아서 거기에 걸려 죽게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파리약을 놓아서 그 약 기운에 어질어질할 때 모조리 없애 버리려고도 했다.

이런 광경을 보고 나는 말했다.
"아, 이것은 결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분명 굶주려 죽은 백성들이 다시 태어난 몸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구한 삶이었던가? 애처롭게도 지난해에 염병이 돌게 되었고, 거기다가 또 가혹한 세금까지 뜯기고 보니, 굶어 죽은 시체가 쌓여 길에 즐비하였고, 내다버린 시체는 언덕을 덮었다. 수의도 관도 없이 내다버린 시체에 훈훈한 바람이 불어 더운 김이 올라오자, 그 살과 살갗이 썩어 문드러져 오래된 추깃물과 새 추깃물이 서로 괴어 엉겼다. 그것이 변해 구더기가 되니 냇가의 모래알보다도 만 배는 더 되었다. 이 많은 구더기들이 날개를 가진 파리가 되어 인가로 날아든 것이다. 그러니 이 쉬파리가 어찌 우리와 같은 무리가 아니겠는가? 너희들의 삶을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난다. 그래서 밥도 짓고 안주도 장만하여 놓고 너희들을 널리 청하여 모이게 하니, 서로 기별해서 함께 먹도록 하여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글을 지어 위로했다.
"파리야, 날아와서 음식상에 모여라. 수북이 담은 쌀밥에 국도 간 맞춰 끓여 놓았고, 술도 잘 익어 향기롭고, 국수와 만두도 곁들였으니, 어서 와서 너희들의 마른 목구멍을 적시고 너희들의 주린 창자를 채우라.

파리야, 훌쩍훌쩍 울지만 말고, 너희 부모와 처자식 모두 데리고 와서, 이제 한번 실컷 포식하여 굶주렸던 한을 풀도록 하여라. 너희가 살던 옛집을 보니 쑥밭이 되어 추녀도 내려앉고 벽도 허물어지고 문짝도 기울었는데 밤에는 박쥐가 날고 낮에는 여우가 운다. 너희가 갈던 옛 밭은 보니 잡초만 무성하게 자랐다. 금년에는 비가 많이 와서 땅이 부드럽건만 마을에는 사람이 없어 잡초만 우거진 채 일구지를 못했구나.

파리야, 날아와 이 기름진 고깃덩이에 앉아라. 살진 소의 다리를 끓는 물에 삶아 내고, 초장에 파도 썰어 놓고 싱싱한 농어로 회도 쳐 놓았으니 너희들의 주린 배를 채우고 얼굴을 활짝 펴라. 그리고 또 도마에는 남은 고기가 있으니, 너희들의 무리에게도 먹여라.

사람들의 시체를 보니 언덕 위에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는데, 옷도 걸치지 못한 채 거적에 싸여 있다. 장마 비는 내리고 날은 더워지니, 모두 이상한 것으로 변해서 꿈틀꿈틀 기어오르고, 어지러이 꾸물거렸다. 그러더니 옆구리에 넘치고 콧구멍에까지 가득 차게 되었다. 이러다가 허물을 벗고 나와 답답한 구더기의 탈을 벗어 버리고 파리가 되었다.

길에는 시체들이 여기저기 뒹구니, 길가는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런데 갓난아이는 죽은 어미 가슴을 붙잡고 젖을 빨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썩은 시체를 묻지 못하여 산에는 무덤이 없고, 그저 구덩이에 던져 넣고 마니 그 옆에 잡초만 무성하구나. 이리가 와서 뜯어먹으며 좋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데, 구멍이 숭숭 뚫린 해골만 어지러이 나뒹군다. 너희는 이미 날개가 돋아 날아가고 번데기 껍질만 남겨 놓았구나.

파리야, 날아서 고을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굶주린 사람을 엄히 가려내는데, 아전들이 붓대 잡고 앉아 그 얼굴을 살펴본다. 대나무처럼 빽빽이 늘어선 사람들 중에서 요행히 한번 뽑힌다 해도 겨우 맹물처럼 멀건 죽 한 모금을 얻어 마시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도 묵은 곡식에서 생긴 쌀벌레는 고을 창고에서 위아래로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돼지처럼 살찐 것은 힘있는 아전들인데, 서로 짜고 공이 있다고 보고하면 상을 주었으면 주었지 책임을 묻는 일은 없다. 보리만 익으면 그나마 구휼(救恤)하는 일을 끝내고 잔치를 베푼다. 종과 북을 치고 피리 불고 눈썹 고운 예쁜 기생들은 춤을 추며 돌아가고, 교태를 부리다가는 비단 부채로 얼굴을 가린다. 그런 속에 비록 풍성한 음식이 남아돌아도 너희들은 결코 쳐다볼 수도 없는 것이다.

파리야, 날아서 객사로 들어갈 생각을랑 말아라. 깃대와 창대가 삼엄하게 꽂혀 있다. 돼지고기·쇠고기국이 솥에 가득 부글부글 끓고 있고, 메추리구이·붕어지짐에 오리로 국 끓이고, 꽃무늬 조각한 중배끼 약과도 차려 놓고, 실컷 먹고 즐기며 어루만지고 놀지만 커다란 부채를 휘두르는 통에 너희는 엿볼 수도 없다. 우두머리 아전이 주방에 들어와 음식을 살피는데, 입으로 숯불을 불어가며 냄비에 고기를 지져내고 수정과 맛이 훌륭하다고 칭찬이 자자한데, 호랑이 같은 문지기들 철통같이 막고 서서 너희들의 애원하는 소리는 들은 척도 않고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호통친다.

수령은 안에 앉아 제멋대로 판결한다. 역마를 달려 급히 보고하는데, 내용인즉 마을이 모두 편안하고 길에는 굶주려 수척한 사람 없으니 태평할 뿐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한다.
파리야, 날아와 다시 태어나지 말아라.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 상태를 축하하라. 길이길이 모르는 채 그대로 지내거라. 사람은 죽어도 내야 할 세금은 남아 형제에게까지 미치게 되니, 유월 되면 벌써 세금 독촉하는 아전이 문을 걷어차는데 그 소리가 사자의 울음소리 같아 산악을 뒤흔든다. 세금 낼 돈이 없다고 하면 가마솥도 빼앗아 가고 송아지도 끌고 가고 돼지도 끌고 간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불쌍한 백성을 관가로 끌고 들어가 곤장으로 볼기를 친다. 그 매 맞고 돌아오면 힘이 빠지고 지쳐서 염병에 걸려 풀이 쓰러지듯, 고기가 물크러지듯 죽어 간다. 그렇지만 그 숱한 원한을 천지 사방에 호소할 데 없고, 백성이 모두 다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슬퍼할 수도 없다. 어진 이는 움츠려 있고 소인배들이 날뛰니, 봉황은 입을 다물고 까마귀가 울어대는 꼴이다.

파리야, 날아가려거든 북쪽으로 날아가거라. 북쪽으로 천 리를 날아 임금 계신 대궐로 들어가서 너희들의 충정을 호소하고 너희들의 그 지극한 슬픔을 펼쳐 보여라. 포악한 행위를 아뢰지 않고는 시비를 가릴 수 없는 것. 해와 달이 밝게 비쳐 빛이 찬란할 것이다. 정치를 잘하여 인(仁)을 베풀고, 천지 신명들께 아룀에 규(圭)를 쓰는 것이다. 천둥같이 울려 임금의 위엄을 떨치게 하면 곡식도 잘 익어 백성들의 굶주림도 없어지리라.

파리야, 그때에 날아서 남쪽으로 돌아오너라.


▲해 설
조선 후기 실학자(1762∼1836). 경세가. 문인으로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 (與猶堂)·자하도인(紫霞道人). 1789년(정조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규장각 초계 문신 출신의 학자 관료로 정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정조의 화성(華城) 건설 사업에 동원되어 수원 성 축조를 지휘하기도 했던 그는 무엇보다도 현실 개혁을 구상하고 실천하려고 했던 경세가였고, 유형원 과 이익 등의 실학을 계승하고 집대성한 실학자였다. 정조 급서 후, 신유사옥으로 천주교와 인연이 깊었 던 남인들이 대거 숙청될 때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 갔다가 19년 만에 풀려났다.

저서로는 ≪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경세유표(經世遺表)≫·≪마과회통(麻科 會通)≫ 등이 있으며, 그의 저술들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로 집성되었다.
다산은 〈다섯 가지 학문에 대하여〔五學論〕〉라는 글에서 "문학한다는 사람들은 한갓 문학적 즐거움 만을 탐닉할 뿐 그 사회적 책임에는 애당초 관심도 능력도 없다"고 개탄하였다. 그리고 ≪여유당전서≫ 시양아(示兩兒)에는 "무릇 시의 근본은 부자·군신·부부의 윤리에 있는 것이며 혹은 그 즐거운 뜻을 선 양하기도 하고 혹은 원망과 사모의 마음을 이끌어 주기도 한다. 그 다음은 세상을 근심하고 백성을 긍휼 히 여기며 언제나 힘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사람을 구제하는 마음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고 안타까워 차마 버리지 못하는 뜻을 지닌 후라야 바야흐로 시가 되는 것이다."라고 씌어 있다.

이런 그의 문학관은 사회의 현실문제에 그 기저를 두는데, 이 〈파리를 조문하는 글〉에서도 "파리를 굶주려 죽은 백성들이 다시 태어난 몸"으로 상징하며 부패한 정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문예성도 잃지 않은 사회수필의 전범이 될 만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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