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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파를 다듬으며 /신안호

에세이향기 2022. 12. 25. 20:46

파를 다듬으며 

 

                                                                                                                                    신안호

 

 트럭에 쪽파가 산을 이루듯 쌓여있다. 골판지에 큼지막하게 써놓은 가격은 주부들의 시선을 끌기에 좋으리만큼 착하다. 김장김치에 멀미가 날때쯤이면 봄기운을 안고 찾아오는 쪽파다. 가을 쪽파가 알싸하게 매운 맛이 있는데 봄 쪽파는 매운맛이 덜하다. 매운맛을 싫어하는 나는 봄 쪽파로 삼삼하게 파김치 담아 먹는 걸 좋아한다. 갓 뽑아 온듯 싱싱한 쪽파와 튼실한 대파 한 단을 사들고 오는 내 걸음에 봄볕이 따라붙는다.


 베란다에 앉아 파를 다듬는데 햇살이 등에 와 닿는다. 같이 다듬어 주는 건 아니지만 놀러 와 준 햇살이 고맙다. 때깔 좋은 고춧가루에 액젓으로 살짝 간을 하고 통깨를 솔쏠 뿌려 한 접시 나누어 줄까. 살짝 데쳐서 돌돌 말아 새콤한 초고추장에 찍어 먹게 파강회를 해줄까. 조갯살과 오징어를 듬뿍 넣고 파전을 지져 막걸리 한 대접 따라 대접할까. 따스한 햇살이 고마워 실없는 생각을 한다. 


 가만 생각해 보니 파로 만드는 음식이 꽤 되는 것 같다. 요즘에는 닭 튀김에도 파를 곁들여 양념에 버무려 먹는 일명 '파닭'이라 불리는 음식도 있다. 일반 튀김 닭보다 맛이 좋은 걸 보니 파와 닭이 꽤 조화를 잘 이루는 음식인가 보다. 파와 조화를 잘 이루는 음식이라면 삼겹살과 파채의 만남이 으뜸 아닌가. 숨이 죽지 않게 고춧가루나 초고추장에 살살 버무린 파 채를 삼겹살 위에 얹어 먹어본 사람은 다 알 터이다.


 파가 고기와 버섯 가래떡 등과 나란히 어깨를 걸고 색 조화, 맛 조화를 이루어 만든 꼬치는 우리 명절에서 빠질 수 없는 음식이다. 대파 듬뿍 넣고 푹 끓인 육개장은 파가 고기의 누린내를 잡아주기도 하지만 달착지근하게 혀를 감아오는 파 맛이 진수이다.


 또한 파가 민간요법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파 뿌리가 감기 예방이나 치유에 많이 쓰이고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엄마는 우리 형제자매가 어릴 적에 감기에 걸리면 배 안에 파뿌리와 꿀을 넣고 푹 달린 물을 먹였다. 꿀이 없으면 갱엿을 넣은 적도 있다. 신기하게도 기침이 잦아들었다. 내 아이들이 가벼운 감기증세를 보일 때 나도 이 민간요법을 썼다. 그때는 그냥 어른들께 배운 대로 활용했다. 여러 정보를 접하다 보니 파에 들어 있는 성분 중에 '아리신'이라는 성분이 비타민B1을 활성화하여 특정 병균에 대해 강한 살균력을 나타낸다(Naver, 지식백과)는 걸 알았다. 이 살균력은 이뇨, 거담, 구충, 정장 살균 등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빳빳한 허리를 곧추세우고 독설처럼 강한 향을 내뿜는 파. 파의 성격이 만만찮게 강한듯한데 여기저기 끼어들어 다른 재료나 성분들과 어울리는 걸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파는 어쩌면 스스로 성질을 죽여 그들과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파가 여기저기 끼어들어 다른 재료들이 서로 잘 어우러지도록 돕는 것 같다. 간장이나 고추장에 들어가 그들의 강한 성격을 누그러지게 만드는 것도 파가 아닌가. 각종 나물들이 제 맛을 내도록 도와주는데도 파가 한 몫 한다. 그뿐인가. 모든 국거리들이 파를 초대하는 건, 그들의 존재를 알리는데 파의 역할이 크기 때문 아닐까.


 파김치처럼 존재감을 갖고 있으면서 국거리나 나물들을 돕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 파의 처신이 지혜롭다. 우리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자신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귀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길 원하고 그렇게 되도록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경청'이라는 단어가 강연자들에게 주된 주제로 자주 오르는 것도 우리들의 주인공심리 성향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간장이나 고추장이 주인공인 양념 역할은 흥미 없어 하는 우리들에게.

 

 파 수확작업을 하는 밭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툭툭 파를 던져 넣었다가 껍질을 벗겨 먹는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신기한 장면이다. 대파 생산지로 유명한 진도에서는 파를 불에 구워 먹는다고 한다. 파가 불에 구워지면서 단맛을 낸다고 한다. 파는 주어지는 환경에 순응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드러내는 것일 게다. 참으로 슬기로운 처세술이라 하겠다.


 파김치가 파 혼자만으로 존재감을 갖는 건 아니지 않는가. 파김치를 있게 한 고춧가루나 젓갈 통깨 등 다른 양념들이 없었다면 파의 부존량賦存量을 드러내기는 역부족일 게다. 고춧가루가 고추로서의 존재감이 있었다면 통깨는 깨강정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젓갈은 자신이 작으나마 생선이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에 앞서 남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파가 다른 재료를 배려하여 그들을 돋보이게 하고, 서로 어울리도록 도와주듯이.


 파김치처럼 자신이 주인공인 삶이다가도 때로는 간장에 빠져야먄 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경우도 있을 터, 가끔은 양념처럼 살아야먄 하는 삶이라도, 분명한 역할은 있지 않은가. 연극에서 조연의 역할도 중요하듯이 삶에서도 꼭 필요한 역할이 아니겠는가. 모노드라마에서도 주인공 혼자서 극을 이끄는 건 아닐 게다. 무대나 조명, 관객들이 조연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주인공이 극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이리라. 관객이 없는 곳에서 배우 혼자 극을 진행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배우는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무대에서 열연을 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가만히 앉아 있는 관객도 분명한 역할이 있는 셈이다. 양념 같은 조연으로서.


 우리는 내 삶만이 빛나는 삶이어야 하는 것처럼 안간힘을 쓰다 보니 주변 사람을 누르기도 하고 아프게도 하면서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닐까.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이해받고 싶어 하는 이기심이 우리를 섬으로 가두는 것은 아닌지.


 누구의 아내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부모님의 딸로서 어찌 보면 내 삶의 양념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있다는 것. 그들 속에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님이 남편이 아이들이 나의 양념 역할을 할 때도 있지 않겠는가. 나를 위해 내 가족과 친구 동료들이 조용히 조연 역할을 맡고 있는지도.


 파강회에서 초고추장이 없다면 파강회라는 요리라기보다는 그냥 파를 데쳐 놓은 것에 불과할 것이다. 초고추장은 초고추장대로 데친 파가 없다면 최소한 그 상황에서는 쓸모없는 것이리라. 데친 파와 초고추장이 함께 상에 오를 때 우리는 그 둘을 하나의 음식으로 먹는다.


 이처럼 우리네 삶도 서로 보조역할을 하면서 한 생을 엮는 것이리라. 이미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개개인이 주인공이지 않는가. 파가 양념으로 기꺼이 간장종지에 뛰어들 듯이 주변 사람들과 양념 같은 존재로 소통하면서 사는 것도 삶의 지혜가 아닐까.

 

 

 따스한 햇살은 어느새 등에서 내려와 내 발치에 앉아 있다. 햇살의 미소가 따사롭게 번지는 봄날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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