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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돌꽃/홍성순

에세이향기 2022. 12. 25. 20:45

돌꽃 

 

                                                                                                                                  홍성순

 

 금강석 꽃잎 위로 포말이 부서진다. 파도가 절리를 덮을 때마다 검은 잎을 한 장씩 펼친다. 마침내 육각기둥이 부채꼴로 둥그렇게 퍼지며 커다란 꽃 한 송이가 피어난다. 만다라 같다. 절벽 아래서 피어난 바다의 야생화에서 훅 향기가 끼쳐 나온다. 벌과 나비가 찾는 꽃도 아니며 화려한 색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교태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꽃 앞에서 탄성을 지른다. 수없는 시간의 풍랑이 빚어낸 검은 꽃 한 송이, 오늘도 주상절리 앞에 선다.


 남편이 생각나면 '파도소리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곳을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온다. 소나무 사이로 채색되는 바다는 청람빛이었다가 푸른빛으로, 다시 초록으로 시시각각 제 모습을 바꾼다. 길 끝에 서면 벼랑이 시작되고 주름 깊은 물결은 먼 수평선에서 밀려와 해안가에 파도소리를 부려놓는다. 바다도 번뇌가 있는 걸까. 어떤 상처들이 한적한 해안에 저토록 검은 자수정 같은 꽃을 피워 올린 것일까.


 처녀적 삶의 바다는 심심하리만치 평온했다. 풍랑 한 번 일지 않는 바다에 한 남자가 배를 띄워 왔다. 혼기를 꽉 채운 처녀총각이 만났으니 고요할 리 없었다. 봄바람은 둘 사이에 사랑의 파문을 일으켰다. 만난 지 스무 이틀 만에 나는 그가 타고 온 배 위로 올랐다. 그때 잠시 배가 기우뚱했던가. 벚꽃이 화르르 피어나 꽃 멀미를 하던 봄날이었다.


 결혼생활은 그러나 시집살이로 시작을 했다. 막내인 남편이 시부모님을 모시자고 해서 엉겁결에 승낙을 하고 말았다. 깨가 쏟아질 틈이 없었다. 처녀 적 제대로 살림살이를 배운 적이 없어 시집살이가 만만찮았다. 더구나 시아버님의 성격이 급해서 비위를 맞추느라 애를 먹었다. 집안일 하랴, 눈치 보랴, 스트레스는 쌓여갔고 남편과 나 사이에 간격이 벌어졌다. 심신이 지칠 무렵, 아들과 며느리 사이의 틈이 더 벌어지면 메우기 어렵다는 걸 느꼈는지 부모님은 집을 얻어 살림을 내주었다.


 삼 년 만에 이룬 둘만의 보금자리는 행복했다. 가게가 딸린 셋방을 얻었다. 가구를 넣고 두 사람이 누우면 방은 돌아누울 자리도 없이 꽉 찼지만 그래도 마냥 좋았다. 여남은 평 가게에서 남편은 전기재료 도매상을 운영했다. 봉사정신이 강한 남편은 퇴근 후에는 방범대 일을 보았고 나는 둘만의 시간을 빼앗기게 된 것을 투정했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세상은 온통 따스한 햇살로 가득했다. 신혼 초에는 몰랐던 그의 자상함에 밤에도 낯이 붉어졌다. 품성이 따뜻한 남편 덕에 아이들도 잘 커 갔다. 남편은 잠자는 아이를 깨울 때도 아이의 등을 쓰다듬거나 토닥거리며 깨웠다. 나와는 반대였다. 나는 아이를 깨울 때 일어나라며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내가 군함을 몰듯 군기가 든 지휘관이었다면 남편은 유람선의 선장처럼 노련했다. 두 사람이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다른 탓이었다. 그것 때문에 가끔 티격태격했지만, 살다 보니 내가 남편을 닮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내 투박한 면이 남편에 의해 섬세하게 길들여졌는지도 모른다. 집안에 웃음꽃이 피어났고 이 평안이 언제까지 이어지리라 믿었다.


 어느 날 거실 위에 검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었을 때 남편은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고 아이들 역시 평온히 자고 있었다. 갈증 난 남편이 일어나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잠들었지만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잔잔한 수평선 너머로 커다란 태풍이 밀려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뒤척이다 새벽에야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의 얼굴이 백지장 같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동네병원을 찾았다. 검사를 마친 의사는 큰 병원으로 가라고 권했다. 대학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내내 불안한 마음을 긴장되었다. 의사가 잠시 따로 보자고 하더니 간암이라며 빨리 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대학병원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현기증이 일어나서 거의 정신을 잃었다. 오히려 그런 나를 남편이 침착하게 위로해 주었다. 평소 B형 간염이 있었던 남편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방범대 봉사며 가게일로 너무 과로한 탓이었다. TV드라마에나 나오는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남편의 치료를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시작했다. 6개월 정도 치료를 하던 중 담당의사는 나를 불렀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모니터 화면을 보여주었다. 남편의 간을 찍은 사진이었다. 흑백의 명암이 가득한 화면 가운데 검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이었다. 몸속에서 피운 꽃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화면을 보고 있는 내 가슴도 타들어갔다. 건조한 설명을 마친 의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현대의학으로 손을 쓰기엔 이미 그 선을 넘었다는 것이었다.


 장대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밤이었다. 만개했던 벚꽃들이 바람에 떨어져 창밖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그토록 삶에 열정적이던 남편의 심장박동은 떨어지는 꽃잎처럼 곡선을 그리며 잠시 요동치더니 일직선을 그었다. 그의 영혼은 수평선 너머 세계로 날아가 버렸다.


 그가 떠난 삶의 바다엔 무수한 격랑이 일었다. 내 안에 몰아치는 파도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살랑 바람이 불어도 그리움에 몸부림쳤다. 무슨 일을 결정할 때마다 남편을 의지하고 살아온 탓에 한동안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공백상태가 되었다. 모든 일상은 엉망이 되었다. 아이의 진로를 고민할 때나 가게 운영과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남편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었다. 갑자기 변한 환경을 혼자 지탱하기엔 너무 힘들었다. 밤이면 그를 따라가고 싶다 생각하다가도 아침이 되면 아이들 때문에 접기를 반복했다.


 그 후, 남편이 생각나면 자주 '파도소리길'을 찾게 되었다. 함께 거닐던 바닷길과 산야는 그대로인데 남편만 내 곁에 없다. 육각기둥이 누워 피운 돌꽃은 남편이었다. 바다 밑 깊은 땅속에서 끓는 마그마처럼 남편의 삶은 열정적이었다. 그 온기는 가족을 따뜻하게 했고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했다. 남편은 바깥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몸속에서 자라고 있었던 암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떤 예후라도 있었으면 미리 치료를 했을 텐데. 어쩌면 남편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족에게 내색하지 않고 참고 견디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가운 바닷물에 급격히 식은 주상절리처럼 암꽃들은 어느 한순간 몸속으로 분출하고 말았을 것이다.


 언젠가 읽었던 '원이엄마 편지'처럼 주상절리에 갈 때마다 남편에게 독백의 편지를 쓴다. '당신은 나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비록 하늘이 인연을 거두어 이 세상에 없지만 남편은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지 않는 한 송이 꽃으로 피어있다. 잔잔히 일렁이던 파도가 꽃가루처럼 돌꽃 위로 부서진다. 검은 만다라 위로 남편의 얼굴이 대답처럼 하얗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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