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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시를 읽는 시간/한복용

에세이향기 2022. 12. 16. 15:00

시를 읽는 시간/한복용





 





 시집을 펼친다. 처음 보는 시가 아닌데 처음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본다. 빨간색 펜으로 줄을 그은 글자는 ‘시발놈들’이다. 이런 것이 가능하구나, 시는. 새삼스럽게 감탄하면서 의뭉스럽게 씨익 웃는다. 그리고 소리 내 그럴싸하게 ‘시발놈들!’ 하고 뱉어본다. 욕을 끌어안고 태어난 사람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평소에 늘 하던 욕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으로 굴린다. 귀가 놀라지 않는 것은 평소에 하고 싶었던 욕이거나 하고 살았던 욕인 듯싶다. 하여튼 시에서는 이런 시원한 욕이 가능하다는 것이 매력이다.


 소설이나 시를 읽으면서 수필이 넘지 못할 벽을 아무렇지 않게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하고 심통도 난다. 그들처럼은 아니더라도 수필도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을 텐데, 그것을 알지 못해 답답하고 약이 오른다. 수필은, 아니 수필가들은 늘 품위와 품격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격이 떨어지는 듯한 문장과 마주치면 금방 자신에게 맞춘 잣대를 들이댄다. 그러고, 거침없이, 그 작가를, 자기 식으로 평가한다. 그래서일까, 작가들은 그럴 듯하고 능숙하게 자신을 포장하여 더 깊이 숨어든다.


 글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그렇다. 착한 사람처럼,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사람인 것처럼. 욕은 어디 갔든지 상스러운 말은 입에 담아본 적도 생각한 적도 없었던 사람처럼 그들은 맑고, 몹시, 깨끗하다. 수필은 너무 드러내도 뭐라 하고 얼마만큼 감춰도 뭐라고 한다. 솔직해라 하고 솔직하면 측은해하거나 잘난 체한다 하고, 어이없다며 혀를 차기도 한다. 수필을 쓰다가 피해가야 할 것들과 만나면 갑갑해서 훌훌 벗어던지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나를 이만큼이나마 달래주고 키운 건 수필이기에 나도 살살 달래가며 수필을 더 깊이 알아가는 중이다. 내가 뭘 몰라 이러는 거지, 안다면 금방 이 굴레에서 탈피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일을 하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고, 일을 하다가 무료해서 책장을 넘길 때도 있다. 근래 들어 딱딱한 감성을 마사지하기 위해 시를 찾아 읽는다. 내가 앉아 있는 주변으로 읽어야 할 책과 읽고 싶은 책들이 쌓여 있다. 굳이 책장까지 가지 않아도 손을 뻗으면 잡히니 아쉬울 것 없다. 더군다나 나는 한 작가의 작품을 파고드는 편이어서 어떤 땐 그 작가의 작품집과 그와 관련된 책들로 충분한 시간을 보낸다. 당장 읽지 않아도 쌓아놓은 책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마치 그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친해지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책장을 넘기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속에 파묻힌다. 몰입이 되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그런 시간이 즐겁다.


 내가 시를 읽는 시간은 하루 중 딱 이맘때이다. 오후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인데 내 문장이 어딘지 가난해 보일 때 자극을 받기 위해 보기도 하고 요즘은 어떤 시들이 판을 치나 궁금해서도 펼친다. 내용도 없으면서 길이만 길어진 글을 수다가 많다고 하던데 내 글이 그 꼴이 되는 것 같아 시집을 펼치기도 한다. 시를 읽다 보면 함축이 뭔지 알게 되고 시인이 어느 세계를 거닐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어 반갑다. 놀라운 것은 단어 하나 제대로 배치해두면 그것으로 다른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는 기발한 은유가 있어서도 문학적 장치가 훌륭해서도 아니다. 부담 없이 보다가 무엇엔가 쿵, 하고 부딪치는 것 같은 새로움이 발견되면 그 시는 좋은 시이다. 그것이 거친 말일지라도 주인(시인)이 알맞은 자리에 꽂아줄 때 소임을 다하는 것을 여러 번 봐왔다. 명분이 있으면 사고를 쳐도 용서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유명한 시인의 시도 아니고 주위 작가들이 추천한 시집도 아니다. 서점에 갈 때마다 시집 한 권 정도는 사오곤 하는데 그중 한 권을 펼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해가 길어졌다. 오늘도 아침부터 일어나기 무섭게 쉬지 않고 일했다. 시계를 보면 보통 두세 시간은 금방 사라졌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하품을 여러 번 했는데도 해는 질 줄 모르고 늘어지고만 있다. 한여름도 아닌데 날은 찌고 습도마저 올라가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른다. 서쪽으로 기운 해는 꺼질 줄 모르고 길어져 잠시 창밖을 바라보는 나를 끝내 멍청하게 만든다.


 다시 시집을 펼친다. 저녁을 먹기에도 애매한 시간, 두어 달 함께 한 시인의 시집에서 발견한 〈아무르장지도마뱀〉(《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김상미, 문학동네, 2017.)을 찾아 읽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세상과 달리 ‘아무르장지도마뱀’은 필요할 땐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넥타이 색을 바꾸면서 아무렇지 않게 나쁜 짓을 일삼는다. 나는 그 도마뱀이 얄밉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해서 검지에 힘을 주어 도마뱀꼬리처럼 글자를 길게 문지른다. 마디 잠을 자기에도 어정쩡한 시간, 아무르장지도마뱀이 사라진 서쪽 창을, 나는 꿈틀대며 넘어가는 중이다. 잠깐 뒤를 돌아다봤을 때, 책상 위에는 바람이 닿은 책장이 저 혼자 넘겨지고 덩달아 커튼은 찰랑대며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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