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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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것들의 체온 / 최장순

묵은 것들의 체온 / 최장순  유행도 한철을 넘기기 어렵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제품이 쏟아지고 새로운 것에게로 마음이 향한다. 어느덧 속도감에 익숙해졌나 보다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유행에 굼뜨다. 빠른 변화가 주는 어지럼증과 멀미가 심한 탓이다. 여전히 품을 떠나보낼 수 없는 오래된 것들, 유품처럼 모셔두는 그들에게서 나는 푸근함을 전달받거나 어지럼증을 해소한다."형님, 부자 되세요."덕담과 함께 매제가 건넨 건 돈궤였다. 횡재한 듯 마음이 뿌듯해진 나는 어디에 둘까 고민하며 방과 거실을 오갔다. 방에 모셔두기엔 잠이 편히 올 것 같지 않았다. 거실 소파 협탁으로 제격이었다.소나무 통판의 위 닫이 형 궤, 송판으로 돈궤를 만든 것은, 돌고 돌아온 돈 냄새를 은은한 소나무향으로 지워주고 싶음일까. 사개 ..

좋은 수필 03:48:51

수필과 에세이의 차이점과 공통점은/박병규

수필과 에세이의 차이점과 공통점은?                                                                                                                                        박 병 규   '수필'은 인생과 자연등 생활에서 직접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쓴 산문이다. '수필'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쓰인 예로 꼽히고 있는 것은 중국 남송 때의 학자 '홍매'의 이라는 저술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필이라는 명칭은 '이민구'의 , '조성건'의 ,'박지원'의 등 여러 가지 글을 모아 놓은 책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수필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이미 ..

수필 이론 2024.05.14

삶의 비밀 / 안도현

삶의 비밀 / 안도현  삶이란 무엇인가?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를 때 저기 저 고갯마루까지만 오르면 내리막길도 있다고 생각하며, 조금만 더 가보자, 자기 자신을 달래면서 스스로를 때리며 페달을 밟는 발목에 한 번 더 힘을 주는 것, 읽어도 읽어도 읽어야 할 책이 쌓이는 것, 오래전에 받은 편지의 답장은 쓰지 못하고 있으면서 또 편지가 오지 않았나 궁금해서 우편함을 열어 보는 것, 무심코 손에 들고 온 섬진강 작은 돌멩이 하나한테 용서를 빌며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살짝 가져다 놓는 것, 온몸이 꼬이고 꼬인 뒤에 제 집 처마에다 등꽃을 내다 거는 등나무를 보며, 그대와 나의 관계도 꼬이고 꼬인 뒤에라야 저렇듯 차랑차랑하게 꽃을 피울 수 있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사과나무에 매달린 사과는 향기..

좋은 수필 2024.05.14

서포유첩(西浦遺帖) / 김이랑

서포유첩(西浦遺帖) / 김이랑  다도해 사연도 많은 물길, 남해도가 어째서 신선의 섬인지 단지 풍광이 수련한 까닭만은 아니외다. 천 리 유배 길, 늙은 말발굽 터벅거리다 보면 부귀와 공명은 발병 나 돌아가고, 남루한 몸뚱이 하염없이 흔들리다 보면 미련까지 죄다 떨어집니다. 뭍에서 떨어져 섬, 섬에서 떨어져 노도 외딴 기슭에 닿으니 이탈하는 것ㅇ느 섬, 밀려난 것도 섬이더이다. 소신所信을 지키는 게 죄가 되는 세상에서 목숨조차 내 것이 아닌 섬이 되었을지라도 해, 달, 별, 비, 이슬, 하늘양식 조석으로 내려오고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이치를 꿰어놓은 정음正音이 있으니, 관직은 삭탈에 몸은 유배나 시심詩心까지 위리안치*이리까. 초옥에 홀로 앉아 멍든 가슴 고갱이를 갈면 먹물이 바다를 이루어 이를 붓으로 언제 ..

좋은 수필 2024.05.10

뚜벅이 황후 / 조후미

뚜벅이 황후 / 조후미내 이름은 조후미다. 황후 후(后)에 아름다울 미(美)를 쓴다.처음 만난 사람과 통성명을 나눌 경우, 내 이름을 듣고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둘 중 하나다. 참 특이한 이름이네요이거나, 늘 끝에만 계시나 봐요인데 그럴 때마다 한자로 풀어 설명하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실없이 웃고 만다.뒤 후後, 꼬리 미尾 ― 사람들은 대부분 ‘후미’라는 어휘에서 뒤쪽의 끝을 연상하거나, ‘물가나 산길 따위가 휘어서 굽어진 곳’을 유추해 내는 모양이다. 이렇듯 한글로 읽히는 후미라는 이름은 만년 꼬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어둡고 습한 이미지가 강하다.내 이름은 조모께서 해남 대흥사 주지스님을 찾아가서 지어오셨다. 첫 손녀를 얻은 기쁨이 그리도 크셨던지, 진도에서 해남까지 교통편도 어려운 길을 굽이굽이 찾..

좋은 수필 2024.05.09

공중전화

[사라져가는 것들 117] 공중전화   난감한 일이었다. 전남 순천의 조계산에 깃들어 앉은 선암사를 찾아가는 길, 승선교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눈앞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라고 할 수밖에. 초여름 햇살을 받은 숲은 황홀하다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햇살을 품에 안은 내에는 물이 아니라 보석이 흐르고 있었다. 돌돌돌 물소리, 쏴아아 바람소리. 나무사이를 비껴들며 숨바꼭질하는 햇빛. 사진 찍는 사람들의 공통적 고질병이라면, 아무리 시간에 쫓겨도 그런 풍경을 절대 그냥 지나지 못한다는 것. 카메라를 꺼내들고 춤추는 빛살무리에 섞여들었다. 결국 신이고 양말이고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문제는 그 순간에 일어났다. 통!!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물속..

소소한 이야기 2024.05.08

사랑의 물리학/김인육

사랑의 물리학 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뉴턴의 사과처럼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심장이하늘에서 땅까지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좋은 시 2024.05.08

사유로 번져 온 화양 바다의 순정한 문장들/박철영

사유로 번져 온 화양 바다의 순정한 문장들  -김지란 두번째 시집 『아물지 않은 상처와 한참을 놀았다』 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시는 감동 기제를 고도화한 문장으로 소통하려는 데 있다. 이것은 언어의 시적 순기능과 확장성 그리고 명징성에 관한 말일 것이다. 따라서 좋은 시가 품은 기운은 눈을 현혹하지 않는다. 시를 구조하고 있는 시어들로 형용한 사유가 자연스럽게 문장의 적층(겹)을 이뤄 감싸준다. 평범한 언어가 갖는 단선적인 의미보다 질료적 정황까지 담지한다는 의미다. 문장 속에서 체험적 정서와 욕망의 투사로 발화한 상상력을 부양하는 의미언은 당연한 것이다. 시가 일반적인 언어로 이행되는 의사 전달체가 아니고 다층적인 상징성을..

평론 2024.05.07

개구리소리/김규련

개구리소리/김규련지창에 와 부딪치는 요란한 개구리소리에 끌려 들에 나와 서성거려 본다. 저녁 나절 몹시 불던 바람은 잠이 들고 밤은 이미 이슥하다.모를 내기에는 아직 이르다. 물이 가득 잡힌 빈 논에는 또 하나의 밤하늘이 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개구리소리는 연신 하늘과 땅 사이의 고요를 뒤흔들고 있다. 와글거리는 개구리소리에 물이랑이 일 적마다 달과 별은 비에 젖은 가로등처럼 흐려지곤 한다. 첩첩한 산이며 수목(樹木)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다. 그들도 이 밤에 개구리소리에 묵묵히 귀를 모으고 있는 것일까.개골 개골 개골 가르르 가르르 걀걀걀걀. 산골의 개구리는 진달래가 피었다가 지고 제비꽃이 논둑에 점점이 깔릴 무렵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녹음 속에서 매미소리가 울려..

좋은 수필 2024.05.06

청자 사발 / 이언주(은영)

청자 사발   /    이언주(은영)     내 책상 위에는 청자사발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와는 오래된 친구 사이다. 긴 시간을 찻장에서 무심히 얹혀 있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눈길만 마주치면 이 그릇이 무슨 말인가를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내 책상 위로 옮겨 앉았다.  중국 윈난성(雲南城)에 있는 진샤강(金沙江) 상류를 여행할 때 일이다. 관광지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기는 하지만, 워낙 오지여서 하루 종일 기다려야 여행객 한 둘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곳이다. 그때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강가에 남루한 사내가 지나가는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보자기를 펼쳐놓고 그 위에다 쇠뼈에 조각된 불경과 오래된 나시족의 장신구며 생활에 쓰이던 잡다한 도구들을 늘어놓았다. 우리를 본 사내..

좋은 수필 2024.05.06

붉은 벚꽃 / 한경희

붉은 벚꽃 / 한경희  되돌아보면 할머니는 그때 할머니가 아니었다. 쉰을 갓 넘긴 아줌마였다. 열아홉에 엄마를 낳고 엄마가 스물셋에 나를 낳았으니 고작 마흔둘에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고 할머니는 처음부터 할머니라고 여겼던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도 맨발로 비 오는 거리를 첨벙거리던 때가 있었고, 좋아하는 동네 오빠를 보면 골목 모퉁이로 숨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그 자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좀 더 늦게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손님이 뜸한 비 오는 날 오후가 되면 할머니의 모자점은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할머니는 설탕을 넣고 끓인 막걸리를 양은 주전자에 내오고 고추장떡을 지졌다. 알코올기가 날아간 그 막걸리를 '모주'라고 불렀다. 어른들 틈에 끼어 있었지만 나는 내가 어..

좋은 수필 2024.05.05

무舞 / 정성희

무舞 / 정성희    화창한 봄날이다. 한 무리의 사물놀이패들이 소고와 장고를 두드리며 겨우내 잠든 대지를 깨우고 있다. 여기저기서 꽃불이 터지자, 봄물에 나들이 나온 구경꾼들이 주변으로 모여든다.  둥둥둥 북이 울리자 상쇠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온몸으로 신명을 몰아온다. 바람의 장단에 몸을 떠는 대나무 마냥 주춤거리던 늙수그레한 노인네들의 소맷자락도 들썩이기 시작한다. 작대기 장단에 영춘가를 부르며 흠뻑 흥에 취한 나이 든 춤꾼들은 땟국에 전 그들의 인생만큼이나 후줄근하고 걸걸한 춤으로 무아지경에 이른다.  엎드려 숨죽이고 있던 내 본능도 겨울 문풍지처럼 들썩대며 몸을 보챈다. 그 칭얼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몸이 시키는 대로 노장들의 원시적인 춤동작을 따라간다. 살아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환..

좋은 수필 2024.05.05

육철낫 / 김기화

육철낫  /   김기화                                                                                          벌초하러 가는 길에 늘 챙기는 것 중 하나가 낫이다. 엄마는 의식 치르듯 며칠 전부터 낫을 갈아 신문지에 곱게 싸놓는다. 그것도 모자라 집을 나설 때는 종이에 감싼 낫을 다시 가방에 조심스레 챙겨 넣는다. 해마다 고집을 세워 동행하던 엄마가 올해는 먼저 안가겠다고, 아니 못 가겠다고 하셨다. 불편한 몸이지만 손수 낫을 잡아야만 편하다던 분이다. 우리는 벌초 후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와 보여드리겠다는 말로 안심을 시켜드린 후 집을 나섰다. 그러나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이전과 달리 빨라졌는데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예초기가 ..

좋은 수필 2024.05.05

엇박자노래 / 임미옥

엇박자노래 / 임미옥 따당~땅, 따당~땅, 왼손으로는 건반을 타건하며 오른손은 햄머로 조율 핀을 조여 간다. 혼을 모아 공중에 흩어지는 맥놀이들을 잡아 동음 시킨 뒤, 현들을 표준 음고에 맞춘다. 엇박자로 두들겨 생기는 맥놀이들, 기억저편서 들려오는 아련한 노래 소리들과 겹쳐진다. 들린다…. 그리운 가락들이 들려온다. 아!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르시던 엇박자 가락들이다.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몸이 아파 어머니가 몹시 그리운 날은 더욱 선명하게 들리던 소리들이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그윽하고 정겨운 가락들,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던 소리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조율하던 손을 멈추었다. 어머니 손바닥처럼 뻣뻣하고 거칠거칠한 현들을 쓰다듬었다.현이 파르르 떤다. 두들겨 맞고 또 맞아서 건들..

좋은 수필 2024.05.05

나이테/최재영

나이테/최재영잘려진 나무를 읽는다분주했던 시절들을 기억하는지선명한 경계사이부풀어 오른 물관이 입술처럼, 붉다남쪽으로 기울어진 동심원은따뜻한 생각만으로도 잎을 틔우는 중이다밤새 별들이 머물다 가는 자리아침이면 신생의 이슬방울들 모여들어온 우주를 가만히 불러 들였으리밤낮없이 당신의 생을 접촉하느라어느 지점 등고선이 급격히 휘어지고거기 어디쯤 둥지를 틀었던새들의 족적도 역력한데,북으로 가는 길이었을까다급한 무늬들의 간격으로 폭설이 휘날린다변방으로 내달리는 서늘한 결의처럼나무들의 행간이 촘촘해지고다시, 뜨거운 한 생을 휘돌아나가는 나이테나무는 죽어서도 생장을 멈추지 않는다숲은 경건한 침묵으로 고요하다▶나이테는 나무의 생장을 알 수 있는 척도다. 잘려진 단면을 보면 나무의 성장과정이 보이고 잘려진 나무에서도 새 ..

좋은 시 2024.05.03

부지깽이/조경숙

부지깽이​​  ​조경숙​​   한때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던 나무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죽어가는 불씨를 끌어 모아살리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다 막힌 숨통을 트며 조금씩 검게 타들어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마당에 솥을 걸고 돼지를 삶아동네잔치라도 하는 날이면 더욱 바빠졌다 곡식을 널어놓은 멍석을 어슬렁거리는닭들을 내쫓기도 하고마당에 기역 니은을 끼적거리는 연필이 되었다가가끔 길손이 묻는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당당하던 나도끝이 까맣게 타들어가 점점 키가 줄고몽당연필처럼 닳아끝내 아궁이속으로 들어가한 줌의 재가 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동안 저 캄캄한 무덤으로 숲이 사라졌다토사구팽兎死拘烹기어이 아궁이는 나를 삼킬 것이다

좋은 시 2024.05.03

억새/박은양

억새​​​박은영​​​​흔들릴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억세게 운이 좋은 날은 앞날을 내다볼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의 흔들림은 비루해서 체머리를 앓는 독거노인의 고독을 닮았다​인생은 혼자인 것이니, 라며 애써 자위를 할수록 모든 날은 으악새 슬피 우는 계절이었다​울음에도 곡조가 있다​그 음계를 따라 새가 둥지를 짓고 울 줄 아는 것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밤이면 나는 불면에 시달렸다 선대가 그랬듯이 젓가락을 쥔 손은 떨리고 혀끝은 둔해져 발음이 허투루 새어 나갔다​늙어 가고 있구나​마른기침을 하면 어린 새들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허공을 위무하는 날갯짓 아래에서 나는 갈대라는 착각을 하며 여러 해를 살았다 비루한 떨림으로 마디를 세우고 가슴이 벌어지듯 흰 머리카락을 날렸다​나는 억새,억세게 ..

좋은 시 2024.05.03

내 책상 앞의 풍경과 죽비에 대한 헌사/배한봉

내 책상 앞의 풍경과 죽비에 대한 헌사/배한봉    이야기 하나 ; 풍경과 죽비를 위하여  내 책상에 앉으면 두 개의 물건이 보인다. 하나는 풍경(風磬)이고 하나는 죽비(竹篦)다. 풍경은 책상 앞의 베란다와 통하는 거실 문틀에 걸려 있고, 죽비는 책상 옆, 손이 잘 닿는 곳에 있다. 이 풍경과 죽비는 나의 오래된 친구다. 잘들 아시겠지만 풍경과 죽비는 수행자들의 방일이나 나태함을 깨우치는 역할을 한다. 처음 이 풍경과 죽비를 내 곁에 둘 때만 해도 나의 방일과 나태를 경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처음의 그 목적은 잊히고 그저 나를 묵묵히 바라보는 친구가 되어 있다.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 될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오랜 벗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굳이 말하자면 풍경과 죽비도 그..

좋은 수필 2024.05.03

수선집 근처/전다형

수선집 근처​​​​전다형​​​​​​구서1동 산 18번지무허가 간이 수선집이 있었네의수족 아저씨는 십 수년 째주일만 빼고 수선일을 했네나는 팔 부러진 우산을 들고 찾아갔네허름한 문이 굳게 닫혀 있는단골집 돌아서다 어둠 속우두커니 서 있는 입간판에게 물었네수척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네꺾어진 골목으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영문을 모르는 바람이 틈새를 드나들고 있었네맞은 편 산뜻한 수선집 미싱 요란하게푸른 하늘을 박고 있었네찾아준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헛걸음하게 해 죄송합니다삐뚤한 글씨체가 손잡이 근처 붙어 있었네나는 뜨거운 것을 목에 걸었네발길을 돌려 건널목에 섰네의수족 아저씨가손때 묻은 연장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네누가 맡겼다 찾아가지 않은 낡은 가방에망치, 칼, 가위 쓰다 남은 실, 지퍼, 우산대 몇땅으..

좋은 시 2024.05.03

겨울, 눈사람/신미나

겨울, 눈사람​​​신미나​​​​​몇번인가 그 눈빛을 훔친 적 있었네촛농처럼 흘러내린 얼굴, 코가 없는 얼굴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내 눈길을 거뒀지만나는 보았네 촛불처럼 흔들리는 눈동자소문은 악취처럼 쉽게 뭉쳤다 흩어지곤 했지만오늘은 벽에 귀를 대고 그녀가 우는 소릴 듣네그 얼굴을 똑바로 보는 일이란허기와 마주 앉아 다 식은 저녁을 말아 먹듯서둘러 묵묵해야 하는 일사방을 좁혀오는 빈방의 어둠속에서반짝 물기를 감추는 그릇을 못 본 체하는 일가늘게 새는 물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네그녀가 문 앞에 내놓은 밥그릇핥고 가는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조금씩만 그녀를 엿보고 가네열린 문틈 사이로 그녀천천히 녹고 있었네방바닥이 온통 물집이었네

좋은 시 2024.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