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석 - 정성록
봄의 전령사들이 남도의 이른 봄소식을 들려준다. 오백 년 된 황매화의 향기를 맡으며 꽃들의 이야기에 귀를 모아본다. 청량한 물소리가 흐르는 지리산 한 자락을 살포시 끼고 앉은 경남 산청군 남사면 예담촌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가장 아른다운 마을 1호로 선정될 만큼 고택들과 주변 경관이 조화롭다. 돌담을 타고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따라 골목을 돌아 깨끗한 양반가의 고택을 둘러본다.
바람이 빈 집의 주인인 냥 우리를 맞이한다. 어릴 적 살았던 내 고향집 같은 어느 고택에서 나도 몰래 발이 붙어버렸다. 빗장 걸린 안채를 비켜 바깥마당으로 나오다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초가로 된 사랑채 헛간에 있는 멍석이었다. 먼지 쌓인 멍석에서 아버지의 냄새가 폴폴 날아 오르고 나를 고향집 헛간으로 데리고 갔다.
헛간과 뒤란 디딜방앗간 벽에 걸려 있는 멍석은 농촌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일상용품이다. 동네 사람들이 혼례 때나 초상을 치를 때마다 우리 집 멍석을 빌려서 마당에 펴고 손님을 맞았다. 정월 보름날에 멍석이 윷놀이판이 되고 추석엔 멍석을 돌돌 말아 널뛰기받침이 되었다. 장마가 질 때는 무너진 둑에 멍석을 덮어 둑의 유실을 막기도 했다. 각종 곡식을 탈곡할 때나 추운 겨울엔 소와 송아지들의 삼정도 멍석으로 만들어 입혔다.
가을걷이 끝낸 후 사랑방은 겨우내 멍석을 짜는 아버지의 작업실이었다. 색깔 좋은 볏단에다 입에 한가득 냉수를 물고 뿜으면 볏집은 부드럽고 촉촉해진다. 지푸라기 두세 가닥을 양손으로 비벼 새끼줄을 꼬아 처녀 머리 땋듯 땋는다. 새끼줄로 날줄과 씨줄을 만들어 그 줄 사이를 짚으로 엮으면 멍석이 된다. 커다랗게 네모난 멍석과 둥근 멍석, 곡식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둘레를 단으로 엮은 동그란 멍석. 힘줄이 굵게 솟은 아버지의 야문 손끝은 크기와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양한 멍석을 짜냈다.
가을 햇살에 자식처럼 키운 빛깔 고운 알곡들이 멍석 위에서 뒹굴며 마르고 있다. 말리던 곡식 낱알이 멍석 밖으로 튕겨나가면 아까워했던 아버지였다. 가을마당 멍석 위의 곡식들처럼 자식들도 잘 영글어지기 바랐을 아버지였다. 그러나 채 영글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멍석에서 떨어져나간 곡식 낱알처럼 된 자식이 있었다.
오랜 씨 감기가 폐렴이 되어 여동생이 세 살 때 죽었다. 그때 아버지는 디딜방앗간 벽에 걸어두었던 동그란 멍석에 동생의 시신을 돌돌 말아 머슴의 지게에 얹혀 애동뫼산으로 보냈다. 여석 번째 딸로 태어나 새 옥 한번 입어보지 못하고 언니들에게 물려받은 헌 옷이 마지막 수의가 된 채. 철 없는 다섯 살 계집애인 나는 엉엉 울었다. "씰데없는 가시나 하나 죽었기로서니 뭘 그렇게 엉머구리같이 우느냐"는 할아버지의 불호령에 숨죽여 울던 유년의 기억은 동생을 돌돌 말았던 멍석이 각인된 채 한장의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다.
짦은 여름밤 역기대로 피운 매캐한 모깃불 연기가 마당에 퍼진다. 넓은 멍석을 펴놓고 두레상에 온 식구들이 둘러앉는다. 우물 속에 담가둔 수박과 참외를 두레박으로 건져올려 배가 터지도록 먹는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멍석에 누워 하늘을 본다. 별자리를 찾다보면 별똥별이 순식간에 하늘을 가르며 떨어진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하나 나 하나. 별똥별이 떨어지기 전에 열 번을 숨 가쁘게 말하면 행운이 온다고 어른들이 말했다. 가마솥에 찐 감자와 옥수수랑 책이 함께 뒹굴던 멍석은 고향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멍석은 투박하지만 아버지의 넓은 등처럼 편하기 그지없다. 멍석은 우리 식구들만 편히 앉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 입구 집이라 바깥 마당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도록 멍석을 깔아두었다.
고향 앞 산모퉁이를 돌면 우리 과수원이 있다. 사과밭 복판 미니 이층집의 방으로 된 아래층과 이층은 망루처럼 되어 사과바을 지키는 곳이다. 아버지는 추운 겨울 갈 곳 없는 땅군들과 걸인들을 그곳에서 기거하게 했는데 걸인 한 명이 죽었다. 경찰서에 신고했지만 무연고자이며 자연사라 별 도움이 없었다. 아버지는 사과를 선별할 때 쓸 새 멍석에 걸인의 시신을 싸 공동묘지에 묻어주었다. 마을 불쌍한 사람들이나 먼 친척이 돌아가셨을 때도 새 멍석을 아낌없이 내어주던 아버지였다.
우리에게 허락된 하루의 봄이 기울며 어둠이 슬금슬금 내려왔다. 고가의 헛간에서 발 길을 돌리며 아버지의 추억이 어린 멍석과 작별한다. 이젠 할 일을 다 하고 세월을 말아 베고 누워 있는 멍석. 소임을 다하고 흙으로 돌아간 아버지의 모습을 멍석에서 보았다. 예담촌을 돌아나올 때 돌담길 안에서 손 흔들며 웃고 있는 아버지가 설핏 스쳤다. 저무는 봄날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친구들과 버스에 오른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쏘시개/곽흥렬 (0) | 2024.03.03 |
---|---|
파약破約/김용삼 (0) | 2024.03.03 |
꼬리칸의 시간 / 최민자 (1) | 2024.02.26 |
파종 / 손훈영 (0) | 2024.02.21 |
숲, 그 오래된 도서관/김영식 (1) | 2024.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