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생은 온전히 꽃으로
정해경
택배 상자에 담겨 해를 넘기고 내가 그 여자와 마주한 건 햇빛이 부챗살처럼 퍼지는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녀가 청소를 하려고 상자를 치우던 중 그제야 남아 있는 나와 몇몇 친구들을 기억해 냈어요. 까칠하게 돋은 수염처럼 군데군데 싹이 돋은 것과 말라비틀어진 채 한 뼘이나 되는 줄기를 뻗은 것, 어느 것 하나 볼품없었죠. 그래도 버릴 수가 없던지 대충 씻어 찜솥에 넣었는데 나는 거기서도 제외되었어요. 쪼글쪼글 말라 긴 줄기가 달린 것이 바로 나였거든요. 쓰레기 봉지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 여자가 다시 집어 들었어요. 그 순간의 선택이 나를 벼랑 끝에서 구했습니다.
여자는 조그만 수반에 찰랑하게 물을 받아 거기에 비스듬히 나를 눕혔어요. 그러고는 햇살 넉넉한 창가에 자리를 잡아주었습니다. 춥고 어두운 상자 안에서도 싹을 틔운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고 더 이상 자랄 힘은 없었지요. 그러던 중 충분한 물과 햇빛은 새로운 활력을 보탰고 물속에 실낱같은 뿌리를 자꾸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나날이 뻗어가는 줄기에도 하트 모양의 푸른 잎을 차례로 매달았고 여자는 점점이 번져가는 초록에 지나칠 만큼 환호했어요. 동시에 나는 먹을 수도 없는 고구마 한 개에서 잎과 몸통과 뿌리를 갖춘 어엿한 고구마 한 포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창문에 기대어 점점 그 키를 더해가는 동안 창밖의 세상은 날마다 달라졌습니다. 비 한 번 내리고 나면 햇빛은 더 강해지고 봄바람에 꽃잎이 난분분 흩날리더니 거리는 연둣빛 농도를 더해 초록 물이 들었습니다. 집 안팎의 덧문이 하나씩 열리면서 더 이상의 물속 생활은 힘들었습니다. 뿌리는 수반 바닥에 복잡하게 얽혔고 잎은 단풍들 듯 색이 바래 갔어요. 여자가 내 앞에서 자주 서성거렸습니다. 나는 또 한 번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 했습니다.
결국 나는 여자의 손에 이끌려 목이 긴 화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여자는 나를 베란다 구석으로 옮겨 창틀에 끈을 매고 줄기를 감아주었습니다. 강아지 몸통만 한 화분에 꼬리를 흔들 듯 곁줄기를 살랑거리고 긴 줄에 목덜미를 묶인 나는 금방이라도 소리 내어 짖을 것 같았어요. 여자도 이리저리 돌려보며 잎에 묻은 먼지도 닦아주고 끈도 팽팽하게 당겨 주고는 손을 툭툭 털었어요. 그때 나는 영락없는 애완 고구마 한 마리였습니다.
맞아요. 나는 그냥 고구마가 아니었어요. 세상에 어떤 고구마가 한겨울에 싹을 틔워 안방에서 뿌리를 내리고 흙에서 나온 대로 흙으로 돌아가 다시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옛날과 같이 넓은 밭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는 건 아니지만 늘 촉촉한 흙 속에 뿌리를 박고 때때로 뽀얀 쌀뜨물도 맛볼 수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 틈틈이 나를 들여다보네요. 마디마디 줄기를 살피며 무슨 징후를 보려는지 자꾸 고개를 갸웃거려요. 여자가 기다리는 건 바로 꽃이라는 걸 얼마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 여름, 어쩌다 여자는 화분에서 피워 올린 고구마꽃을 보았나 봅니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 여자는 나도 꽃 피워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백 년에 한 번 핀다는 고구마꽃. 수더분한 나팔꽃같이 생긴 그 꽃이 꼭 예뻐서만은 아닐 겁니다. 좀체 보기 어려운 귀한 꽃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녀와 더불어 나의 두 번째 여름이 지나갑니다. 그녀는 거실에서 나는 베란다에서 시원한 바람과 단비를 기다렸죠. 너무 더워 내가 잎을 축 늘어뜨리면 한 바가지 불로 갈증을 풀어주었고 그녀도 나처럼 물을 뒤집어썼습니다. 집 안에 화분이 몇 개 더 있지만, 어느 것도 나처럼 쑥쑥 크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매어놓은 줄 끝까지 줄기를 감아올렸고 잎도 무성했어요. 그래도 여자는 늘 뭔가 아쉬운 표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꽃을 피우지 못한 채 가을을 맞았습니다. 하나둘 잎이 떨어지고 덩굴도 말라 갔습니다. 그래도 여자는 꽃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나를 그대로 두고 보고 있네요. 어느 날부터인가 여자와 나는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때때로 마주 바라봅니다. 나를 보는 여자의 눈빛이 애잔해요. 그런 그녀를 향해 힘껏 내 마음을 전합니다.
‘ 당신이 원하는 꽃은 내게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꽃이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늘 꽃 보듯이 나를 보지 않았나요. 나 또한 벼랑 끝에서 살아난 순간부터 내 안에 있는 초록을 피워내 온 집 안에 푸른 기운이 돌게 했고 여름 내내 창가에 서서 손을 흔들 듯 초록빛이 넘실거리게 했습니다. 그런 나에게 환한 웃음과 애정 어린 손길을 나눠주던 당신, 어찌 보이는 꽃만 꽃일까요. 보이지 않아도 꽃처럼 귀하게, 꽃보다 아름답게 여겨주는 당신이 고구마꽃의 꽃말처럼 나에게는 진정 행운이었습니다. 마주 보며 서로 꽃으로 여기는 세상, 그 세상에서 당신과 내가 함께 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바보 당신.’
내 말이 들렸을까요. 여자가 웃고 있네요. 그 이후로도 나는 밭의 고구마는 꿈도 못 꿀, 맨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도 보았고 첫눈도 보았습니다. 오래 살았죠. 하얗게 서리가 내리던 날, 여자는 신문지를 깔고 조심스레 나를 들어 올리네요.
“세상에나.”
여자가 탄성을 지릅니다. 원래 내 몸은 빈껍데기만 남고 예전의 내 모습과 똑 닮은 고구마 하나가 딸려 나오는 것을 보고 적이 놀라는 눈치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그것 하나 키웠어요. 굽이굽이 돌아 나는 고구마 한 개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여자는 신기한 듯 자꾸 바라보네요. 그녀는 알아들었을까요. 마지막으로 흘리는 내 마음속의 말, ‘당신 덕에 두 번째 생은 온전히 꽃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은 덤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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