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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실비집 / 윤계순

에세이향기 2024. 5. 25. 04:25

실비집 / 윤계순

어떤 말끝에

실비집이라는 말이 튀어나와

인터넷 검색을 하니, 그곳에 아버지가

참 난처하게 앉아 내리는 실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비, 곤궁한 주머니 사정을 곤궁한

값으로 쳐서 받겠다는 뜻 같은데

나는 왜 실비집을 가늘게 내리는

그 실비로 생각했을까

실비, 노천의 막일에 이처럼 어정쩡한 판단이 또 있을까

일을 하자니 자재資材들이 젖고

말자니 한 겹 주머니가 젖을 터

그 두 가지 사정엔 미루어지는 공기工期와

공치는 일당이 있다

허름한 일진日辰이 축축해져,

실비 오는 듯 집을 나섰는데

덕지덕지 바른 신문지 벽에 등을 기댄

양철 지붕 처마 끝, 흘러내리는 빗소리에

서둘러 천막 덮어놓고

홑겹 사정들도 꾹꾹 덮어놓고

이 핑계 저 핑계가 아니라

모처럼 한 핑계로 둘러앉는 실비집,

실비는 계속 내리고 노래들은 점점 삐뚤어지고

찌그러진 양은 잔에도 콸콸 부어지는

얼큰한 체념들, 희미하게 비틀거리는

전봇대 사이를 지나면서도 목청 높게

더 높게 하늘처럼 높은 이름들을 부르는 아버지들

이젠 두둑하게 제 밥벌이 자식들

모두 떠나보내고도 밑진 값으로 넘어가는

아버지의 하루가 실비 내리듯

새어나가고 있는 왁자지껄한 실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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