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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물집 / 김미향

에세이향기 2024. 5. 25. 04:27

물집 / 김미향

전못 하나 박지 않고 주먹장이음 공법으로만 지은

물결과 윤슬로 빚은 물의 집,

물의 골재를 채굴하려면 수심 몇 길까지 발품을 팔아야 할까

물은 목제나 철제보다 강해 녹슬거나 부러질 리가 없어

집을 짓는데 긴요히 쓰이는 건축기법이다

설계도를 펼치면

다양한 물의 부재들이 빼곡하게 설계되어 있다

물의 집 한 채 짓기 위해

물의 사유는 얼마나 깎이고 버려지고 다듬어져야 했을까

이글루 공법으로 쌓아 올린 물방울 집은 입구가 없다

빛이 관통하는 모든 곳이 출구라 물의 집은 사방이 문,

물집의 건축술에는 사유의 조감도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삼보일배의 고통, 장고의 시간, 노독의 궤적까지

수위가 깊은 문장은 물집의 집대성인가

퉁퉁 부르튼 발은 건축의 바탕, 속여*였다가 잠길여**였다가

몸의 가장 바깥 궤도를 공전하고 있는 물의 집

오체투지체로 쓴 설계도의 목록마다 허물어진 물담이

그래도 마지막 기댈 곳, 한 몸 발 뻗고 누울 방 안에서

구부린 등이 물방울을 닮은 한 남자가

발가락에 난 물집의 風磬을 타종하고 있다

* 속여: 물속에 있으면서 썰물 때도 드러나지 않는 암초.

** 잠길여: 썰물 때 드러나는 암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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