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 국명자
봄은 산골짜기에서 맞닥뜨려야 한다. 잠시 들르거나 멈추어 선 길손이어도 안 된다.
새벽 미명부터 땅거미 내려앉아 어두움이 짙게 깔릴 때까지, 마루와 마당으로 시시각각 다른 모양 되어 들르는 봄의 미세한 모습들을 눈치챌 수 있는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면 딱 좋겠다. 고샅으로 내달린다 해도 논두렁 밭두렁이 종착지가 되고, 이마에 손 얹어 먼 눈 뜬다 해도 앞산 뒷산 자락에서 멈추는 그런 산골 삶이라면 더욱 좋겠다.
자그마한 남향 집, 낮은 울타리 두른 작은 마당에 서 있으면 가만가만 몸 뒤척이기 시작하는 봄의 첫 기척을 듣는다. 나무들을 깨우는 거센 바람은 당당하게 입성하는 봄의 첫 발자욱 소리다. 간단없이 불어대는 그 바람은 냉기와 침묵만으로 일관하던 골짜기가 드디어 기적의 골짜기로 바뀌기 시작할 것이라는 신호탄이 되기도 한다.
꽁꽁 얼어 있던 산골짜기가 뿌예진 하늘 밑에서 녹아내리기 시작하고, 깨어난 나무들이 물을 올리면서 잔가지 끝마다 잔털들이 보송보송 올라오기 시작한다. 꽃과 잎이 없는데도 물오른 나뭇가지들이 사람들의 눈길 사로잡고 가슴 흔들어대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이때다. 반듯하기만 했던 햇살이 비스듬하게 누어버리고 투명했던 바람과 공기도 소곤거리듯 다사롭게 내려와 있어서 눈만 뜨면 사방팔방 온통 꿈꾸는 화면이 된다. 발에 채이는 돌멩이까지도 정다워 보여서 보고 또 보곤 한다. 동네마다 트집잡기로 정평이 난 억센 사람들까지도 이때만은 순하고, 편한 얼굴들이 되어 수시로 잘 웃는다.
코끝에서 넘실대는 산골 향기 달고, 귀청엔 짝 찾는 산새들의 합창 소리 떠나지 않아서, 산골 사람들 손 놓은 채 잠간씩 넋 나간 사람들이 되어 있다가 실없이 혼자 피식 웃는다.
검은 베레모 머리에 얹고 잿빛 망토 두른 위풍당당한 산새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와서 단체 나들이를 즐기면, 사람들은 동토에 삽꽂아 놓고 건초 태우고 퇴비 퍼 나르고 호미로 땅 두드려 깨우면서 자신의 팔뚝에도 힘을 싣기 시작한다.
매화가 망울망울 꽃망울을 매달고, 마루 앞에 선 산진달래가 불그레하게 피어나기 시작한다. 앵두와 파리똥 나무도 꽃망울을 매달고 줄을 선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이때쯤이면 사람들 가슴 속에서도 거센 바람이 일어난다. 그리움을 앓기 시작했던 저 먼 어린 시절처럼 이유 없이 가슴 속이 애절해지고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을에 들른 불그레한 시내버스에 몸을 싣고 늘상 지나치기만 했던 선돌단지, 디자미, 대흥리, 지향리, 송관, 소양마을에 서슴없이 내려서 만나는 사람마다 손 붙잡고 안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과 솟구쳐오르는 사랑으로 가슴이 메어지는 증세를 앓기 시작한다. 처방도 약도 받을 수 없는 증세를 앓는다. 마치 하지감자 심고 나면 앉은 강낭콩 심어야 할 때가 된 것이고, 깨중가리 잎들이 어른 손바닥 길이로 자랄 때쯤이면 생강을 심어도 된다는 산골의 틀림없는 달력처럼, 마른 나뭇가지 끝에서 꽃망울들이 어여쁜 얼굴들을 내어놓을 때쯤이면 이때다 싶게 가슴 속이 아릿하게 술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봄바람은 나무 흔들어 잠 깨울 때 사람들의 오장육부까지 들어와서 용기와 그리움과 흥의 담당 장기인 간(肝)을 흔들어 깨운 모양이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돌아섰던 사람, 상처 입혀서 미안하여 영원히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아직 안면도 트지 않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모두 그리워지고 사랑스러워지는 것이다. 같은 하늘 밑에서 함께 살아온 긴 세월들을 서로 차하하면서 손잡아 안부 나누고 싶은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굴뚝처럼 솟는 것이다.
호주머니 속에 영영 갇혀 있을 줄만 알았던, 내 인색하고도 무력한 손을 꺼내어 세상 향하여 흔들게 하고 그리움과 사랑으로 가슴 끓게 하면서, 코끝 입끝 발끝과 어깨 위에 흥 실어 주고 덩실대게 하는 봄바람의 위력에 감탄한다.
동토의 지표를 뚫고 일찌감치 얼굴 내민 달래, 냉이, 머우, 위, 쑥, 곰취, 싸랑부리, 씀바귀, 멜라초들이 한결같이 쌉싸름한 맛인 것은 봄바람으로 깨어난 간을 위하여 입으로 들어가는 최적의 보양식이 되기 위해서란다. 제일 먼저 꽃 피우며 서둘러 열매 맺는 매실과 살구도 눈 감기도록 시디신 맛을 가지고 와서 간의 능력을 도와주는 에너지가 된다던가.
살랑거리는 봄바람 한 장을 통하여 잠들었던 동토를 녹여서 생명들을 깨우고, 강퍅했던 사람들의 가슴 속까지도 녹여 아름다운 모습 되어 일어서게 하는 창조주의 섭리가 신비롭다. 그 적나라한 기적의 작업 현장을 숨기지 못하고 다 들키고 마는 산골짜기 사람 되어 사는 것이 행복하다.
벽촌 산골에서 자란 촌스러운 소년이 감히 대통령도 되고 장군도 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상을 감동시키는 예술가들의 고향이 시골 벽촌이 많고 산골짜기인 것도 이제는 이해가 될 것 같다.
고향 그리움 하나만으로도 번잡한 도시의 후유증을 넉넉히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을 당신들에게 산골짜기에서 한창 흐드러지게 열리고 있는 생명 축제의 소식을 전한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봄 햇살 느슨하게 올라와 있는 마루 위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려는 그리움의 첫 문장을 우선은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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