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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 강숙련

에세이향기 2024. 12. 25. 06:34

종소리 - 강숙련

 

 

 

 

 

누가 시(詩)를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 했다. 밀레의 ‘만종’ 앞에 서면 ‘소리로 그린 감동’이란 표현으로 그 말을 써 보고 싶어진다. 문화의 차이는 감성의 차이도 만든다는데, 종소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다.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감미롭게 다가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중에 종소리만한 것이 있을까. 형체도 없는 것이, 잡아 가두려야 가둘 수도 없는 것이 마치 청동의 꽃에서 나는 향기라고나 할까. 교회나 사찰의 새벽종소리를 들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통도사 절 밑에 있는 어느 호텔로비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경영주인 지인(知人)이 술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덕담을 건넸다.

 

“올해는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 수필이란 종소리 같은 글이겠지요?”

 

어쩜, 저런 말씀도 다 하실까! 그래요, 수필이란 종소리 같은 글일 거예요. 문득 내 가슴속에도 수필이란 종루(鐘樓)하나가 서 있음을 깨닫고 뭉클한 감동이 인다.

 

내가 쓰는 글-. 언어의 재료로 어설픈 종 하나 만들어 달고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마음의 빗장을 열어 놓고 가만가만 소리를 따라 나서 보기도 한다.

 

소리는 저만큼 비켜나도 가슴 한 귀퉁이에 잔잔한 파장이 남아 있어야 제대로 된 종이다. 아무리 커다란 함성이라도 그의 몸속에 담기면 일단 숨을 죽이고 더 깊이, 더 맑게 가라앉아야 한다. 터져 나오는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각혈하듯 토해 내는 생소리라면 종이 아니고 다만 쇳덩어리의 마찰음일 뿐이다.

 

수필 또한 마찬가지다. 치는 대로 울리는 종이 아니라 온 몸으로 소리를 가두었다가 육신을 덩덩 울려서 사람의 심금을 흔드는 종이 수필일 것이다. 오관을 통해서 느낀 감동을 지그시 가두었다가 언어의 떨판에 얹어 가만가만 되돌려 내놓을 때 제대로 된 글이 될 것이다.

 

어찌 수필만 그럴까. 사람들의 삶 또한 그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 본다. 모두가 저마다의 가슴속에 제각각의 종을 매달고 사는 것이리라. 예술가는 예술가대로, 교육자는 교육자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쉼 없이 자신의 종을 지키고 사는 종지기가 아닐는지.

 

연 전에 경주에서 에밀레종을 보았다. 옛 서라벌의 태평성대를 지키던 성덕대왕의 신종이다. 더 깊고 더 맑은 소리를 얻기 위해, 더욱 은은한 맥놀이의 여운을 얻기 위해 어린애기를 바쳤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 34년간의 주조기간을 보내고도 소리다운 소리를 얻지 못하다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제물로 삼고야 건져내었다는 종소리. 새벽마다 울려오는 그 애련한 소리를 듣고 서라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신라인들이 에밀레종에 쏟은 성심(誠心)이 근접하기 어려운 불가사의로 느껴질 뿐이다.

 

나는 가끔 상상 속에서 종을 친다. 소리의 끝을 따라 끝없이 가다보면 어느새 미궁 속을 헤매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얼마나 더 공을 들여야 제대로 된 소리를 갖게 될까. 내가 쓰는 글이야말로 얼마나 더 성심을 쏟아야 할 것인가. 목숨보다 더 귀한 자식을 바쳐서 건져낸 여음이라는데, 나는 무엇을 얼마나 더 버릴 수 있을까.

 

어릴 적, 교회당의 종탑 밑에서 예배시간을 알리는 타종을 지켜 본 적이 있다. 뾰족한 탑을 세우고 그 끝에 매달린 쇠종을 긴 줄에 연결하여 수없이 안벽을 때리는 서양종이었다. 거리낌 없이 쇠몽둥이추에 제 몸을 부딪치는 종을 올려 보다가 그 큰 소리에 얼이 빠져 버리곤 했다.

 

매달아 놓고 때려서 소리를 내기는 절간의 범종도 마찬가지다.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던 우리나라의 전통악기인 편종도 쳐서 소리를 내기는 마찬가지다. 종이란 무릇 자신을 고통 속에 버림으로 은혜 같은 소리를 내는 악기인가 보다.

 

종을 치듯 수필을 쓰고 싶다. 어설픈 종루(鐘樓)일망정 정성을 다해 소리를 지키는 종지기가 되고 싶다. 아니 차라리 부딪쳐 고통 받는 종이면 어떨까. 깨어지고 또 깨어지는 순간들을 거치고 나면 나에게도 향기 같은 종소리가 여울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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