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꽃이 피었다 / 전성옥
천변에 외꽃이 피었다. 물외인지 참외인지 모르겠다. 개나리만 한 노란 꽃이 땅바닥에 붙어 피었다. 가느다란 넝쿨손이 조심스레 땅을 붙잡고 간다. 다문다문 달려 있는 진초록 이파리, 보송한 솜털, 어찌 여기 터를 잡았는지, 위태하고 아슬하다. 한 발만 저편으로 넘어가면 개천에 빠졌을 것이요, 반대편으로 한 발을 나갔다면 사람에게 밟혔을 것이다. 그 아슬한 경계에 엎드려, 서걱대는 마른 갈대를 움 삼아 철을 잊은 채 피어 있다.
늦은 가을과 이른 겨울이 겹치는 즈음이다. 저 작은 외꽃은 아마도 두벌살이를 하는 중이리라. 한여름, 외가 제철일 때 누군가 먹고 버린 껍질 속에서 가만히 숨어 나오 흙을 만났을 것이고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걸 느끼고는 본능처럼 움을 틔웠을 것이다. 그런데 미처 알지 못했나 보다. 그 온기가 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는 후끈한 상승기가 아닌, 한 자락 두 자락 식어가는 늦가을의 그것임을. 옅은 온기는 삭아 내리는 숯처럼 이내 잦아들고 차갑고 마른 바람이 불어올 것인데, 바람의 날은 점점 예리해질 것인데 저 작은 외꽃은 이 추운 날 어쩌자고 저리 바들바들 피었을까.
더러 정신없는 꽃이 시절을 착각하고 피기도 한다. 개나리가 그렇다. 봄이면 산언덕이고, 집 울이고, 동구 어귀고 가림 없이 핀다. 사방으로 출렁이며 빈틈없이 핀다. 그러고도 한이 풀리지 않았는지 폐병쟁이 얼굴 같은 이 노란 꽃은 철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갗에 따뜻한 기운이 닿기만 하면 덮어놓고 핀다.
그러나 질정 없이 피는 이 꽃을 보고도 사람들은 그저 그러려니 한다. 저것이 또 병이 도졌구나 하면서도 신통하다 한 번 더 봐주기까지 한다. 개나리는 가득히 얽혀 산다. 덤불로 얽히고 길을 따라 얽힌다.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어 보인다. 감히 누구 하나 건드릴 수도 없을 듯이 그렇게 수없는 무리들이 뭉쳐 산다. 그런데, 그래도 핀다. 그토록 많은 제 무리 속에 살면서도 외롭고 적막했는지 온기만 느끼면 나 여기 있어요, 얼굴을 내민다.
백만 대군 개나리조차 그러할진대 혼자 피어난 저 외꽃은 어떠할까. 주변에는 동료도 없고 보살펴줄 누구 하나…없다. 더군다나 지금 저 자리는 몸을 조금만 기울여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곳이다. 무거운 체중을 실은 사람의 발이 하루 종일, 혹은 밤이 깊도록 땅을 울리고 지나다닌다. 사람의 흔적이 사라지면 야생 오리들의 넓적한 발이 천변을 밟아 대고, 연한 풀을 찾는 그들의 주걱부리 닿지 않는 곳이 없다. 한나절, 차가운 비라도 내릴라치면 개천이 넘쳐서 온통 쓸어버릴 것인데 이는 또 얼마나 조마조마할까. 긴장한 외꽃의 빳빳한 솜털. 그러나 이 긴장이 하루를 살아내는 것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욕심인 걸까. 세상에서 가장 큰 그릇이 욕심이라는데, 아무리 채워도 차지 않는 그 그릇 때문일까. 한 해에 한 번인 풀의 일생, 한 번 꽃 피우고 족했을 것을 무슨 미련이 남아, 사그라지는 온기에 또 움을 틔우고 기어이 꽃까지 피웠을까. 다른 이들은 한번 살고 가는 생을 혼자 거푸살이를 할 수 있을 거라 욕심을 부려본 걸까. 그 꽃에 벌레가 날아오고 열매가 열릴 거라 가당찮은 욕심을 품었던 것일까. 이미 들판은 삭풍이 지배하고 새벽녁이면 하얀 무서리가 유령처럼 날아내리는데, 발밑을 들쑤시는 얼음기둥으로부터 이 땅을 떠나라 서러운 재촉을 받고 있는데.
보고픈 얼굴이 있는 것일까. 죽어도 못 잊을 그리운 얼굴이 있어, 행여 이 길을 지나갈까 그 작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무상하여라. 설혹 지나간다 하여 알아봐 주기나 할 것인지. 땅바닥에 붙어 겨우 피는 작은 얼굴을 기억해낼 줄 것인지. 파랗게 얼어 있는 얇은 손을 잡아주려 무릎을 굽혀줄지, 혹 장갑 벗은 손이라도 내밀어줄 것인지… 올려다보는 가느다란 고개, 금방이라도 푹 꺾일 것 같다.
툭! 떨어질 것이다. 마른 갈대를 움켜쥐고 있는 작고 파리한 손, 꼬물꼬물 꼬불꼬불 손가락 하나짜리 손으로 땅을 기고 있지만 얼음바람의 후달김을 결국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병색 짙은 노란 얼굴도 하얀 무서리에 잡아먹힐 것이다. 눈도 코도 없이 차가운 망토를 펄럭이며 천지를 덮는 하얀 귀신에게 끝끝내 혼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윤회일지도 모르겠다. 바퀴가 너무 빨리 굴러 또 한 번의 짧은 생을 제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내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내 뜻도 제 뜻도 아닌, 우주의 바퀴에 그저 실려가는 작은 얼굴일 수도 있겠다. 지금 저 외꽃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정수리에 떨어지던 더운 햇살, 땅속 발가락에 느끼던 그 온기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고 씨앗 속으로 미처 몸을 숨기지도 못했는데 추위 속에 삶이 끝나려 한다. 그 애잔함이 혹여 다음 생을, 풀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태어나게 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외꽃아, 너의 살이가 이렇게 추운 걸 보니 혹시 너는 수억겁전의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추위 타는 나는, 노란 외꽃 옆에 앉는다. 꼬물거리는 풀 손이 다칠까 마른 갈대를 젖히고 가만히 앉는다. 차가운 물바람이 천변을 타고 오른다. 물살에 날을 세운 바람은 외꽃의 작은 얼굴을 훑고 파삭한 내 머리칼을 헤집어 놓는다. 우수수 스삭스삭, 갈대가 항복하는 소리가 천변을 타고 오른다.
마음의 말, 낮게 건넨다. 피지 말아라. 사람들은 여전히 이 천변 길을 무겁게 밟을 것이고, 모진 소리를 내는 바람은 오래오래 언덕을 휘감을 것이니 노란 외꽃아, 이제는 피지 말아라. 다시는 피지 말아라. 씨를 옮겨 줄 벌레도 못 되어 주고, 여름 햇살 같은 익힘도 못 되고, 감싸줄 한뼘 비닐 덮개도 못 되는 나는 그저 아프다. 너처럼 아프고 너처럼 춥다. 그리고 너처럼 세상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