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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점/전미경

에세이향기 2021. 6. 23. 10:25

점 / 전미경

 

있어야 할 것과 있어서는 안 될 것의 모호한 경계가 판단을 흐리게 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상황에서 자신이 선택한 길이 오히려 아니함만 못할 때 오는 후회, 나는 그 쓰린 경험을 반갑지 않은 훈장을 달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갈등하는 사이, 마음자리에 들앉은 불편이 미뤄오던 시간을 끌어당겼다. 수십 번을 망설이다 찾은 피부과, 왼쪽 손등 위에 돋아난 일광흑자를 제거하기 위해 두꺼운 병원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손등 한가운데 생긴 검은 점이 마음 한 곳을 실시간으로 조여왔다. 책장을 넘길 때나 키보드를 두드릴 때면 두 눈이 내리꽂히는 지점, 익숙지 않은 불편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시간이 갈수록 짙게 침착되어 가던 검은 점은 나를 자유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했다. 점이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는 손등 정 중앙에 자리를 잡으면서 사사건건 내 시야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결심과 포기를 몇 년째 이어오다 더는 생각 그물에 갇힐 수 없어 내원으로 갈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오랜 시간 마음을 저울질하던 결심과 포기의 교집합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에 따른 기대의 포개짐이었다.

손을 내밀 때마다 자신감이 떨어졌다. 손 맵시가 좋다는 소리를 수시로 들었던 터라 불청객이 된 점 하나에 손을 내보이기가 민망스러웠다. 스스로 자유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주변 권유를 묵과할 수 없었다. 좋은 세상에 태어나 문명의 혜택을 받으면 될 일을 쓸데없는 고민에 사로잡혀 괜히 마음에 짐을 지운다며 친구들로부터 자주 핀잔을 듣곤 했다. 생활에 불편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점을 뺄 필요가 있을까 하는 고민이 이어졌지만, 결과는 늘 제자리였다.

피부과를 들어서는데 대기실이 사람들로 넘쳐난다. 나는 점 하나를 빼기 위해 몇 년을 고심한 터라 다들 나처럼 힘겹게 피부과를 찾았을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생각은 낯선 이들 얼굴 위에 조심스레 겹쳐졌다. 대부분의 표정에 불필요한 흔적을 지우기 위한 의사가 뚜렷해 보였다. 피부에 안착한 불청객이 걸림돌로 작용한 이상, 누구라도 더는 시간을 지연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손서를 기다리던 중 내부 시설에 눈길이 쏠린다. 직원도 여러 명이다. 스물을 갓 넘은 앳된 젊음이 풋풋한 피부만큼이나 신선해 보인다. 젊디젊은 시절의 내 모습을 보는 듯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모니터 화면에 마우스로 아이콘을 불러오면 창이 나타나듯 젊음 역시도 모든 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였다.

파릇파릇하던 젊은 날, 피부가 맑고 희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지금은 피부 곳곳에 잡티가 안착해 그 맑음을 잃어가고 있지만, 한때는 모든 게 기대로 부풀어 오르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표시해 준 영역에 괜히 쓴웃음이 나온다. 나이가 들어도 미를 추구하는 여자로 살고 싶은 건 인간이 지닌 본능일 터, 성형미인은 아니어도 미적 효능을 찾을 수 있다면 그 노력이 아깝지 않았다.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진료실에서 의사와 간단한 상담이 이루어졌다. 상담 중 '생활에 불편이 없는데 굳이 점을 빼야 하나?'그 짧은 틈새에 또다시 밀고 올라오는 생각. 머뭇거리는 내 모습이 의사 얼굴에 반사되었다. 의사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사무적인 말투로 작업인의 모습만 보일 뿐 나의 고민 따윈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 나는 그저 제조기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상품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인간적인 호의가 존재하지 않는, 오직 목적과 거래로만 이루어지는 그런 관계였다.

의사가 내게 방문한 목적을 물어오자 무슨 용기가 생겼던지 손등의 점 외에 얼굴에 착색되어가고 있는 일광흑자까지도 제거해 줄 것을 의뢰했다. 겁도 없이 이제 막 생성되어, 잘 드러나지도 않는 점까지 제거해 달라니 이해할 수 없는 용기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옅은 점, 내친김에 낸 용기가 후회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점 빼는 시술은 간단하고 빨랐다. 1~2분 남짓 따끔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끝이 났다. 직원으로부터 제거 후에 주의해야 할 피부 관리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가벼운 마음으로 피부과를 나왔다. 피부과에서 일러준 대로 어긋남 없이 그 말을 따랐기에 말 잘 듣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혹여 관리 소홀로 힘들게 제거한 점이 아니 한 것만 못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점이 빠져나간 자리는 며칠 후 붉은색을 띠더니 전차 검은색을 띠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옅어질 줄 알았던 흔적은 오히려 짙은 색으로 마음을 어지럽혔다. 손등의 점만 제거할 일을 공연히 잘 드러나지도 않는 얼굴의 점까지 없애겠다고 과도하게 욕심을 부려 일을 그르친 것 같아 후회가 밀려왔다.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여온 격이 되고야 말았다. 의사의 손길을 빌리면 사라질 줄 알았던 점이 짐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세월의 나이테를 받아들이는 건 자연의 순리, 그냥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면 될 일을 애써 거부하며 부정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생각처럼 행해지지 않음은 버리고 갈 것마저 손아귀에서 쉽게 놓지 못하는 욕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속 타는 만큼 부끄러움만 한 층씩 더해가고 있다.

간혹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마음을 다했다가 그르친 일이 어디 점 빼는 일뿐일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모호한 경계에서 그릇된 판단으로 낭패 본 경험이 내 삶의 수행 과정이었음을 깨닫는다. 점이 짐이 되는 일은 두 번 다시없길 바라며 마음에 방점 하나 찍어 삶의 교본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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