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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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마당/김해남

에세이향기 2021. 6. 24. 16:45

마 당

                                                                                                                        김해남

 

  한차례 소나기가 지나가자 푸석하던 흙 마당이 촉촉하게 젖었다. 한 구석에는 늘 가릉대는 늙은 개의 웅크린 모습과 찌그러진 양재기에 불어터진 밥알, 그리고 헛간 담벼락에 바짝 붙여 매 놓은 낡은 멍석, 장독대위에 내려앉은 햇살과 수돗가 빈 바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만 달그락거린다.
비 긋고 지나간 마당에 잡초가 파랗다. 거름 한 줌 뿌려 준 적 없고, 갈증날 때 물 한 모금 먹인 적 없어도 어쩜 이리도 잘 자라는지,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사정없이 모가지를 비틀어 내팽개쳐도. 녀석들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만 내리면 고개를 바짝 쳐든다.
잡초를 뽑아내고 비질을 한다. 바지랑대에 미끄러지는 한낮의 햇살이 오지다. 오똑하니 앉아 남상거리던 깃 젖은 콩새 한 마리가 포르르 마당으로 내려앉는다 내 아이들에게 군음식을 나누어주듯 콩 한 줌을 뿌려주니, 뒷다리로 흙을 콩콩 차며 좋아라 모이를 줍는다.
빨래를 내다 널어놓고 젖은 멍석을 말린다. 곰팡내가 난다. 긴 시간 희노애락을 함께 했던 곰삭은 이 냄새가 왜 그런지 싫지 않다. 오래 전에는 마당에다가 초례청을 마련하였을 것이다. 자식들 모두 키워 혼인을 시키고, 늙어서는 친척들 모두 불러 환갑잔치도 벌이고, 그런 날은 뒤란에 솥을 걸어 돼지머리를 삶고 떡국을 끓였으리라, 가끔은 서러운 귀신들도 불러들여 한 판 굿마당도 벌였으리라. 징이며, 꾕과리들 한참동안 부서지고, 자지러지고 나면 마당은 평온해 졌을테지,
  멍석에 앉아서 묵은 이야기를 들춰본다. 그 때 여름에는 밤마다 멍석을 폈다. 들에 갔던 식구들이 모두 모이면 나는 멍석에다 밥상을 차렸다.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도란거리던 아이들은 내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고, 모깃불이 사그라지고, 감자가 익을 무렵, 모기를 쫓다가 감자가 익을 무렵이면 하늘을 쳐다보았다. 한없이 넓고, 깊고, 아늑한 하늘은 내게 위안이었다.
두 아이의 유일한 놀이터는 마당이었다. 풀 뜯어 소꿉놀이하고 빗금 그어놓고 밤톨만한 돌멩이를 주워 공기놀이도 하고, 바지랑대에 고무줄을 매 놓고 팔랑팔랑 줄넘기를 할 때면, 햇볕도 덩달아 좋아라 까불거리며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이제 마당에는 아이들의 발소리만 남았다. 고요한 마당에 내려서면 나는 가끔 쓸쓸하다. 그러나 햇살과 바람, 잔 돌멩이, 풀, 콩콩거리던 발소리가 있어서 그다지 외롭지는 않다.
  산골마을의 아침은 언제나 비질소리로 시작되었다. 마당은 언제나 정갈하였다. 시멘트를 발라놓은 듯 매끈하게 다듬어야했다. 빗물에 흙이 패이면 아버님은 먼 산에 가셔서 황토 흙을 져다 날랐다. 발로 밟아가며 다지다가 성에 안 차면 손바닥으로 자근자근 눌러 다졌다. 도리깨질하는 남정네의 어깨는 절로 신명이 났고, 키질하는 아낙네의 수고로움도 덜어주었다.
시아버님의 비질소리는 자명 종소리보다도 더 정확했다. 새벽잠 많은 며느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비질소리에 일어나 잠을 털고 가마솥에 쌀을 안쳤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어 가는 걸까, 도시의 아파트촌에서 하룻밤 묵어 오는 날이면 듣기 싫었던 비질소리가 그리워지니.
마당을 쓸 때에도 아버님은 언제나 바깥에서 안으로 쓸어모았다. '집안에 든 복을 바깥으로 쓸어내서는 안된다' '마당에 떨어 진 보잘것없는 것들이라도 함부로 내 몰지 말아라'. 라고 하시던 아버님, 잔 부스러기들도 내 몸에서 떨어져나간 생의 일부분이라고 여기던 시아버지의 소박한 마음도 이제 내 마음에 닿아 나는 비질을 할 때마다 바깥에서 안 마당으로 쓸어들인다.
하지만 마당은 따뜻하고 미학적인 추억만을 들춰내지는 않는다. 새댁시절 친정 어머니가 딸 사는 것 보려고 연락도 없이 마당을 가로질러 오시던 날, 저고리 소매 끝에 그을음을 조롱조롱 달고 눈물 그렁하게 어머니를 맞이했지만, 어머니는 그런 딸이 애틋하여 마루에 걸터앉지도 않고 흙 마당에 망연히 서 있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흙 마당에 시멘트라도 좀 바르고 살지' 애꿎은 흙 마당 탓을 하시다 가신 이후, 어머니가 발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가 돌아나간 마당에 서면 나는 요즈음도 발뒤꿈치가 아프다.
마당에는 이제 타작하는 풍경도 키 질 소리도 사라진 지 오래다. 말 상대자가 없는 나는 심심하면 구석에 웅크린 늙은 개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볕 좋은 날에는 멍석을 말린다. 콩 한 줌으로 콩새를 불러들여 이야기도 줍고, 마당에서 자라는 하찮은 풀 한 포기도 이제 나의 다정한 벗이다.
포실한 흙의 촉감이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전해져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일치감이 느껴진다. 고인 물처럼 일상은 무료하고 풍경은 늘 막막한, 그래서 늘 사소한 것이 되어버리는 굼뜬 시골 살이지만, 그래도 내게 위안이 되는 것은 사라져 가는 것들이 발산하는 한없이 넓고 부드러운 세월의 향기이다. 앞서 마당을 건너 간 삶의 얼룩, 혹은 무늬 중 하나인 나, 또한 하나의 배경으로 이 마당을 건너 갈 테니까.

2004년 에세이문학 여름호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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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남의 '마당'에 대한 평론/ 이희자

  한 편의 글이 문학성, 즉 예술성을 가졌는가 하는 것은 '표현'과 '재현'의 문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일상적 언어로 자신의 체험을 설명하는 데 그친 글은 사실의 '재현'에 불과하다.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작자의 주관에 의해 재구성되어 문학적 언어로 '표현'된 글만이 예술 작품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김해남의 '마당'은 뛰어난 묘사력으로 표현의 묘를 얻은 작품이다. 그는 작중 사물과 인물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미적 대상으로 구체화를 시키고 있다.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가자 푸석하던 흙 마당이 촉촉하게 젖는다. 한 구석에는 늘 가릉대는 늙은 개의 웅크린 모습과 찌그러진 양재기에 불어터진 밥알, 그리고 헛간 담벼락에 바짝 붙여 매 놓은 낡은 멍석, 장독대 위에 내려앉은 햇살과 수돗가 빈 바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만 달그락거린다.

  막이 오르면 커튼사이로 점차 드러나는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하다. 이 작품의 무대 장치는 이것이 전부다. 김해남은 이 몇 가지 소품 열거와 묘사만으로도 '고인 물처럼무료하고 막막한' 굼뜬' 시골살이의 배경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자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 툇마루 끝에 앉아 소나기 그친 후더 적막해진 마당을 바라보는 것 같다.
산골마을의 고요한 한낮, 정적속에 그는 혼자다. 혼자이기 때문에 주변의 사물과 정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본다. 무심한 햇살도 그에게는 관찰의 대상이 된다. 처음 장면에서 '햇살은 장독대

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일어서서 움직이기 시작할 때 햇살은 바지랑대에 '미끄러진다.' 그리고 추억 속에서 아이들이 줄넘기를 할 때, 햇살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까불거린다'
작자의 시선에따라 변하는 햇살은 이 연극무대의 조명이 되어 적막감의 속도를 조절한다. 수필은 보이지않는 독자를 향한 독백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수다하게 늘어놓기만 하는 글은
독자가 끼어 들 틈이 없다. 김해남은 예리한 관찰로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사물과 분윅기를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시골집 마당' 이라는 하나의 공간을 창조해 냈다

글을 읽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그 마당을 밟고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이제 독자는 작자의 시선으로 보고 작자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마당에는 추억속의 두 인물이 번갈아 등장하며 이 공간에 대한 그들의 애증을 펼쳐보인다.

산골마을의 아침은 언제나 비질소리로 시작되었다.  마당은 언제나 정갈하였다. 시멘트를 발라놓은 듯 매끈하게 다듬어야했다. 빗물에 흙이 패이면 아버님은 먼 산에 가셔서 황토흙을 져다 날랐다.
발로 밟아가며 다지다가 성에 안 차면 손바닥으로 자근자근 눌러 다졌다.(...)
새댁시절 친정 어머니가 딸 사는 것 보려고  연락도 없이 마당을 가로질러 오시던 날, 저고리 소매 끝에 그을음을 조롱조롱 달고 눈물 그렁하게 어머니를 맞이했지만, 어머니는 그런 딸이 애틋하여 마루에 걸터앉지도 않고 흙 마당에 망연히 서 있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흙 마당에 시멘트라도 좀 바르고 살지' 애꿎은 흙 마당 탓을 하시다 가신 이후, 어머니가 발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가 돌아나간 마당에 서면 나는 요즈음도 발뒤꿈치가 아프다.
'시멘트를 발라놓은듯'매끈한 흙마당은 친정어머니의 '시멘트라도 좀 바르고 살지' 한 마디에 그만 무색해지고 만다.

이 절묘한 대구,친정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손바닥으로 자근자근' 눌러 다져놓은 마당을 '발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가' 돌아나간다.
딸의 시집살이를 애틋해하는 친정어머니의 속마음을 이보다 더 함축해서 표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묘사의 힘이다. 인물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 내 보이는 이런 구체적인 몸짓 하나하나는 언어로 창조된 인물들을 실제 인물인 양 살아 숨쉬게 한다.
추억속의 인물들이 퇴장하면 다시 적먹해지는 마당'늙은 개'와 '찌그러진 양재기'와 '낡은 멍석'이 배경을 이루는 이 공간을 쓸쓸하다. 그러나 조상과 부모와 나와 아이들, 그리고 후손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인간적 맥락은 이 마당의 보이지 않는 배경이다.
앞서 마당을 건너간 이들을 추억하며 그들이 발산하는 한없이 넓고 부드러운 세월의 향기를 맡을 때
작자는 무료하고 굼뜬 시골살이에 위안을 얻는다. 그 자신도 삶의 얼룩 혹은 무늬가 되어 이 마당의
배경이 될 것이라는 아름다운 성찰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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