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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옷핀/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5. 2. 08:20

옷핀/황진숙

 

청빈한 빈자다. 덮개 하나 둘러쓰고 처처를 유랑한다. 바깥세상에서 득세하는 실과 바늘을 비껴나다 보니 거처라 부를 만한 곳이 없다. 잡동사니 가득한 서랍에 세 들어 살거나 토굴같이 캄캄한 곳에 칩거한다. 머지않아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들과 엉켜 굴러다니기도 한다.

곁방살이라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외따로이 있다 보니 겹겹이 쌓아놓은 클립이나 압정 무더기보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삼베 홑청처럼 가벼워 기억의 회로에서 곧잘 이탈한다. 세상사에 무심하게 돌아앉아 있는 옷핀이 초연하다.

실과 바늘처럼 이룰 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추와 단춧구멍처럼 정해진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색찬란하게 피워낼 꽃도 야무지게 잠가놓을 한 자락 꿈도 없다. 걸쇠에 눌러둔 침으로 흐트러진 세상을 평정한다. 엿가락 같이 늘어진 허릿단을 조이고 닳고 해져 벌어진 사이를 여민다. 실밥 터지는 솔기의 분노를 봉합하고 뜯어진 치맛단의 설움을 부둥켜안는다. 배불뚝이가 되도록 생의 무게에 짓눌린 흔적을 삼킨다. 찢어지고 떨어져 아우성치는 항변을 단번에 뚫는다.

잠깐의 소용으로 불시에 호출되는 옷핀. 코가 꿰여 여기저기 불려 다니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소명을 다한 후 흔적 없이 사라진다. 어쩌면 후미진 곳에서 인생무상을 외치고 있는지 모른다. 몸뚱이 휘어지게 제 몫을 다하고 곡예를 부리는 실오라기에, 박히는 후크에, 채워지는 단추에 하릴없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니 말이다.

허나 옷핀에게도 어딘가에 단단히 꽂혀 존재감을 나타내던 시절이 있었다. 유년의 기억 속, 할머니는 허리춤에 옷핀을 매달고 다녔다. 커다란 옷핀에 광과 벽장의 열쇠를 끼워 지녔다. 심부름하거나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온 날에는 할머니 속곳이 들춰졌다. 다물었던 옷핀이 입을 벌리고 열쇠를 토해내면 자물쇠가 풀리며 스르르 벽장이 열렸다. 자물쇠에서 빠져나온 열쇠는 도로 옷핀에 삼켜졌다. 마치 열쇠와 자물쇠, 벽장이 옷핀의 주술에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뾰족한 침으로 걸어놓은 열쇠를 좌지우지하는 옷핀의 명령을 따르는 시종들 같았다. 힘을 가둬둔 옷핀이 은빛 광휘로 모두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옷핀이 부리는 마법은 옷섶에 가려졌다가 때가 되면 숨은 힘을 발휘하곤 했다.

뚫어서 꿰어라. 치어리더의 등짝에 붙어 큰 옷을 달라붙게 재단하든, 유명 연예인의 의복에 착장되었든 옷핀은 단호하게 찌른다. 매끈하게 관통해서 꿰어야 한다.

내게도 옷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자꾸만 바깥으로 치달아 제자리에서 벗어나는 날, 허방 짚듯 휘적거리는 날, 누군가가 나를 예리한 침으로 찔러줬으면 하는 날이 있다. 견딜 만큼 견딘 생의 봉합선이 뜯어져 제풀에 지칠 적에 마냥 흘러내리지 않게 무언가로 꿰어줬으면 싶다. 날카롭게 짚어주고 별스럽지 않게 보듬어주는 그녀, 국밥집 주인장 행숙씨가 그런 사람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아이들이 커가면서 뿌리와 겉잎만 남은 철 지난 배추처럼 시들해질 때였다. 허허로운 마음을 내보이자, 이거 한번 읽어 보라며 건네준 책이 연이 되어 드나들게 되었다. 무학이라며 손사래 치는 것과 달리 넘겨주는 책의 문장들은 촌철살인이었다. 책들의 탑으로 둘러싸인 그녀의 지성을 짐작하고 남음이다. 어떤 문장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는 행숙씨가 말아주는 국밥이 최고였다. 식당 벽을 에워싼 메모벽에 ‘주는 대로 먹어라’라고 쓰여 있듯 그녀의 일터에 가면 온전히 주인에게 맡겨야 한다. 메뉴와 양, 가격까지 그녀가 정해준다. 서빙을 하다가 시 한 수를 읊고 노래 한 소절을 들려준다. 인정을 셈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기름값 하라며 지폐 몇 장을 찔러준다. 경우에 어긋날 때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사리 분별을 가려낸다. 눈물 쏙 뺄 정도로 맵차게 조언해 주면서 따끈하게 속을 덥혀주는 행숙씨가 내게는 옷핀 같은 존재다.

탈출을 감행하고 싶어 바장이는 날에는 그녀에게 간다. 나를 조이고 싶은 날, 아무 날 아무 시에 무람없이 찾아간다. 느슨해져 나풀거리는 마음을 누르기 위해 그녀를 찾는다.

‘옷핀’하고 불러본다. 물꼬 터지듯 막혔던 숨이 흐르는 숨으로 순치된다. 궤도에서 벗어난 것들이 가지런해진다. 고리 하나로 세상 한구석을 잇고 있는 매무새가 단단하다. 기꺼이 제 몸을 빌려주는 옷핀에게 마음이 머문다. 내 안의 들뜸이 가라앉는다.

얇디얇은 몸피로 힘을 모으고 있는 옷핀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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