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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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볍씨/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5. 2. 10:57

볍씨/황진숙

 

한 톨의 낟알이 숨을 고르고 있다. 수천 년이 응축된 깊고 고요한 숨이다. 숨 속에서 담지된 여러 겹의 시간이 허공을 감싸며 일렁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벗어난 탓일까. 묵연한 자태가 풀어놓은 절대고요에 사방이 말간 빛깔로 물들어간다. 저토록 작디작은 몸 안에 생명을 궁굴려 문명을 잉태했다니. 거친 수피를 몸에 두른 것도 아니고 질긴 뿌리도 없이 세상을 읽어낸 씨앗의 몸짓이 담담하다. 타원체에 깃든 볍씨의 생명살이가 웅숭깊기만 하다.

씨앗의 희망을 찾아 나선 길이다. 신석기 시대의 비밀을 간직한 고양가와지볍씨 박물관이다. 오천 년 전에 태동한 볍씨의 체온이 살아 있는 곳. 가녀린 껍질에 햇살과 바람의 숨을 들여 맥박을 일으킨 알곡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 영혼 가진 모든 이에게 충만함을 주었을 미립자들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흐르는 시간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지난 페이지를 들춰보는 건 촘촘히 엮인 낱장의 기록이 주는 진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지 싶다. 앞서 간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들려주는 전언은 이울어본 자만이 건넬 수 있는 삶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오천 년을 뛰어 넘었음에도 낡삭은 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볍씨에게서 그의 언어를 듣고자 함이다.

원시시절, 어둠 속 깊은 토탄층에 웅크리고 있던 볍씨. 줄기에서 떨어진 볍씨 한 톨이 스며든 곳은 숨결이 흐르지 않는 암흑이었다. 해도 달도 들지 않는 미로 같은 곳에서 길을 찾지는 않았을까. 더듬어 보아도 붙잡을 데 없는 막막함이 두렵지는 않았을까. 천이백 년을 잠들었다 꽃을 피운 연꽃씨앗이나 이천 년 된 대추야자 씨가 움을 틔운 것처럼 생명의 뿌리에 비끄러매져 있는 불멸을 꿈꾸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 땅 속에 파묻혀 영원성을 탁마하길 몇 백 년, 몸에 새겨진 자취를 전하기 위해 또 몇 천 년을 묵었다. 오랜 시간 수많은 발자국에 눌려온 씨앗은 부풀어 오르는 흙의 기운에 달뜨기도 했을 것이다. 어스레한 달빛에 젖어들며 이슬 꽃을 피우고도 싶었다. 저 너머 땅 속을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깨달음을 얻기 위한 사유에 들기도 했다. 속살을 허물며 피워 올리고 싶었던 생의 불길을 잠재운 건 잊혀간 과거의 문양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문명의 불씨가 되어 연대기를 이룬 존재의 기억, 퇴적된 시간만큼 켜켜이 쌓인 그만의 지문으로 덧칠했을 문명이 거대한 세상을 이룬다.

오십억 년을 내려온 이 별에 씨앗이 그려놓은 생의 무늬가 가붓이 떠오른다. 숨결이 녹아든 궤적을 따라간다. 순간이었을까. 씨앗에게 박힌 기억의 알갱이들이 서걱거리며 일어선다. 들고 나는 숨들의 쿨렁거림 속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메마른 황무지가 서로를 물어뜯는 살기어린 것들의 이빨과 발톱에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소리, 발을 구르며 이동하는 동물들이 천지를 울리는 소리, 다 자란 식물들을 훑고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포식하기만 했던 원시인들의 광포한 소리가 포효한다. 주린 배를 채우고자 하는 욕구와 살기 위한 버둥거림, 진저리쳐지는 맹렬함으로 뒤덮인 들판이 눈앞에 펼쳐지며 온몸의 감각을 전율케 한다.

태초의 생명이 검푸른 대양에서 눈을 뜬 이후, 살고자 하는 본능은 한 순간도 고여 있지 않았다. 뚝뚝 떨어지는 대평원의 빗방울에 실려 끊임없이 울어대는 새소리를 타고 동굴을 나서던 원시인의 발자국을 따라 뭇 생명들의 야성을 불러냈다. 척박한 대지에 발을 딛고 생존하기 위한 야성은 정복을 낳고 정복은 혈전을 불러일으켰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정복만이 살 길이었다. 널브러진 사체를 밟고 넘어 쫓고 쫓기는 추격이 벌어졌다. 누군가는 숨기 위해 어둠을 찾고 또 누군가는 저항하기 위해 어둠에 묻혀 들었다. 생의 절박함은 죽은 생명 위에 새 생명을 겹치게 했다. 폭풍우가 휩쓸고 간 조각 땅에도 목숨을 부려 놓았다. 어미 잃은 어린 피의 심장은 이름 모를 짐승의 피와 살이 되어 갔다. 미지의 운명 속으로 떠밀린 목숨붙이들이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지며 소용돌이치고 있음이다.

수백만 년 전의 빛과 원시세포들이 온 몸으로 부딪쳐오는 파동들. 시대를 내려온 생명체들의 환희와 비애 희망과 절망들. 산 것들의 떨림과 스러지는 것들의 덧없음. 까마득한 곳에서 건너온 처절한 눈빛들. 회오리 안에 가둠 당한 나는 길을 잃고 문맹자가 되어 버린다.

부서져 내리는 기억의 파편들이 정점을 이루는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씨앗 하나가 용솟음친다. 끌어안아야 할 가슴들의 호흡을 받아들이며 미립자의 꿈을 담은 영혼이 움을 틔운다. 한 뼘의 땅이라도 좋다.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밀어 올리며 여물기 위해 가만가만 숨을 죽이며 있었을 테다. 한 줌의 햇볕을 받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고 비바람에 꺾이지 않기 위해 흔들리며 안간힘을 쓴다. 시대의 기억을 전하기 위해 낱낱의 알곡들은 씨앗에서 씨앗으로 진화를 거듭한다.

문명의 정수는 오로지 볍씨 한 알이었다. 볍씨 한 톨에서 수백 수천 개의 알곡을 빚어내 빈곤으로 얼룩진 어둠에 빛을 비추었던 것이다. 씨벼의 숨구멍을 통해 들려오는 박동소리는 초록의 힘으로 육지를 일어서게 하고 와글거리는 푸른 소리로 바다를 채웠다. 타락한 상처 위로 눈물 돌 듯 온기가 돌자 산 것들의 독기는 사라져갔다. 무의미한 쟁투의 굴레를 벗어난 곳곳에 생명의 기운이 녹아든 것이다.

천상의 기운으로 종자를 키워 무리들의 살과 뼈가 되어주고 떠돌던 영혼들의 안식처가 됐던 지상의 지주, 사냥꾼에 불과했던 인류에게 경작자의 꿈을 심어 준 문명의 창시자.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인류의 족적을 써 내려간 작은 한 톨에 담긴 세상이 무한대로 뻗어나가고 있음이다. 역사의 마디에 새겨놓은 오롯한 흔적들이 눈부시다.

수만 년, 수억 년 후에 발아한 볍씨가 지금 이곳에 서 있었던 내 모습까지도 전해 줄 것만 같다. 가없는 생명력을 품고 무수한 날을 기다린 볍씨의 태동 속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 내가 그들이 되고 그들이 내가 되어 우주 안에서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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