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발표작

감자/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5. 2. 08:05

감자 /황 진 숙

 

빗줄기가 긋고 간 뒤란은 흥성스럽다. 넝쿨에 매달린 호박에 살이 오르고 발밑에 달개비와 제비꽃의 수다가 왁자하다. 한나절 한가했던 감나무는 빗물을 한 움큼 떨구며 기지개를 켠다. 불어오는 바람은 작달비가 뿌리고 간 내음을 코끝에 묻혀 놓고 달아난다. 풀냄새, 이끼냄새, 흙냄새가 뒤뜰을 들썩거리며 생동한다. 삽상한 기운과 달리 어디선가 쿰쿰한 냄새가 흘러나온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물가 한 쪽 구석에 있는 항아리가 눈에 뜬다. 해마다 하지 끝에 어머니가 녹말을 길어 올리기 위해 감자들을 모아놓은 독이다. 수확한 감자들 중에 불량감자를 골라 썩히고 있는 중이다.

어머니는 무엇이든 버리는 법이 없다. 호미 날에 찍힌 감자, 굼벵이가 파먹은 감자, 빗물에 옆구리가 곯은 감자, 돌에 치여 찌그러진 감자, 숟가락에 깎이지 않을 만큼 자잘한 감자 등 못난이들을 한 곳에 모은다. 수세미로 깨끗이 씻어 독안에 집합시킨다. 그리고는 물을 붓는다. 상처 난 것들끼리 매일매일 부딪치라고, 터지고 깨져, 있는 거 없는 거 다 뱉어내라고 수장시킨다. 주리를 틀 듯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비닐로 입구를 꽉 묶는다. 벌레가 꼬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봉인한다.

항아리에 갇힌 감자는 용암처럼 들끓는다. 햇볕을 들이거나 바람을 맞을 수 없는 흙길을 걸어왔건만 또다시 사방이 막힌 독이라니. 차라리 열탕에 들어가 팍신하게 쪄졌으면 앉음새는 유지하련만. 아궁이 속에서 검댕이로 뒹군들 뒤따르는 환호가 있으니 괜찮다. 놋숟갈에 껍질이 깎여 된장국에 투하돼도 이보다는 낫지 싶다. 이런저런 수난으로 온전히 영글지 못했는데 몸뚱이마저 썩히라니 생속이 따로 없다.

비쳐드는 볕살에 푸른 독을 올려 아린 맛을 돋우고 싶다. 흙속을 파고들며 울퉁불퉁한 심사를 맘껏 드러내고 싶다. 종주먹 들이대듯 뭉툭하게 포효하고 싶다. 얽둑빼기끼리 엉킨 이곳은 사방이 어둡고 축축하다. 부빌 흙이나 기댈 무언가가 없어 발밑이 꺼진다. 막막함에 숨통이 조인다. 상처 난 부위에 물이 닿자 몸뚱이가 문드러진다. 살아온 날들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생 열매도 씨앗도 꽃도 되지 못했다. 신세한탄은 원망이 되었다가 분노가 되었다가 결국은 허망하게 녹아내린다. 막다른 끝에 다다라서야 날뛰던 아우성들이 스러진다. 움켜쥐었던 껍질 속에서 육신은 맹렬하게 썩어간다. 부패한 몸에서 흐르는 시즙으로 퀴퀴한 몸내가 진동한다. 예가 이승의 끝인 것처럼, 무덤 속 같은 독에 유폐되어 송두리째 함몰한다.

다 썩고 나면 어머니는 항아리 속 부유물을 걷어낸다. 온갖 상처와 독소와 오욕에 물든 불순물과 껍질을 건져낸다. 형체가 사라진 감자는 물에도 녹지 않은 앙금을 내놓는다. 웃물을 갈아줄수록 밑바닥에 가라앉는다. 죽은 나무에서 키워내는 표고처럼 항아리에 내박쳐진 몸뚱이에서 건져 올린 맑은 자아다. 척박한 땅의 음영, 덩저리의 기억, 흙빛으로 엉겨 붙은 낯빛을 감자의 이름에 떠나보내고 무명베 위에서 말라간다. 꾸리한 냄새마저 볕에 날리며 무미무취의 성분으로 가벼워진다.

제 몸을 폭삭 썩혀 가루가 된 감자. 상처 나고 야잘찮아 버려질 뻔 한 감자들이 쉬이 변질되지 않을 물성으로 재탄생한다. 가는 시간을 버팅기고 스러지지 않기 위해, 향신료 치듯 갖은 방법으로 보존시키는 세상이다. 짜디짠 소금기로 몸을 절여 시간을 유예시키고 바스러질 정도로 볕살에 물기를 말려 수명연장을 꿈꾸는 목숨들. 매캐한 연기에 둘러싸여도 썩는 것이 두려워 미동도 없다.

감자가루는 다시 태어난 존재의 자유로 분분히 날린다. 한 톨의 힘도 들어가 있지 않아 여기저기에 가볍게 뒤섞인다. 과즐을 만들 때 덧가루로, 뭉쳐져서 옹심이로, 콩과 섞여 떡으로, 속이 말갛게 들여다보이는 만두로 미각돌기를 자극하지 않고 푸근하게 감싼다. 꺼둘리지 않는 덤덤함으로 무던하고 슴슴하게 채워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갈하고 알맞춤하다. 상처투성이 생것이었을 때는 닿을 수 없었던 결실을, 물크러지고 나서야 완성한다.

스치는 바람 따라 뻐꾸기 소리가 들려온다. 느릿하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뒤란이 사색에 잠긴다. 여름 한 철이 숙지듯 치열했던 감자의 한 살이도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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