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발표작

무/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5. 2. 06:58

무/황 진 숙

 

보이지 않는 마음 한 자락을 꽃 피운다. 잡다함을 지우고 민낯으로 몰입되어 있는 진지함이다. 마음자리에서 길어 올린 사유가 단단한 몸을 뚫고 나오기까지 얼마나 몰두해 있었던 걸까.

결가부좌를 튼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무가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무는 낯을 틀 새도 없이 베란다 구석에 방치됐다. 침묵이 살에 스며들고 적막이 몸피를 감싸자 무는 새순을 틔웠다. 한 모금의 햇볕도 없는 곳에서 무는 제 몸을 뿌리 삼아 싹을 밀어 올렸다. 관심 가져주는 이 없이 홀로 핀 싹은 여기가 제 집이라도 되는 양 낭창한 기운을 내비쳤다. 너른 밭의 배경이 됐던 지난날의 평화로움이나 계절의 기운을 새기며 열매 맺기를 기대했던 간절함이 연둣빛 줄기가 되어 한 잎 한 잎 잎사귀를 돋았다. 얼마 후 베란다에서 연보랏빛 물결이 일었다.

메마른 몸에서 피운 꽃, 무꽃이다. 여린 순에서 일궈낸 꽃잎과 오종종한 씨방의 미소에 마음이 출렁인다. 몸 어디에 이토록 아름다운 꽃을 간직하고 있었던 건지. 뽑히고 동강나며 무의 계절은 끝이 났지만 아린 본능은 그대로다. 나를 버려야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듯이 무는 저를 버리기 위해 속살을 허문다. 저에게서 벗어나 꽃과 씨앗을 맺을 수 있다면 피돌기가 멈춘들 어떠하리. 수분과 양분을 내어주고 아낌없이 저의 몸을 다 써버린다.

춥고 갑갑한 공간에 있었으니 마음 언저리가 뻐근했을 터이다. 불볕더위의 끝자락에서부터 서리가 내릴 때까지 무를 지지해준 흙냄새를 맡고 싶었을 것이다. 한낮의 태양빛과 깊어진 달빛과 별빛이 들어차면 몸피를 키우며 익어가기에 바빴던 날들이 그립기만 했을 테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초목들의 부비는 소리, 이름 모를 산새들의 소리,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들짐승의 소리도 이젠 모두 다 과거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유연한 생이라면 태어난 곳에서 꽃 피우며 생의 절정을 만끽했어야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곳에 고립된 채, 불면의 나날을 보내며 하나하나 버리기로 한다.

단맛 하나 내기에도 버거운 세상살이, 겁 없이 알싸한 맛을 내왔던 당돌함을 내버린다. 짠맛에 숨죽이며 다른 맛에는 오기 부렸던 철없음을 쏟아낸다. 한 가지 빛깔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몸에 두 가지 색을 두었던 웅덩이처럼 좁은 속을 버린다. 무다리라 칭하며 너부데데한 생김새를 놀려댄 뭇 사람들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내려놓는다. 꽃이 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식탁에 오르는 운명을 팔자소관이라 탓한 체념을 떨친다.

버리고 버려 더 이상 남아 있을 게 없는 무, 물기마저 꽃대로 올려 보내 쪼그라들어 볼품없어진 무. 두려움 없이 시들어가며 혹사시킨 몸으로 피워 올린 생명의 불꽃에 호흡이 느껴진다. 자신이 머금은 향을 남김없이 풀어낸 찻잎처럼 남은 생을 죄다 쏟아 부은 무의 강렬함이 내게로 온다. 고요함 속에서 다음 생을 도모했을 무의 시간들이 흘러든다. 마치, 너를 부수고 나오라고 일침을 놓는 것만 같다.

생이란 이렇듯 한 순간도 호락하지 않고, 한 번도 멈춰 있지 않은 두근거림으로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다. 머무르는 듯 흘러가며 흘러가는 듯 머무르며 닳고 해져 남루해진 몸짓으로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함이다. 갇혀 있음을 참지 못해 독을 가진 싹을 내놓거나 고여 있음을 견디지 못해 독소를 품는다거나 상처를 버리지 못해 스스로 물러버리는 식물들은 그 짐을 이기지 못해 안으로 생을 들이지 못한 것이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생명들도 발을 내딛고 살아야 하는 존재들도 매 한가지다.

스스로 사그라져 웃불을 살리는 밑불이 되고 주글주글 마르고 늘어져야 곶감이 되는 것처럼 살아있음의 문체는 혼신으로 이루어지지 않던가. 자신의 전부를 던져, 마지막 한 줌의 힘으로 겪어내야 닿을 수 있는 운명. 비루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생의 간절함이 경이로움으로 밀려온다. 살아왔고 살아갈 내일이 잇닿아 있는 지금 이 순간, 산다는 것의 소명이 함께하고 있음이다. 온몸을 통과하며 흔들어 놓는 것들에게 부딪혀 시퍼런 멍이 들지라도 스치는 생채기에 피가 맺힐지라도 부단히 품고 내려놓아야 할 일이다.

훅, 봄바람이 불어온다. 꽃을 피우기 위해 애태웠던 무의 마음들이 바람을 따라 내달린다. 나를 가두었던 자라지 못한 마음, 흩어졌던 생각들이 흩날린다. 내 안으로 비쳐든 무의 환한 빛을 따르자 푸릇함으로 물든다.

그윽하게 채워진 무꽃의 향기로 나는 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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