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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칼날/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5. 2. 11:18

칼날/황진숙

 

칼날은 자신의 날카로움을 알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오직 날을 쥐고 있는 자이다. 날은 자신의 호흡을 따르지 않는 휘두름에 가차 없이 생채기를 낸다. 어눌한 손놀림에 베인 상처를 붙잡고 쓰린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날의 냉정함을 깨닫곤 한다. 차가운 감촉, 부러지지 않는 냉철함, 섬뜩하리만치 내리쳐대는 휘두름. 칼날로 말할 것 같으면 비정함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날은 늘 서 있어야만 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갈고 닦아 날을 세워놔야 한다. 내비치는 은빛 아우라가 있어야 세상의 시선을 한눈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건 가면을 쓴 칼날의 모습이다. 숨겨진 모습은 온통 허점투성이다. 그리도 빛나는 날로 제 모습을 무장했지만 날은 홀로 설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평지에 설만한 변변한 테두리를 가지지 못한 탓이다. 제가 거주하는 주방 어느 구석에도 설 자리는 없다. 칼날은 어딘가 속살을 찾아 내리꽂혀야만 설 수 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날도 한낱 쇳덩이에 불과하다. 내리치는 칼날과 힘을 잡아주고 있는 칼등의 조화 속에 내리칠지 말지 결정하는 손잡이가 있어야만 행해지는 것이 자르기다. 날만 있다고 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날이 제 아무리 날고 길지라도, 그것은 온전한 집 한 채 갖기도 어렵다. 겨우 제 한 몸 누우면 딱 맞는 자리인 칼집이 제가 가져 볼 수 있는 전부다. 집이라고 냉큼 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몸에 맞는지 몇 번을 들락날락 해본 다음에야 겨우 들어가 숨을 돌릴 수 있다. 날서 있음으로 인해 세간의 존경을 받아온 날이 칼집의 허락 없이는 쉴 자리 하나 가져볼 수 없다니 빛 좋은 개살구가 따로 없다.

칼날은 제 자랑에 신난 어린아이 같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철부지다. 단 칼에 잘라 버리겠다며 생선 속을 뒤집어 놓고 핏물을 흘리고 있는 고깃덩이에 거침없이 날을 가져다댄다. 김치 통에서 숙성된 배추가 시큼한 향을 풍기며 고고히 몸을 드러내면 더는 볼 수 없다는 듯 다가가서 토막내버리기 일쑤다. 성급한 칼놀림에 핏물이나 김치물이라도 묻으면 더는 못한다며 성을 내버리곤 한다. 단단한 게를 손질할 때면 날은 부러지지 않기 위해 잔뜩 힘을 준다. 혹여 게 껍데기에 날이라도 나갈까 노심초사하며 껍데기와 힘겨루기를 한다. 저의 흠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는 거다.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날선 모습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거다.

시간이 흘러 무뎌지고 이가 나갔어도 날은 여전히 차가움으로 포장하고 있다. 혹여 온기라도 내비치면 동정이라도 얻겠지만 버텨대는 꼴이 영 마뜩찮아 칼날이 제 수명을 다하면 나는 미련 없이 헌 칼을 버리고 새 칼을 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무뎌진 날은 갈아서 쓰면 될 것을, 습관처럼 새것을 찾고 헌 것을 버리는 내 모습 또한 빈틈이 많다. 저의 단점을 숨기기 위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휘어지는 법이 없는 날은 그나마 지조라도 가지고 있다. 나는 숨겨둔 내 단점을 위해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칼 한 자루도 진득이 오래 쓰지 못하고 쉽게 싫증을 느끼는 나는 칼날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매사 진중하지 못한 가벼움으로 일을 그르치고, 뒤늦은 후회로 뒷북치는 어리석음은 내면의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미완성의 틀을 드러내며 살아온 태평함 또한 세상을 보는 진지함을 갖추지 못한 탓이다. 지나온 내 삶에도 가면 속에 숨은 철부지의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칼날은 태생적으로 무언가를 내쳐야만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휘둘러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 났다. 어쩔 수 없이 생긴 대로 살아야 하기에 외려 날을 더 세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이 흘러 무뎌지고 흠이 생기고 볼품이 없어졌을지라도 날은 흔들리지 않는다. 제가 가진 호흡을 잃지 않고 하나를 두 개 아니 여러 개로 나누며 새로운 창조물을 탄생시킨다. 흘릴 눈물 대신 날을 세우며 본분에 충실한 날이야말로 허점을 승화시키는 능력을 갖춘 구도자일지도 모른다.

칼날에게서 그의 의지를 본다. 소리 없는 눈물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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