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황진숙
초콜릿처럼 단단하게 코팅된 달콤함이 아니다. 흑당처럼 질척거리며 흘러내리는 달달함도 아니다. 미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차가운 아이스크림의 단맛도 아니다. 한 스푼 한 조각으로도 겹겹이 쌓아 놓은 다디단 맛을 전한다. 바람을 타듯 폭신하게 넘어오는 감촉은 순하다. 보드라운 식감이 마음을 달뜨게 한다. 단조롭고 느슨한 일상을 감미롭게 끌어들인다.
크래커처럼 물기 없이 바삭거리는 날, 파이처럼 결 따라 부서지는 날엔 혀끝에서 녹는 생크림이 제격이다. 살포시 밀려드는 첫입이 마음을 달래준다. 행복에 감응하기 위해 고요한 섬 하나를 쌓기로 한다.
케이크는 켜를 쌓는 일이다. 시트와 생크림이 허물없이 층을 이루고 토핑이 얹어지는 앙상블이다. 아다지오의 선율로 부드럽게 어우러지지만 만드는 과정은 까다롭다. 모든 재료는 정확히 계량한다. 일 그램으로도 맛을 달리하는 게 케이크다. 달걀은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한다. 각각의 거품을 따로 내어 볼륨이 좋은 시트를 만들기 위해서다.
노른자는 연한 미색이 될 때까지 흰자는 순백색이 될 때까지 거품을 올린다. 흰자가 공기를 품어 머랭을 만드는 일은 마법과 같다. 차가운 볼에 흰자를 풀고 믹서로 휘핑하면 흰자 속으로 공기가 들어간다. 휘핑할수록 볼 안을 휘돌며 부풀어 오른다. 거품기의 거센 회오리 속에서 조밀하고 단단한 기포로 거듭난다. 처음엔 미끄덩한 흰자에 불과하지만 완성된 머랭은 윤기가 흐르며 빳빳해진다.
가볍게 부풀어 오르지도 뒤섞여 곁을 내어주지도 못했다. 속내를 풀어 놓을 누군가도 없었다. 서러움이 너울처럼 밀려드는 날, 혼자 먹는 밥은 늘 허기졌다. 스스로 나를 위로하는 것은 견뎌내는 일이다. 홀로 여민 아픔으로, 어둠 속에 잠긴 외로움으로, 짓눌린 막막함으로 온몸을 통과하는 것이다. 젊음은 음미하거나 향유하는 게 아니다. 거센 물살을 가르고 휘저으며 단단해지는 일이었다.
몽글한 머랭을 노른자 거품과 밀가루와 섞자 한결 풍성해진다. 오븐에 넣어 다갈빛으로 구워 시트를 완성한다. 이제부터는 시트와 생크림 순으로 쌓아야 한다. 돌림판 위에 네 등분으로 재단한 시트 중의 하나를 올려놓고 스페츌러로 생크림을 밀어 편다. 시트와 시트를 겹칠 때는 테두리가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안으로 들어간 쪽은 잡아 빼고 나온 쪽은 밀어 넣는다. 충전하는 생크림은 시트 사이로 삐져나오지 않게 샌딩한다.
그럴듯한 모양으로 만들고 싶었다. 겉보기에는 케이크였지만 잘라보면 뭉그러지고 쓸리기 일쑤였다. 만들 때에 조급함이 앞서서 견고하게 층을 쌓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그랬다. 기대와 욕심으로 채워진 내 울에서 아이들은 엇돌 수밖에 없었다. 채근할수록 들썩거리며 울 밖으로 삐져나갔다. 바라보고 기다리며 비쭉 올라온 부분은 내리고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잡아야 할 일이었다. 끝없는 인내로 받쳐주고 보듬어 줄 일이었다.
마지막 단을 올린 후 케이크 윗면과 옆면에 생크림을 고루 입혀 아이싱 한다. 함께하며 서로의 틈을 메우는 것은 얼마나 가지런한가. 돌림판을 돌리며 넘치는 곳은 덜어내고 부족한 부분엔 채워 넣는 생크림처럼 스며드는 마음이 소담하다. 아이들을 향해 흘러 넘쳤다면 그에게는 채워지지 않아 살가운 온기를 나누지 못했다. 배어들지 못해 차오르지 않았다. 절로 메워지는 줄 알고 마냥 기다리기만 했던 시간들. 꽉 차게 들어차지 못했던 나의 빈자리가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불혹에 들어서야 지난날이 소회로 녹아든다.
마음을 포개듯 케이크 테두리를 따라 짤주머니로 무늬를 짜 넣는다. 시작과 끝이 같아지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문양을 만든다. 내 지난날이 성글었다면 촘촘해질 수 있도록, 어그러졌다면 바로 할 수 있도록 삶의 무늬도 담는다. 있는 듯 없는 듯 늘 한결같기를, 그와 내가 아이들이 보낸 시간들이 머물러 쌓이기를 마음 속 주문도 외워본다.
얼추 데코를 마무리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보니 근사하다. 하얀 빛이 마구 쏟아진다. 켜켜이 쌓아왔고 쌓아갈 날들이 이 순간만큼은 순정하다. 흘러드는 행복으로 달콤한 꿈을 꾼다. 가닿지 못한 날의 아쉬움 뒤에 찾아온 기대로 설렌다. 이제 토핑을 올리기만 하면 완성이다.
상큼하게 풀어지기 위해 딸기를 올려도 좋겠다. 청포도처럼 아삭해져 연둣빛으로 채워지는 것도 좋겠다. 다홍빛으로 물들기 위해 체리를 올려도 괜찮겠다. 어느 날 어느 시간에 함께 해도 좋을 케이크를 위해, 포개지며 다가올 날을 위해 언제나 오븐 앞에 서도 좋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