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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그것은 바람이었다/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5. 2. 12:41

그것은 바람이었다/황진숙

 

천만년을 돌고 돌아 불어오는, 그것은 바람이었다. 하늘빛 달빛 별빛에 부비고 구름을 덮으며 바람이 온다. 숲을 나는 새들의 날갯죽지에 붙어 산등성이를 에돌아 바위 위의 이끼를 훑는다. 개울가를 따라 찰방거리는 조약돌과 뒹굴고 나무구멍을 드나들며 저 너머 세상사를 실어 나른다. 물빛 젖은 몽돌에 스치고 갯벌에 엎드려 사는 식물을 들추며 파도를 넘나든다. 옹달샘의 탱자나무 가시에도, 넝쿨에 꿰어져 처마 밑에 매달린 곶감에도, 축담 한 켠의 청둥호박에도 바람이 파고든다.

기다리는 이에게 다가서고 흘러드는, 그것은 바람이었다. 들판에 핀 억새가 기대어 울 바람을 기다리듯, 바람꽃이 흔들리며 맞서기 위해 바람을 기다리듯. 거미에게 거미줄을 날려줄 실바람이, 염부에게 소금꽃을 피워줄 갯바람이, 농부에게 땀방울을 거두어갈 마파람이 찾아와 고단한 갈증을 채워준다. 다하지 못한 인연으로 그리움이 덩굴진 가슴엔 먹먹함을 이고나갈 바람이 내려앉는다. 혹여 그 바람이 산모롱이를 돌며 사라지는 아득함이더라도 또다시 돌아 나올 걸 알기에 기다리고 염원하는 자, 바람을 부른다.

해종일 풍경을 들여 제 모습을 빚는, 그것은 바람이었다. 해와 달이 오가는 사이 빛깔을 끌어당기고 소리를 건네며 냄새를 머금는다. 산자락에 풀어놓은 석양 노을을 당기고 소금쟁이가 건너는 연못의 투명한 빛을 덧칠한다. 분분한 아카시아 하얀 꽃빛으로 떠올라 달큰한 향에 취해 보기도 한다. 뉘라도 찾아가는 것일까. 맞닿는 것에 등을 내밀어 스치는 소리를 휘감는 몸짓이 농염하다. 치맛단 걷고 강가에 들어 물비늘 간질이는 소리를 허공에 던져놓고 튀어 오르는 은어 떼에 매달려 찰랑이는 소리를 건넨다. 은근슬쩍 시치미 떼고 섞여드는 표정은 천연덕스럽기까지 하다. 쑥부쟁이의 파릇한 향을 한 움큼 들이마시고도 빗방울이 몰고 온 비릿한 냄새에 눙치듯 스며든다.

내딛는 길 위에 수 만 갈래의 길을 부려놓은, 그것은 바람이었다. 가지 않은 길이 없고 다다르지 못하는 곳이 없이 달려간다. 하늘과 땅을 이으며 높낮음을 가리지 않고 내달린다. 바위에 부딪치면 흩어지고 허방을 만나면 짚고 일어선다. 폐허의 땅에 여백으로 존재하고 잡초 더미의 배경일지라도 부산한 발걸음에 채여도 길을 긋는다. 풍등 올려주는 하늘길로, 범선 밀어주는 바닷길로, 새순 움 틔우는 꽃길로 넘나든다.

바람의 길을 걷기 위해 신두리 해안사구에 간다. 나부끼며 달아나는 모래를 결집시킨 해풍과 소멸한 시간만큼 이어온 모래알갱이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일 만년 시간이 펼쳐진 모래언덕에 서면 분연히 일어서는 바람을 볼 수 있다. 층층이 무늬 진 언덕의 속살을 헤뜨리자, 기억이 살아나듯 그의 전생이 휘돈다. 어느 생에선 원시 숲을 유랑하던 떠돌이로, 또 어느 생에선 거친 대지를 싹쓸이하는 무법자로, 이생에선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은둔자로 올올이 엮어놓은 시간을 풀어놓는다. 속살거리며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의 말을 맞으며, 나 역시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인디언으로 분하고 사막의 모래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방랑자가 된다.

바람으로 여물어가는 것. 그것은 기억 속으로 속절없이 사라지고 시간 속으로 덧없이 스러지는 것이다. 찬기와 온기가 서린 어드메서 불어와 설익은 시간을 지나 저물녘으로 묻힌다. 떨어지는 벚꽃에게도 찬란했던 한 때가 있었고 나뒹구는 모과에게는 은은한 향이 남아 있건만 저문 바람에게는 돌아나간 적요함만이 있을 뿐이다. 바람의 터에 씨를 뿌리고 바람의 그늘에 머물다 간 바람의 뿌리에 숨길을 연 이들만이 남겨졌을 뿐이다.

말랑함이 아닌 단단함을 가졌으면 하는 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으면 싶은 날. 내 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그것도 바람이었다. 바닥까지 내려간 마음이 서러워 침묵으로 숨겨둔 속내와 남김없이 쏟아내야 한다는 다그침이 맞닿은 곳에서 바람이 인다. 소용돌이치고 헝클어트리며 조각나고 부서진 마음을 휩쓸어간다. 파문이 잦아들고 고요함과 평온함이 깃들면 마음은 깊어지고 한없이 낮아진다.

나를 주저앉히기도 일으키기도 하는, 세상을 허물고 세우며 머물다 갈 한 자락의 바람. 한 몸에 생멸을 품고 날빛이 바래진 하루의 끝에 앉는다. 어스름이 깔려도 돌아갈 곳 없는 이의 등에, 기댈 곳 없는 이의 가슴에 내려앉는다. 그네들에게 스며들어 아픔을 걷어내고 흘러들어 슬픔을 벗겨내고 떠나간다. 침묵의 화인(火印)을 박아놓고 또 다른 하루를 위해 천만년의 시간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간다.

이를 수 없는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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