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 - 김선태
한반도 끄트머리 포구에
홍어 한 마리 납작 엎드려 있다
폐선처럼 갯벌에 처박혀 있다
스스로 손발을 묶고 눈귀를 닫아
인고와 발효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아무도 없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 다만
이 어둡고 비린 선창 골목에서
저 혼자 붉디붉은 상처를 핥으며
충만한 외로움을 누리고 있다.
그리하여 비바람 눈보라는 쳐서
그 신산고초에 제맛이 들 때
오래 곰삭아 개미*가 쏠쏠할 때
형언할 수 없는 알싸한 향기가
비로소 천지간에 가득하리라.
*개미 : 곰삭은 맛
홍어를 잡숴 보셨는가? "형언할 수 없는 알싸한 향기”를 풍기는 홍어,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것의 “알싸한 향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 그 곰삭은 냄새가 역겹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시에서 홍어의 이미지는 계속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홍어 한 마리가 "갯벌에 납작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가 나중엔 선창 골목에서 "붉디붉은 상처를 핥”는 이미지로 변형되며 드디어 그 상처에서 퍼져 나오는 향기를 만나게 한다.
시인은 홍어가 된다. 이미지 확산이다. 그러면서 고통은 향기로워진다.
강은교 <시인>
말들의 후광/선태 시인
뿌옇게 흐려진 거실 유리창 청소를 하다 문득 닦다, 문지르다, 쓰다듬다 같은 말들이 거느린 후광을 생각한다.
유리창을 닦으면 바깥 풍경이 잘 보이고, 마음을 닦으면 세상 이치가 환해지고, 너의 얼룩을 닦아주면 내가 빛나듯이,
책받침도 문지르면 머리칼을 일으켜 세우고, 녹슨 쇠붙이도 문지르면 빛이 나고, 아무리 퇴색한 기억도 오래 문지르면 생생하게 되살아나듯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얼굴빛이 밝아지고, 아픈 마음을 쓰다듬으면 상처가 환해지고, 돌멩이라도 쓰다듬으면 마음 열어 반짝반짝 말을 걸어오듯이,
닦다, 문지르다, 쓰다듬다 같은 말들 속에는 탁하고, 추하고, 어두운 기억의 저편을 걸어 나오는 환한 누군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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