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922

신발 / 최장순

신발 / 최장순 우사牛舍를 연다. 갇혔던 냄새가 일제히 코끝으로 달려든다. 제 익숙한 길로 달려가고 싶은 것들. 오랫동안 매어 있던 탓일까, 일어서던 관절이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어느 초원을 누비던 우공牛公인가. 제 살과 장기를 모두 내주고 무두질한 수많은 길을 이끌고 내게 찾아온 것들. 그들을 코뚜레에 꿰어 야전으로, 도시의 아스탈트로 끌고 다녔다. 우렁우렁 깊은 눈, 슬픔도 잠시 말뚝에 매어두고 주인이 가고 싶은 곳으로 이끌려간 것들. 반항은 금물, 복종만이 그들이 살 길이었다. 주인에게, 아니, 주인의 또 다른 상전에게 수없이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이제 노쇠했다는 이유로, 주인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컴컴한 신발장에 몰아넣은 것들. 한때는 건강한 그것들이 세상의 돌부리에 채이지는 않을까. ..

좋은 수필 2022.10.06

청어의 꿈

청어의 꿈/정문숙 검은 실루엣을 벗어내며 희붐하게 다가앉는 새벽 바다다. 정박한 어선의 불빛에 반사되어 비늘 같은 물결이 반짝인다. 파도가 달려오다 일순간 사라지고 또 떼 지어 몰려오다 발아래에서 잦아든다. 파도의 여음을 들으며 해안선을 따라 몇 걸음 옮기니 과메기 덕장이 나온다. 바다에 발목 잡히고 눈이 꿰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오도카니 서있는 과메기들이 줄지어 있다. 마른 밥을 삼킨 듯 목이 메거나 힘에 부치는 일로 가슴이 답답해질 때에는 과메기 덕장을 찾곤 한다. 그들에게도 넓은 바다를 꿈꾸며 수심 깊은 곳으로 나아가던 때가 있었을 게다. 그들에게서 박제된 나의 꿈을 읽는다. 눈빛마저 푸르던 한 마리 청어의 꿈이 아련하다. 문득 심청색의 유선형 몸체를 흔들며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던 청어처럼 바다에 ..

좋은 수필 2022.10.05

기다리는 나무/조현숙

기다리는 나무/조현숙 소낙비 연주에 고요하던 숲이 수런거린다. 빗방울이 푸른 느낌표를 찍을 때마다 한 뼘씩 나무들은 자라고 시나브로 가을도 깊어진다. 하늘과 땅이, 음악소리조차 깊숙이 가라앉은 날, 비 내리는 날은 기다림의 색도 짙푸르다. 비 그친 뒤 고요한 적막이 나무의자에 길게 앉아 있다. 비 탓인지 밤나무는 오늘따라 더 쓸쓸해 보인다. 등에 커다란 옹이가 여럿 있는 걸로 보아 나이가 많은 나무다. 중심을 곧추 세울 기력조차 없는 걸까. 이웃한 언덕바지를 짚고 선 것이 영락없이 지팡이를 쥔 노인의 모습이다. 언제부턴가 낡은 의자처럼 허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산후 후유증 탓이거니 했는데 내 나이도 어느덧 지천명, 생(生의) 가을에 이르렀음에도 용수철처럼 팽팽하리라 믿고 몸을 혹..

좋은 수필 2022.10.05

꿈을 닮은 과일 복숭아/ 허은규

꿈을 닮은 과일 복숭아/ 허은규 복스럽다고 항간에서 지칭하는 것들은 다 복숭아를 닮았다. 복스럽게 살이 올라 꼬리를 연방 좌우로 흔드는 백구 강아지, 크림빵을 한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볼이 빵빵한 꼬마아이, 남편에게 내조 잘하고 시부모님께 순종하며 손끝이 야무진, 밥 붙은 통통한 얼굴을 한 며늘아기 등 탐스럽고 토실토실한 것들은 죄다 복숭아를 닮았다. 다른 과일보다도 유독 복숭아와 이들이 비견되는 건 복숭아의 유순한 맛, 복숭아의 몰캉한 질감, 복숭아의 묵직한 크기, 복숭아의 완만한 맵시, 복숭아의 보드란 피부 때문일 것이다. 복숭아의 유독 눈에 띄는 특징은 과실의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길게 세로로 그어진 금이다. 일설에는 이 길게 그어진 금을 국부에 빗대기도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그것은 시야..

좋은 수필 2022.10.05

이별 / 김경

이별 / 김경 밖이 잠잠하다. 이른 아침부터 그렇게도 요란하더니 어느새 정적이 감돈다. 아무것도 손에 잡지 못하고 애꿎은 시계만 쳐다보던 터다. 목을 빼고 내다보니 우리 집 창문 위로 뻗어있던 고가 사다리가 없다. 이제 정말로 간 건가. 애써 담담했던 마음이 무너진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입주를 해서 여태 살았으니 참으로 오랜 세월 그녀와 친구로 지냈다. 며칠 전 이별주를 나누면서 밤이 늦도록 이 식당 저 카페를 전전했다. 우리가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에 부슬비 내리는 밤길을 우산도 없이 걸어 집으로 왔다.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들 중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사이였던 그녀가 갑작스런 이유로 가게 된 사실에 적응되지 않기는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삼십대의 끝에서 우리는 처음..

좋은 수필 2022.10.05

소낙비 내리는 동안 / 김만년

소낙비 내리는 동안 / 김만년 들판 끝에서 메뚜기 떼 같은 것들이 새까맣게 몰려온다. 아까부터 서쪽 먹장구름이 심상치 않더니 기어이 한바탕 쏟아 붙는다. 소낙비다. 직립의 화살촉들이 사방팔방으로 마구 꽂힌다. 나는 호미를 내팽개치고 농막으로 냅다 뛴다. 소낙비는 마치 적의 진지를 포격하듯이 토란과 깨꽃들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한다. 팔월염천에 축 늘어졌던 깨꽃들이 임을 만난 듯 비를 반긴다. 생글생글 깨춤을 춘다. 춤이 과한 몇 잎은 통꽃으로 떨어진다. 나는 비에 갇힌 채 오도카니 앉아 비바라기를 하고 있다. 소낙비는 쇠로 만든 무기인가. 저 순연한 빗방울이 만물의 젖줄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세상을 쓸어가기도 하고 종내는 내 심장까지 직격하니 말이다. 불가근불가원, 가까이 할 수도 멀리 할 수도 없는 존재지..

좋은 수필 2022.10.03

구절초 향기/박영희

구절초 향기/박영희 가을향기 머금은 구절초 꽃이 풀 섶에 살랑거린다. 꽃 이름을 불러 달라는 듯 구월의 느린 바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는체한다. 어느새 가을, 해마다 이맘때 펼쳐지는 들녘의 고적한 풍경이 내 산문에 가을의 첫 줄을 쓴다. 흰 구름과 바람과 누렇게 바래진 들풀들, 둔덕에 오롯이 피어있는 가을 들꽃이 나는 좋다. 아마도 어릴 적 고향의 산과 들 그리고 부모님의 숨결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작은 행복 때문인가보다. 구월이 오면 검게 탄 얼굴로 신작로를 달리던 동무들 생각이 나고 깊은 산속으로 구절초를 뜯으러 다니시던 초췌한 어머니가 떠오른다. 헛간과 빈 외양간의 여물통 그리고 그늘진 뒤란에 촘촘히 펼쳐있던 우리 집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 시절 집 안 구석구석 널어놓은 떫은 약초 냄새가 아직..

좋은 수필 2022.09.30

모시적삼을 입은 여인/이병남

모시적삼을 입은 여인 이 병 남 중복 더위의 만원버스에는 모시적삼 차림의 20대 여인이 승객의 눈길을 끌었다. 화장기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얼굴과, 김장밭에서 갓 뽑아 올린 무 같은 목선이 태깔 고운 모시적삼의 풀기로 더욱 돋보이는 여인이다. 연속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 내리기에 바쁜 승객들도 힐끔힐끔 모시적삼의 여인 쪽으로 눈길을 보낸다. 각기 치장하고 나선 여자 승객들은 눈길이 마주치는 민망스러움을 피하려는 듯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는 다시 또 보곤 한다. 한동안 화학섬유에 밀려 빛을 잃었던 자연섬유가 그 진가를 되찾으면서부터 거리에는 면이나 마, 혹은 모시옷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많아졌다. 버스가 정차하자 모시적삼의 여인은 총총히 보도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버스는 다시 무악재 고개를 넘어 독..

좋은 수필 2022.09.28

오래된 편지/강 문 희

오래된 편지/강 문 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낙동강의 갈대로 역은 자그마한 곽 뚜껑을 열었다. 곽 속에는 빛바랜 편지 한 통과 가락지 한 개 그리고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는 밀고 밀리는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에서 쓴 아버지의 편지였다. ‘포연으로 가득했던 산하에 가을을 알리는 들국화가 하나 둘 피기 시작 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들국화가 피어있는 진지에서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쓴 편지였다. 자식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편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꼭 살아서 돌아가 당신을 한 번 껴안아 보고 싶다’는 대목에서는 목이 메어 읽지를 못했다. 외롭고 쓸쓸한 날 얼마나 읽었으면 편지의 귀퉁이가 해어져 넘기는 부분에 몇 겹으로 스카치테이프를 붙여놓으셨다...

좋은 수필 2022.09.27

메주각시/박헌규

메주각시/박헌규 절집 마당이 술렁인다. 이른 아침의 고요는 잰걸음으로 뒷산 인봉재(嶺)를 넘고 콩 익는 냄새가 산중에 진동한다. 검은 무쇠 솥 뚜껑을 비집고 나온 허연 김이 온 부뚜막을 휘감고 돌아 나풀나풀 춤을 추며 뒤란 장독대 사이사이로 숨어든다. 자주 찾는 산사(山寺)에 메주 쑤기 울력이 있었다. 동짓달 짧은 해를 염두에 둔 듯 동살이 채 잡히기도 전에 울력꾼들이 동동걸음을 치면서 부산을 떨었다. 나는 볏짚을 가지런히 추발(抽拔)하여 깨끗이 다듬고 녹녹히 축여 ‘메주각시’를 틀었다. 미덥지 않아서일까? “각시가 예뻐야 장맛이 난다.” 모두들 한마디씩 하는 바람에 어찌나 용을 썼던지 손가락이 아리고 물집까지 잡혔다. 메주각시를 트는 일은 지난해에도 했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

좋은 수필 2022.09.27

댕댕이덩굴꽃에 어리는 어머니 /이방주

댕댕이덩굴꽃에 어리는 어머니 아직은 추억을 더듬으며 살 나이는 아니다. 나는 이렇게 내 나이를 부정하고 싶다. 그런데도 다른 이의 작품은 멀리하고 과거의 내 졸작에 취해 아련한 추억에 젖어 있는 때가 많다. 그뿐 아니라 꽃을 보면 미래를 그리워하지 못하고 이제는 보내드려야 할 어머니만 보인다. 들꽃을 보면 민중이 보이고 민중의 삶이 보이고 민중의 아픔을 보아야 하는데 어머니가 보인다. 아무리 부정해도 추억에 젖어 추억을 더듬으며 애상에 젖는 노년의 생리를 어쩔 수 없는 나이인가 보다. 떨쳐 버리자. 추억의 미로에서 뛰쳐나오자. 인제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자. 남한강과 북한강이 어우러지는 양평 대명리조트에서 자고 조금 일찍 일어났다. 아직도 깨지 않은 친구들 옆에서 부스럭거리느니 리조트 주변을 산책하는 것이..

좋은 수필 2022.09.25

발을 잊은 당신에게 / 김만년

발을 잊은 당신에게 / 김만년 1. 이날까지 당신만 바라보고 살아왔어요. 당신의 육중한 무게에 눌려 숨죽이며 살아왔죠. 십 문반, 당신의 완고한 성채에 갇혀 퀴퀴한 생각만 키워왔어요. 별이 뜨는지 바람이 부는지 문밖의 세월은 몰라요. 젖은 길, 가시밭길, 발바닥 부르트도록 앞만 보고 걸어왔어요. 당신이 휘파람을 불며 들판을 지날 때나 파장 술에 업혀 뒷골목을 휘청거릴 때도 언제나 내 자리는 당신의 바닥이었죠. 젖은 바닥 노천탁자 밑에 쭈그리고 앉아 당신의 생각 없는 발장단에 비위 맞추며 늦은 귀가시간 기다려 왔어요. 긴 세월 당신의 보폭에 순응하며 살아왔죠. 그런데 오늘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드네요. 오늘밤에도 당신 손은 애지중지 살구비누로 씻어주었죠. 발을 발로 씻는 당신의 습관은 세월이 가도 고쳐지질..

좋은 수필 2022.09.24

다시 구월이 간다 / 김서령

다시 구월이 간다 / 김서령 백로’가 오더니 ‘추분’도 지났다. 추석 지나면 ‘한로’ ‘상강’이 차례로 다가와 찬 이슬 내리고 무서리 내릴 것이다. 시간이 순차적으로 흐른다고 여기는 건 실체적 진실이 아니라 우리 뇌의 메커니즘일 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철사 같던 여름볕이 숙지고 가을볕이 은실처럼 뿌리는 걸 보며 나는 새삼 세월이 강물 같다고 생각한다. 북극 얼음이 녹고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로 진입하는 징후 속에서도 여전히 가을이 오는 것은 감격할 일이다.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발 밑에 후드득 은행이 떨어진다. 매일 버스를 타면서도 여름내 거기 열매가 달린 줄도 몰랐었다. 그런데 항온동물인 내 팔뚝에 아침저녁으로 소금 같은 소름이 돋자 은행은 제 이파리 뒤에 숨겨 두고 익혔던 열매를 ..

좋은 수필 2022.09.21

물들다/마경덕

물들다 /마경덕 자색 삶은 옥수수, 깡치도 자줏빛이다 뼛속까지 깃들었다. 어머니의 쓴 잔소리에 물들지 못한 아버지 날마다 술에 물들었다. 그동안 몸에 들이부은 삼학소주 됫병들, 학은 날개를 펴고 날았지만 아버지는 어두운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술병에 노랗게 물들어 온몸이 가을 탱자 같았다. 한동안 노랑물에 잠겨 허우적거리던 아버지. 어머니가 매끼 끓여준 재첩국으로 간신히 황달에서 빠져나왔다. 다리 힘 빠지고 입이 지친 늘그막에 바짓 끝단과 치맛자락이 쬐끔 물드나 싶더니, 아버지 갑자기 세상 떠나셨다. 이제사 살만하다 싶더니 이게 뭔 일이냐고 서럽게 울던 어머니. 당최 안 맞아 못 살겠다고 진작 갈라서야 했다고 푸념하시더니 어느새 아버지에게 깊이 물들어 있었다. 지붕 /마경덕 창을 넘어오는 빗소리, 어둠에 ..

좋은 시 2022.09.20

검은 비닐봉지 / 정은아

검은 비닐봉지 / 정은아 직원: 217,000원입니다. 노인: 이걸로 결제해주세요. 직원: 잔액이 142,000원이라, 75,000원 부족해요. (노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른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직원: 이 카드는 잔액이 6,500원이에요. (노인은 지갑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만 원 지폐 2장을 꺼내서 건넸다.) 직원: 그래도 48,500원 부족해요. 노인: 이것도 해봐요. 직원: 이 카드는 12,600원 있네요. 다 써도 되나요? 더 없어요?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손으로 낡은 지갑의 구석구석을 뒤적였다. 직원은 가만히 기다렸다. 노인은 더 내놓을 것이 없는지 지갑만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직원: 다음에 오실래요? 아니면 나머지 약값은 집에 가셔서 계좌이체 해주실래요? 노인: 남은 돈..

좋은 수필 2022.09.20

선글라스를 스캔하다/최지안

선글라스를 스캔하다 ​ 최지안 ​ 안경이 아니다. ​ 안경의 사촌쯤 되는 모양새. 안경이 시력을 보정해주는 역할이라면 선글라스는 눈을 보호한다. 안경과 비슷하지만 쓰임새와 속성이 달라 호환과 대체가 불가능하다. 눈부시다고 안경을 쓸 수는 없는 일. 보이지 않는다고 선글라스를 쓰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 패션이다. 안경은 쓰고 선글라스는 입는다. 캐주얼 차림도, 정장차림에도 잘 어울린다. 여름 해변이 아니어도, 햇빛이 찬란한 거리가 아니더라도 선글라스는 당당하다. 실내나 전철 어디에서도 자연스럽다. 모자처럼 신발처럼 패션의 일부다. 기능보다 개성이 우선인 시대. 세상으로부터의 차단. 본래의 기능은 자외선 차단. 부가적 기능은 심리적 차단. 1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유리 막 하나는 1미터보다 더 두꺼운 마음..

좋은 수필 2022.09.18

몸/김귀선

몸 / 김귀선 조심스럽게 옷을 벗긴다. 두툼한 스웨터와 꽃무늬 고무 치마, 양말을 차례로 걷어낸다. 앞트임 없는 윗옷은 뒤집듯 위로 올리고 돈주머니가 매달린 분홍색 속바지는 아래로 끌어내린다. 이어 겹쳐 입은 두 개의 내의를 분리하려다 한꺼번에 벗겨낸다. 마지막으로 펑퍼짐한 속옷을 방바닥에 내려놓자 찰기 빠지고 늘어진 나신만 남는다. 저수지의 물이 줄고 나서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듯이 물기 마른 구순 노인의 몸에서 삶의 근원을 본다. 욕조 물에 때가 불릴 동안 얼굴부터 씻긴다. 이마의 주름이 고른 밭고랑 같다. 묵정밭에 듬성듬성 거름 무더기를 널어놓은 듯 버짐이 얼룩얼룩하다. 한 여자의 세월이 무서리 맞은 수숫대로 고스러져 있다. 저 얼룩도 때처럼 씻어 없앨 수 있다면…… 얼굴을 문지를수록 어머니는 ..

좋은 수필 2022.09.18

아귀/윤정인

아귀 윤정인 찬바람이 어시장을 휘돌고 간다. 시리고 헛헛한 속을 데워줄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 장바구니를 들고 나온 참이다. 동태, 대구, 도루묵을 견주다 손질된 아귀가 눈에 들어왔다. 싱싱한 애와 곤, 간과 위 내장도 함께 좌판에 진열되어 있어 보기에도 풍성하다. 겨울이면 어촌에는 아귀가 지천으로 널린다. 한때 동해안 집집의 마당과 옥상에는 오징어가 많이 널렸다. 어느 날부터 오징어가 자취를 감추자 아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머리 떼어내고 내장을 발라내고 빨래처럼 줄에 널어 반 건조시킨다. 멀리서 보면 깃발 같기도 한 것이 무슨 점령군처럼 기세등등하기도 하다. 예전에는 아무도 아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물고기 씨가 마른 요즘에야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다. 거무튀튀한 색깔에 몸체는 두루뭉술한데 험상..

좋은 수필 2022.09.14

물 정情 / 박시윤

물 정情 / 박시윤 그날도 오빠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고 있었다. “저놈은 뭘 먹여도 때깔이 안나. 딴 집 아들처럼 밥살이라도 올라주면 얼마나 좋겠노! 저래 약해빠져서 종손 노릇 제대로 하겠나. 밥을 먹을 때는 여유롭게 무게를 잡고 먹어야 양반의 기품이 살아나는 기라. 서둘러서도 아니 되고 너무 늦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 밥의 예절인데, 퍼뜩 고개 들지 못 하것나.” 밥의 예절을 삶의 숙제처럼 꼿꼿이 지켜내려는 아버지가 밥상 앞에서 지청구를 하신다. 생쌀처럼 바싹 마른 오빠는 먹는 것에 비해 쉽게 살이 불지 않았다. 잔병치례로 코피를 일삼아 쏟는가 하면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아 남한테 맞고 오는 일이 잦았다. 흔히 말하는 왕따였다. 오빠는 5대 종손으로 태어나 누구보다 크고 화려해서 훗날 아버지의 제사상..

좋은 수필 2022.09.14

빈집 / 박수봉

빈집 / 박수봉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

좋은 시 2022.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