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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비닐봉지 / 정은아

에세이향기 2022. 9. 20. 09:29

검은 비닐봉지 / 정은아

 

 

직원: 217,000원입니다.

노인: 이걸로 결제해주세요.

직원: 잔액이 142,000원이라, 75,000원 부족해요.

(노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른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직원: 이 카드는 잔액이 6,500원이에요.

(노인은 지갑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만 원 지폐 2장을 꺼내서 건넸다.)

직원: 그래도 48,500원 부족해요.

노인: 이것도 해봐요.

직원: 이 카드는 12,600원 있네요. 다 써도 되나요? 더 없어요?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손으로 낡은 지갑의 구석구석을 뒤적였다. 직원은 가만히 기다렸다. 노인은 더 내놓을 것이 없는지 지갑만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직원: 다음에 오실래요? 아니면 나머지 약값은 집에 가셔서 계좌이체 해주실래요?

노인: 남은 돈이 얼마라고요?

직원: 카드와 현금 20,000까지 다 하면, 35,900원이 남아요.

(약국 직원은 계좌번호와 약값을 종이에 크게 적어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은 종이를 접어 지갑에 밀어 넣었다.)

 

약국에서 약을 기다리던 모든 이들이 노인을 지켜봤다. 주변 공기가 흐르지 않고 머물러있는 듯이 답답했다. 나도 아버지와 함께 약을 기다리다가, 낯선 노인의 상황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마스크 안에 갇힌 듯 조용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의식할 수밖에 없기에 흔들리는 눈빛들. 어느 누구도 선뜻 행동하진 않았다. 누군가 나타나길 바라며 두리번댈 뿐이었다. 만약 내가 노인의 약값을 대신 계산한다면, 노인은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알량한 선행이 도움이 될까, 해가 될까. 나는 그를 모른다. 그는 희끗희끗한 머리칼, 구부정한 등, 마스크의 빈틈으로 보이는 검버섯과 굵게 패인 주름살, 떨리는 손과 어눌한 말, 빈 지갑만을 보여줬을 뿐이다. 노인의 과거도, 미래도 알 수 없다. 단지, 지금 상황이 아팠다. 자신의 지갑을 뒤집어도 약값을 지불하기 힘든 삶은, 행복과는 멀게 느껴졌으니까.

약 바구니가 조제실에서 계속 나왔다. 3명의 약사가 바구니 속에 둘둘 말아져 있는 조제약들을 쭉 펼쳐서, 약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하나하나 확인한 후,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 저 약들 봐요. 다들 약이 얼마나 많은지. 아버지도 많죠?” “밥 먹듯이 약 먹지. 아침, 점심, 저녁, 자기 전에. 그것만 먹어도 배부를걸. 요즘은 약이 좋아서, 나이 들어도 쉽게 죽지도 않아.” 약은 끊임없이 나왔고, 약을 가져갈 사람은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종합병원 앞이라서 약 뭉치가 컸다. 한 달 또는 두 달 치의 장기간 복용할 약이 대부분이다. 아마 몇 년 동안 같은 약을 복용 중인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어떤 중년의 여자가 약을 받으며 말했다. “이쪽이 아버지 약이고, 이쪽이 어머니 약이에요?” 부모가 오시기 힘드니까, 약을 대리로 처방받은 듯했다. 여자는 빵빵한 검은 비닐봉지 두 개를 받아들고 약국을 나갔다. 약봉지를 전해 받은 고령의 부모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약봉지를 뜯어 입안에 털어 넣을 것이다. 중년의 딸은, 부모가 덜 아프고 더 오래 사시게 약 배달을 계속하지 않을까.

 

몇 년 전부터, 아버지는 혼자 종합병원 가는 것을 힘들어하셨다. 의사나 간호사, 약사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 힘들고, 큰 규모의 건물에 주차하고 진료과를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가까이 사는 나와 동행하곤 했다. 진료를 보고 나면, 대체로 한 달 치 약을 처방받았다. 불편한 채로 만성이 되어버린 곳은 쉽게 낫지 않아서, 꾸준히 약을 먹는 수밖에 없다. 약사가 아버지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는 이번부터 두 달 치 약을 받았다. 좋게 보면, 약이 조금은 효험이 있다는 얘기다. 약사에게 약 복용 설명을 들었다. 아버지는 먹던 약이라 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먹고 온 약은 잘게 부서져서 아버지의 저릿한 발바닥 주위를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난 불룩하지만 가벼운, 검은 비닐봉지를 받아들고 약국을 나섰다.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손에도 검은 비닐봉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봉지 안에 든 약들은 한 인간의 살아온 궤적을 말해주기도 한다. 부서지고, 눌리고, 굳어버린 몸과 마음을 도와줄, 처방전대로 조제되었을 테니까. 사람마다 증상이 다양하고, 아픈 부위도 다르다. 어떤 이는 혈관, 어떤 이는 심장, 어떤 이는 척추, 어떤 이는 장기, 어떤 이는 불안과 수면장애…. 오래 방치하면 할수록 완치는 쉽지 않다. 더 나빠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 최선일 때도 있다. 때론 순간의 고통을 진통제와 신경안정제에 의지해 버티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약은 생존의 양식 같다. 밥처럼 매일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꼬박꼬박 먹어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어떤 이는 삶을 탈탈 털어 비싼 약값을 치르고, 약을 먹고 다시 삶을 이어나간다. 반복적인 패턴에서 약간만 빗나가도, 생존이 위태로울 수 있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손톱보다 작은 알약 하나가, 어떤 이에게는 절실하다. 흔들리던 검은 비닐봉지가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어딘가에서 삶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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