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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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톱 탁본 / 김겨리

모래톱 탁본 / 김겨리 명사십리에 새발자국 수두룩하다 썰물에 쓰고 밀물에 퇴고하는 바다의 서사, 밀물이 화선지처럼 모래사장의 요와 철에 골고루 펼쳐지면 먹방망이에 해풍을 듬뿍 묻혀 바다를 본 뜨는 어머니, 씨감자 캐듯 아버지 배를 부리고 먼바다로 떠나시면 언젠가부터 어머니의 종교는 바다, 사하의 바다는 탁본체로 편찬된 어머니의 서재였다 해풍에 깎여 심하게 문드러진 아버지의 지문은 먼바다 일렁이는 격랑을 닮았다고 횟배 앓는 내 배를 쓸어내리며 혼잣말처럼 들려 주시던 얘기로 파도를 볼 때마다 아버지의 지문이 저랬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내 지문을 바라보면 물결체의 행간들이 출렁이곤 했다 바다를 수소문해 아버지의 기별을 듣는 밤이면 창가 정화수에 푹 잠긴 보름달을 보고 손이 닳도록 어머니가 밤새 빌고 빌었던 치성..

좋은 시 2022.11.26

파밭 경전 / 권용례

파밭 경전 / 권용례 ​ ​ 파밭에 호미 날로 쓴 노모의 경전을 읽는다 흙 속에 스며든 문장들이 뿌리를 박았다. 빗물을 받아먹고 지각의 영양분으로 살아가는 글들은 파릇파릇 파잎처럼 반듯하고 꼿꼿하다 바람에 펼쳐지는 책의 귀퉁이부터 순식간에 점령하는 잡풀들을 뽑아내는 호미 무엇을 증언하고 싶은 걸까 실뿌리에서 뽑아 올린 한 구절을 닳고 닳은 몽당 쇠판에 또박또박 새긴다 행간 사이에 한숨을 장단으로 넣으며 호미질에 불꽃이 튀는 경전 쉼 없다 정직한 마음을 가르치는 말씀보다 이윤이 왕이 된 세상에서 내내 괴로웠으리라 노모는 가끔 발등이 찍혔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멈출 수가 없는 일필서 이 일은 몸도 마음도 생각도 건강해지는 일이었다 태풍이 몰아쳐도 어깨동무하는 가족들을 살려야 했기에 파밭에 빼곡히 적는 한 ..

좋은 시 2022.11.25

활자나무- 이승애

활자나무- 이승애 바야흐로 온 세상이 꽃길이다. 고인쇄박물관 뜨락에도 봄꽃잔치가 벌어졌다. 모닥모닥 핀 영산홍이 온몸을 활짝 열어젖혔다. 삼색제비꽃, 흰색 철쭉꽃, 낮달맞이꽃도 저마다 꽃술을 치켜올렸다. 푸르른 하늘 허공에 상형문자가 만화방창 찍혔다. 꽃을 눈에 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맨 먼저 금속활자 조형물 ‘직지’가 눈길을 끌었다. 활자 장인이 오 년여 간 피나는 노력 끝에 복원한 금속활자이다. 전시관에는 직지와 시대별 인쇄문화 및 한국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활자의 제작과정, 인쇄술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감상하니 삶을 바꾸기 위해 혼을 쏟아낸 선조들의 숨결이 깊게 느껴졌다. 천천히 돌아보는데, 특이한 모양을 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원통형 나무 모양에 작은 솔방울 같은..

좋은 수필 2022.11.23

머리맡 / 이정희

머리맡 / 이정희 더듬거리는 곳에 물 한 그릇 놓아두면 그곳이 머리맡이다 물그릇엔 물이 말라간 흔적이 천천히 각인되어 있었다 아래로만 트인 물의 의중에 따라 꽃피고 마르고 다시 잦아든 지층처럼 고요와 냄새가 내려앉은 흔적 더 이상 민망이 없는 몸에 여름옷 한 벌이 입혀져 있다 머리맡은 산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예의 같은 곳이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검은 그림자, 갑작스레 당한 일들처럼 민낯을 접지 못하고 징검돌처럼 이어붙인 시간들의 배웅과 켜켜이 앉은 물그릇의 날짜를 아무도 세지 않고 어림짐작으로 한 죽음을 정리했다 마른침을 삼키듯 남은 숨을 들이킨 주저흔 물그릇은 자신의 목마름을 천천히 지층으로 쌓았을 것이다 죽은 사람도 갈증의 속도가 있었을까 살아서 마셨던 벌컥, 그 갈증을 지우는 속도 조금..

좋은 시 2022.11.20

편백나무의 영토 / 최류빈

편백나무의 영토 / 최류빈 면면이 창백한 사람들 어깨 접고 섰다 여기부턴 백의종군의 성토라는 듯 흰 돌 줄 지어 방어진을 펴듯 빙벽 너머에선 얼음 부서지는 소리 풋내 가시지 않은 고사리들이 손을 엮더라 물의 결정들이 고공침투하는 이 계절 예측된 왜란은 없다 나를 밀어낸 이 땅의 생채기다 아니 내가 속한 영토의 설움이다 나 밀어낸 저 이기의 숙명이다 아아, 너를 뒤덮는 물이- 함초롬히 오른다 그 속에서 고고한 죽문(竹文) 청화백자 하나 전운을 감지한 듯 바닥부터 미묘히 진동하고 있다 그저 대나무 줄기 죽비처럼 뻗어 저 장롱 속에 웅크리면 약탈될 뿐 절대 깨어질 일 없는 백자의 관상 왜놈들의 신줏단지라도 모시며 반짝거릴 수도 어디 가 빌붙어 치욕스레 요강이나마 살 수 있었다 바람 앞 불길이 거세, 고왔던 유..

좋은 시 2022.11.20

동호 댁 할머니 손가락엔 구구단이 산다 / 오서윤

동호 댁 할머니 손가락엔 구구단이 산다 / 오서윤 ​ ​ 동호 댁 할머니 손가락엔 수상한 장부가 산다 계산법을 알 수 없는 덧셈과 뺄셈이 숨어 있다 수리에는 없지만 가끔 세상에서 발견되는 셈법 옆집 상처와 몹쓸 사람에겐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숫자를 솎아내는 속 깊은 구구단이다 ​ 할머니의 손가락엔 천기를 읽는 두꺼운 달력이 산다 팥꽃이 피는 시기와 산을 넘어오는 장마 콩이 여물어 갈 때마다 할머니는 더 바쁘다 복잡한 족보와 길흉의 절기와 식구들의 생일과 오래전에 죽은 나이도 다 기억한다 ​ 갑골문자처럼 단단한 할머니의 손등 주판알 튕기듯 못생긴 손가락 하나하나 세어 왕복할수록 할머니의 곳간이 풍성하다 이른 봄 멀리서 오는 소식을 감지하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릴 때도 있지만 어느새 넓적한 손등이 어지러운 마..

좋은 시 2022.11.20

다시 책시렁에서 / 이지영

다시 책시렁에서 / 이지영 문간방에 먼지가 세 들어 사는 집이 있었다. 집 앞 큰 길에는 정류장이 없어도 버스가 멈춰 섰다. 해질녘에 버스가 지나가면 그 길 위에는 흙먼지와 아버지가 남겨졌다. 좀 있으면 대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부엌에서 숟가락 놓는 소리도 따라 들어갔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마루 위로 쏟아지는 네 남매의 목소리는 온 동네를 채웠다. 석류나무가 새순을 올리던 어느 봄날, 저물도록 버스가 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이튿날 우리 가족은 짐을 꾸려 고향집을 떠나야 했다. 아버지가 손수 짜 주신 소나무 책시렁을 그대로 남겨 둔 채 몸만 빠져 나왔다. 이사 간 집에는 우편함이 없었다. 아랫목에 묻어 두던 아버지의 밥그릇도 사라졌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던 나는 잠에 취해 살..

좋은 수필 2022.11.20

숲의 책을 읽다 / 이문정

숲의 책을 읽다 / 이문정 - 계림(鷄林)에서 ​ ​ 천년을 지나온 길은 이곳에서 처음 열렸으리 ​ 나무의 몸 빌려 빛을 세운 숲 한걸음 내 딛자 침묵하던 나무들이 책장을 넘긴다 빛은 나무와 호흡하며 숲을 지켜왔으리 나무들은 힘찬 맥박 뻗어 하늘로 넓혀갔고 뿌리는 몸 낮추어 사방으로 길을 만들어 갔으리 ​ 어둠 걷어내며 하늘 열리던 날 나무와 바람은 광명을 천지에 퍼다 날랐고 그리하여 새들 날아들고 노랫소리 끊이지 않는 숲은 날로 번성해 갔으리라 ​ 입술에 닿는 책의 숨결이 깊어진다 ​ 발이 움직일 때마다 천년도 더 된 노래들이 일어선다 빛의 소용돌이를 잠재우며 그 자리에 서 있는 숲 집중할수록 또렷해지는 페이지를 넘기면 까마득한 날과 소통되는 언어들의 포옹 계절을 잉태한 태실에서 날갯짓 하고 있다 ​ ..

좋은 시 2022.11.19

폐선 / 정순

폐선 / 정순 ​ 저녁의 딱딱하고 고단한 파도 한 켠에 세월 하나 뒹굴고 있다 부력의 한쪽을 추억으로 비워낸 듯 기우뚱 균형을 놓아버리고서는 낡은 부피를 달래고 있다 얼핏 보아 고기들의 길을 단념한지 오래인 듯한, 따라온 길 파도에 녹이 슬어 보이지 않는다 저 배도 한때는 사랑을 했거나 어느 이름 모를 추억 속에서 며칠이고 향긋한 정박을 했을 것이다 불 켜진 환락의 깊이를 쏘다니거나 가슴 속으로 저며드는 이름 모를 물살들에게 운명을 맡기며 추억을 탕진했을, 나 이쯤에서 저 배의 소멸들에 대해 받아내려 한다 기억 속 깊이 끼어 있는 몇 줌의 항해일지와 폐유같은 어둠 저쪽에서 환락을 장만하던 나폴리 마르세이유 요코하마의 날들과 며칠이고 정지된 엔진 근처에서 뜬눈으로 보내던 불임의 위도와 경도를 짚어보려 한다..

좋은 시 2022.11.19

어탁/ 제은숙

어탁(語拓) / 제은숙 훤칠한 붕어가 목상에 누웠다. 입을 벌리고 희멀건 눈을 뜬 채 초점도 잃었다. 목욕재계 마치고 꼼꼼히 물기를 닦았으나 황망히 떠나올 적 입었던 비늘옷 그대로다. 몸은 축 늘어졌으되 유선형의 몸매가 매끈하고 지느러미는 한껏 펼친 모양으로 줄에 엮여 고정되었다. 거칠게 치뻗은 모습이 펄떡거렸을 생명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한다. ​ 가지런한 비늘 위로 차가운 물감이 덮인다. 생전의 몸피와 흡사한 색으로 배합되었다. 붓으로 드문드문 안료를 올리고 색깔의 틈이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공을 들인다. 지느러미 사이도 놓치지 않고 촘촘히 공간을 채운다. 이승의 마지막을 곱게 화장化粧시키어 생기를 불어넣는다. 몸단장이 끝나면 물을 뿌려둔 정갈한 한지를 덮어 꼼꼼하게 누른다. 마르기를 기다리면 겉피에 남..

좋은 수필 2022.11.18

사랑의 거리 1.435미터 / 김만년

사랑의 거리 1.435미터 / 김만년 철길은 차가운 대지에 붙박인 채 육중한 기관차를 떠받치고 있다. 두 가닥 은빛 선을 잇대어 세상 어디든지 간다. 상처 같은 세월을 나란히 베고 누워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 사람 사는 마을을 굽이굽이 돌아간다. 정거장마다 숱한 물상과 인정人情들을 집결시키고 분산시킨다. 한순간 용융점으로 끓어올랐던 기억 때문일까. 겉보기엔 딱딱한 쇠붙이지만 속은 따뜻하다. 그래서 철길을 두고 사람들은 일찌감치 혈맥이라고 불러왔다. 기관차가 한때 우리 민족의 여명기를 견인했던 심장이었다면 철길은 그 심장을 뛰게 한핏줄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철길의 외형은 단순하다. 그냥 강철로 이어진 두 줄기 철선이다. 그러나 저 단순성이 기차를 무탈하게 안착시키는 힘의 근원이다. 철길은 직각으로 꺾..

좋은 수필 2022.11.18

갯벌의 오후 / 고경서(경숙)

갯벌의 오후 / 고경서(경숙) 바다가 옷을 벗는다. 썰물이 지나가자 갯벌이 덜퍽진 속살을 꺼내 보인다. 모래밭, 자갈밭에 이어 드러난 개펄은 뼈와 살과 근육으로 된 여체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맨바닥에 나신(裸身)으로 누워 촉촉한 물기를 햇볕에 말리는 중이다. 인기척에 놀란 방게들이 바다의 모공 속으로 잽싸게 파고든다. 피돌기가 왕성한 맨살을 긁는 것 같다. 은신처로 이만한 곳도 없을 성싶다. 억세고 치열하게 살아가기로는 인간이나 미물이나 다를 바 없다. 갯벌은 이 모든 생명을 그러안고 어머니처럼 묵묵히 견딜 뿐이다. 여기선 사람이 불청객이요, 이방인이다. 이곳은 서해바다. 해풍에 그을린 민낯의 제부도다. 만조 때는 꼼짝없이 갇혀버리는 섬. 물때를 모르고 떠난 게 불찰이었다. 우리는 바다가 내려다뵈는 창가..

좋은 수필 2022.11.16

화두話頭, 혹등고래가 풀다/ 김원순

화두話頭, 혹등고래가 풀다/ 김원순 해류와 조류, 고래는 바다에만 있는 게 아니다. 삶의 바다에도 엄연히, 면면하게 존재한다. 그날의 마음자리와 결에 따라 사그라지거나 분진처럼 풀썩이는 희.노.애.락이 고래의 초음파신호음을 보내며 조수처럼 들락거리고, 삶의 방향과 무게 질량은 암초 마냥 암묵한다. 삶을 맘대로 요리하고 지휘하는 마음의 심지心志가 판단하고 선택하고 조율하는 대로 삶이 펼쳐진다며, 천형 같은 화두를 삶의 심해에 풍덩, 던진다. 섬찟하다.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고, 먹이를 탐색하고, 장애물과 해저의 지형을 파악해서 무리에게 소리를 전달하는 혹등고래 노랫소리가 뱃고동처럼 구슬프다. 구가한 사랑이 홀연 떠나버린 것일까. 내 맘속에도 뱃고동이 울린다. 울컥해진다. 700만 년 전 태어난 인간이 70..

좋은 수필 2022.11.16

멸치 똥 / 안광숙

멸치 똥 / 안광숙 ​ ​ 멸치 똥을 깐다 변비 앓은 채로 죽어 할 이야기 막힌 ​ 삶보다 긴 주검이 달라붙은 멸치를 염습하면 방부제 없이 잘 건조된 완벽한 미라 한 구 내게 말을 걸어온다 바다의 비밀을 까발려줄까 삶은 쓰고 생땀보다 짜다는 걸 미리 알려줄까, 까맣게 윤기 나는 멸치 똥 ​ 죽은 바다와 살아 있는 멸치의 꼬리지느러미에 새긴 섬세한 증언 까맣게 속 탄 말들 뜬눈으로 말라 우북우북 쌓인다 ​ 오동나무를 흉내 낸 종이관 속에 오래 들어 있다가 사람들에게 팔려온 누군가의 입맛이 된 주검 소금기를 떠난 적이 없는 가슴을 도려낸 멸치들 육수에 풍덩 빠져 한때 뜨거웠던 시절을 우려낸다 ​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뼈를 남기고 객사한 미련들은 집을 떠나온 지 얼마인가 ​ 잘 비운 주검하나 끓이면 우러나는 ..

좋은 시 2022.11.15

제비꽃인력소 / 한주영

제비꽃인력소 / 한주영 ​ ​ 톱밥을 집어 던지는 목장갑에 잠시 온기가 돋았다가 달아나기를 반복한다 제비꽃 인력사무소 수많은 이름들 중에 왜 하필 제비꽃일까 물에 잘 섞이지 않는 기한 지난 시멘트 반죽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인부들이 불 앞에 모여 있다 이곳에서 김 차장이라 통하는 김이 불쏘시개로 드럼통을 쑤시자 부서진 삭정이들 사이에 박혀 있는 못들이 불을 더 세게 쥐며 휜다 쑤시는 곳이 많아도 파스 한 장으로 봉합된 어깨에 화끈거리는 새소리가 조잘조잘 앉았다가 가고 김은 코에 묻은 검댕을 제 검지로 연신 문지르며 인부수첩을 넘긴다 동이 틀 듯 긴장한 가건물 사이의 허공이 쓴 구름에 휩싸여 흐리게 빛을 풀고 때마침 수첩 페이지를 넘기자 바스락거리던 이름들 종이 끝이 나무였을 적을 기억하려 습기를 그러모아..

좋은 시 2022.11.15

못에 대한 단상 / 정성수

못에 대한 단상 / 정성수 ​ ​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쓸 영정 사진을 걸려고 안방 벽에 못을 박았다 못머리를 쳐대자 콘크리트 벽은 아직은 못을 받아드릴 때가 안 되었다는 듯이 구부러지고 만다 못을 바르게 세워 쳐 댈수록 제 몸의 상처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벽 사정없이 망치질을 해 대자 못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이 날카로운 끝을 생살에 받아들인다 올곧게 서 있는 못에 아버지의 일생을 걸어두자 굽은 못도 바로 세워 주기만 하면 제 할 일 다 할 수 있다고 자존심을 세운다 참 다행이다 작은 못 하나가 방안에서는 영정사진걸이가 되고 부엌에서는 냄비걸이가 되고 뒤안 벽에서는 삽걸이 호미걸이가 되다니 못의 위대한 힘이 꽃으로 피는 것이었다 [출처] 제3회 건설문학상 / 황보람, 정성수|작성자 k..

좋은 시 2022.11.15

절구와 공이 / 박성희

절구와 공이 / 박성희 절구가 깨졌다. 작년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두 동강이가 나고 말았다. 새댁이 되면서 들여온 것이니 긴 풍상의 세월 앞에 견딜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굽도 뭉툭하게 닳은 절구지만 도자기 재질에서 나오는 깊은 울림의 소리가 마음을 끌었다. 그런 연유로 신형 분쇄기보다 더 자주 눈길이 가던 절구였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묵은 정이 좋은 법이라 깨진 절구를 보니 마음이 휑해지는 것은 어쩔 수 가 없었다. 하기야 그 긴 세월 동안 툭하면 공이로 매질을 당했으니 사람으로 치면 벌써 명줄을 놓았을 것을 오래 버티어온 셈이다. 깨진 절구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이웃 부부의 모습이 겹쳐진다. 몇 년 전에 퇴직한 박 선생은 매사가 자기 위주로 흘러가야 직성이 풀..

좋은 수필 2022.11.13

쇠물고기 / 홍윤선

쇠물고기 / 홍윤선 화장실이 부뚜막 같다. 수선사 주지 스님의 뜻이라고 한다. 해우소나 뒷간이 주는 절집 인상이 여기서는 무너진다. 실내화가 얌전히 놓였는데도 맨발로 들어가는 이가 적지 않다. 옆으로 길게 뻗은 화장실 창은 거치적대는 바깥경치를 잘라내 액자가 되고, 근심을 푸는 속인은 틀 안에 들어온 풍경화를 제 것인 양 누린다. 고졸한 대웅전이 살림집 안채 같고 곳곳에 놓인 돌그릇이며 고른 잔디와 소담한 연못은 한옥 마당처럼 인정스럽다. 신들의 집이 예사로워 오히려 신성하다. 그리 높지 않아도 산바람이 있어 지글거리는 도시 더위와는 사뭇 다르다. 눈앞에 놓인 첩첩의 산을 바라보며 해를 피해 앉았는데 희미한 풍령 소리 들려온다.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린다. 지리산 웅석봉 자락, 변두리 작은 사찰, 거기 추..

좋은 수필 2022.11.12

서녘의, 책 /박기섭​​

서녘의, 책 /박기섭​ ​ ​ 굳이 말하자면 나는 이미 낡은 책이다 그러니까 그 책 속의 내 시도 한물간 시다 귀 터진 책꽃이 한쪽에 낯익고도 낮선 책 날을 벼린다손 금새 또 날이 넘는, 은유의 칼 한 자루 면지에 박혀 있다 찢어진 책꺼풀 사이로 붉게 스는 좀의 길 그 활판 그 활먹자 향기는 다 사라지고 희미한 종이 재만 갈피에 푸석하다 터진 듯 덧댄 풀 자국 바싹 마른 서녘의, 책

좋은 시 2022.11.10

수필 아포리즘 / 윤재천 隨畵集

수필 아포리즘 / 윤재천 隨畵集 / 1. 수필은 인간학. 인간 내면의 심적 나상을 자신만의 감성으로 그려내는 한 폭의 수채화. 한 편의 수필에는 자신의 철학과 사유, 현재와 과거의 행적, 미래를 예시하기 위한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2. 수필은 창의 문학.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문학이 아님. 함축과 묘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적절한 예시를 들어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문학. 끊임없이 변하는 독자, 관습에 매여 있는 작가. 3. 수필은 언어 예술. 논설이나 훈계조의 직설화법이 아니라 정서가 흥건하게 배어 있는 메타포. 작가는 시대를 꿰뚫는 혜안과 통찰력이 필요. 4. 수필은 신문고(申聞鼓). 시대와 동행하는 또 하나의 캔버스. 작가는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

수필 이론 2022.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