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돈꽃 / 문경희

돈꽃 / 문경희 누군가의 위험천만을 목적지로 찍고 왔다. 타인의 불행을 내 행복의 척도로 삼겠다는 심사는 고약하지만, 오늘을 보기 위해 며칠을 손꼽았다. 그가 연출하는 백척간두의 순간을 함께 출렁이며 늘어질 대로 늘어진 삶의 들메를 다잡아보고 싶었다. 공터는 이미 삼현육각의 신명으로 들썩이고 있다. 켜고, 불고, 두드리고, 인간과 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리로 주추를 놓고 지붕을 올린 소리의 성채 하나가 장대하게 일어선다. 내 안에서 나달거리던 소리들이 화답을 하는 건지, 두서없이 심장이 쿵쾅거리며 걸음이 빨라진다. 한껏 데시벨을 높인 소리의 휘장을 열어젖히고 공터의 왁자함 속으로 성큼 들어선다. 소리가 예열해놓은 분위기를 밟고 자그마한 체구의 줄꾼이 등장한다. 이마를 질끈 동여맨 무명천 위로 가볍게 얹힌 패..

좋은 수필 2023.01.07

이끼, 꽃으로 피어나다 / 허정진

이끼, 꽃으로 피어나다 / 허정진 오래된 시골집이다. 처마 밑에 제비집처럼 한때는 올망졸망한 식구들 들썩거리며 살았던 곳이다. 새벽을 알리는 장닭 울음소리, 아래채 가마솥에는 소 여물죽이 끓고, 매캐한 연기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정지문 사이로 쿰쿰한 청국장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뒤란 대숲을 출렁이며 바람이 지나가면 수다스러운 참새 떼 마당으로 몰려왔다가 한꺼번에 지붕 위로 날아오르곤 했다. 아침마다 싸리 빗질 자국 선명했던 그 마당에 이제 제멋대로 자란 잡초들로 무성하다. 먼 산 울음 같던 쇠마구간도 주인 없는 어둑한 동굴처럼 휑뎅그렁 남겨져 지나간 세월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사람 냄새 물씬하던 온기는 사라지고 기름기 빠진 빈집은 여름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처럼 초라하기만 하다. 눈길이 머무는 구석진 자..

좋은 수필 2023.01.06

파지/천양희

그 옛날 추사(秋史)는 불광(佛光)이라는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버린 파지가 벽장에 가득했다는데 시(詩) 한 자 쓰기 위해 파지 몇 장 겨우 버리면서 힘들어 못 쓰겠다고 증얼거린다 파지를 버릴 때마다 찢어지는 건 가슴이다 찢긴 오기가 버려진 파지를 버티게 한다 파지의 폐허를 나는 난민처럼 지나왔다 고지에 오르듯 원고지에 매달리다 어느 땐 파지를 팔지로 잘못 읽는다 파지는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간다 내 손은 시마(詩魔)를 잡기보다 시류와 쉽게 손잡는 것을 아닐까 파지의 늪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면 걸어나온다 누구도 저 길 돌아가지 못하리라

좋은 시 2023.01.04

오래된 농담/천양희

오래된 농담/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홥환수 가지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 밖에 두 눈이 ..

좋은 시 2023.01.04

멸치 타작 /유계자

멸치 타작 유계자 저녁 물빛이 파도에 젖어갈 무렵 바다의 봉제선이 열리고 멸치들이 올라온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사투 유자망 어선에 그물을 올리고 내리는 일 멸치잡이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합치면 백 년의 고목이다 태풍이 몇 번이나 휩쓸어도 고집 센 뿌리는 잘도 버텼다 대처로 나가 단번에 어군을 찾아내고 던져라! 호기 있게 목청을 높여 배 한 척 아버지 이름 붙여주고 싶었는데 마음뿐인 효도는 바다가 너무 일찍 받아 갔다 대신 바다 농사를 소작으로 물려받아 일정한 간격으로 부표를 오르내리고 꼬인 생을 풀고 찢어진 날을 기워 재투망을 하며 간간이 그물을 펼칠 때마다 환하게 꽃피는 밤 비린내를 손으로 훑으며 밤새 달라붙던 질긴 졸음을 에헤 에헤 봄볕에 이불을 털 듯 멸치를 턴다 [출처] 멸치타작 / 유계자|..

좋은 시 2023.01.04

지붕문서 / 성영희

지붕문서 / 성영희 한겨울에만 자라는 뿌리가 있다 물결무늬 고랑 끝에서 자라나는 투명한 뿌리들 뚝 떼어서 와작 씹으면 이만 시리던, 뿌리가 부실한 사내애들은 곧잘 겨루기를 했다 손 한 번 베지 못한 그 맑은 칼싸움으로부터 쨍그랑 잘려나가기도 하던 긴 겨울 처마 끝에서 자라는 고드름은 뿌리열매다 씨앗 하나 심을 땅 없는 가난한 양철지붕의 겨울 수확 잠깐의 햇살에도 툭 끊어지고 마는 가늘디가는 한철 농사다 고드름도 잘 자라지 못하는 북향집 실로폰 같은 뿌리들이 똑똑 물방울을 떨군다 꽃 밑으로 뻗어나가는 뿌리 대신 처마 끝에서 고작, 도돌이표로 돌아가는 가난한 음계들 겨울이 흘러내리고 있다 한여름 땅속 열기들이 뿌리 끝으로 빠져나간 흔적처럼 처마 아래 봄을 파종하고 있다 이 뿌리로 겨울을 났다는 소리는 듣지 ..

좋은 시 2023.01.03

골죽 / 지영미

골죽 / 지영미 수직으로 곧게 뻗은 대나무 군락, 속을 비운 대들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흘러넘치는 푸르른 본능 사이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댓잎에 튕긴 빛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인다. 바람이 불자 일제히 우듬지를 출렁이며 허공에 부서진 소리를 쓸어 담는다. 대나무들은 하룻밤에도 훌쩍 키가 자란다. 늦게서야 자라는 대는 죽죽 뻗고 싶지만, 햇볕은 먼저 큰 친구들이 차지한다. 시간이 갈수록 초라한 모습이 도드라진다. 버스럭거리는 낙엽만이 골골이 파인 상처를 감싸줄 뿐이다. 속 깊은 자괴감에 비하면 겉면을 타고 내리는 고통쯤은 참을만하다. 제때 자라지 못한 몸뚱이는 결핍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다. 시간이 갈수록 마디를 파고드는 골이 깊어진다. 생장의 마디마다 사연을 간직한 채 낮은 자세로 사는 법을 터득..

좋은 수필 2023.01.03

줄지 않는 간장 독/진경자

엊그제까지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물러가고 어영부영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을이 성큼 문턱을 넘어왔다. 처서가 지나고 추석이 가까워 오니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기온이 살갗에 와 닿는다. 요 며칠 비까지 내리더니 으스스 등에 한기가 돈다. 따끈한 국물이 생각나서 부엌에 들어가서 휘휘 둘러보았다. 자식들이 장성하여 나간 후로 나 혼자이고 보니 부엌에서 음식을 끓이는 일이 별로 없었다. 오래간만에 열어 본 냉동 서랍 속에는 마른 장작개비 같이 뻣뻣한 고등어가 들어 있고 돌덩어리처럼 언 고깃덩어리가 보인다. 느끼하거나 비린 것 말고 좀 삼빡하고 개운한 국물을 시원하게 먹고 싶어 냉동서랍을 도로 닫고 옆에 있는 찬장을 열어보았다. 메탈로 된 다용도용 찬장 속에는 스파게티 노란 계란국수와 무명실처럼 가느다란 하얀 소면..

좋은 수필 2023.01.01

자서전/이미영

자서전/이미영 맨몸뚱이는 말 없는 자서전이다. 화려한 수사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구차한 변명도 발붙일 곳이 없다. 외면하고 싶은 상처마저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진솔한 기록장이요 여과 없는 유리알 공책이다. 흠집하나 없는 아기의 맨 몸에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기어이 만지고 안아보게 만든다. 혈관마저도 펄떡이며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젊은 나신에서는 세상을 움직여 보리라는 기운이 뻗친다. 무조건반사로 가슴이 뛴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늘어진 살갗과 그 아래로 드러나는 골격이 안쓰러운 노년의 몸에서는 구절양장의 이야기를 읽는다. 애잔함에 눈앞이 흐려진다. 나는 선뜻 목욕탕에 가지 못한다. 샤워 할 때에도 금방 해치우는 버릇이 배었다. 오래된 교통사고의 흔적이 아직도 ..

좋은 수필 2022.12.31

시렁 그네 / 이남희

시렁 그네 / 이남희 누군가를 청산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전등사를 짓던 대목장大木匠은 사하촌의 주모와 사랑에 빠진다. 멋진 집을 지어 아롱다롱 살자 하던 주모는 그러나 공사 막바지에 이르러 야반도주해 버린다. 사랑의 배신자를 그대로 보낼 수 없었던 대목장은 쪼그려 앉은 나부상裸婦像을 조각하여 평생토록 대웅전 처마를 떠받치게 한다. 대목장의 비껴간 사랑은 그렇게 아픈 전설이 되어 참회의 정물로 전등사에 남겨지게 되었다. 여주에 가면 목아木芽 박물관이 있다. 오백 나한과 부처를 조각한 도편수의 피멍 든 손을 그곳에서도 보았다. 나부상을 조각하여 성불시킨 대목수처럼 고묘한 손이었다. 대작들을 보면서 나무와 신적 교감이 이룬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편수와 목신木神의 운명적 결합이었다. 처자식을 떠나..

좋은 수필 2022.12.31

달팽이/손광성

달팽이/손광성 달팽이를 보고 있으면 걱정이 앞선다. 험한 세상 어찌 살까 싶어서이다. 개미의 억센 턱도 없고 벌의 무서운 독침도 없다. 그렇다고 메뚜기나 방아개비처럼 힘센 다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집이라도 한 칸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시늉만 해도 바스라질 것 같은 투명한 껍데기. 속까지 비치는 실핏줄이 소녀의 목처럼 애처롭다. 달팽이는 뼈도 없다. 뼈가 없으니 힘이 없고 힘이 없으니 아무에게도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물며 무슨 고집이 있으며 무슨 주장 같은 것이 있으랴. 그대로 무골호인이다. 여리디여린 살 대신에 굳게 쥔 주먹을 기대해 보지만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그렇다고 감정마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민감하기로는 미모사보다 더하다. 사소한 ..

좋은 수필 2022.12.31

중심/심수향

중심 - 심수향 11월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듯이 배추가 제 삶의 한창때를 건너고 있다 꽃을 피우고 싶어하는 푸른 이마에 금줄같은 머리띠 하나 묶어주려고 이참 저참 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추는 중심이 설 무렵 묶어주어야 한다고 귀뜸을 한다 배추도 중심이 서야 배추가 되나보다 속잎이 노랗게 안으로 모이고 햇살 넓은 잎들도 중심을 향해 서기 시작한다 바람이 짙어지는 강물보다 더 서늘해졌다 띠를 묶어주기에는 적기인 것 같아 결 재운 볏짚을 들고 밭에 올랐더니 힘 넘치는 이파리가 툭 툭 내 종아리를 친다 널따란 잎을 그러모아 지그시 안고 배추의 이마에 짚 띠를 조심스레 둘렀더니 종 모양 부도처럼 금새 단아해졌다 부드러운 짚 몇 가닥의 힘이 참 놀랍다 이제 배추는 노란 제 속을 꽉꽉 채우며 꽃과 또 다른 길..

좋은 시 2022.12.27

푸새하던 날/김현성

푸새하던 날 김현성 쌀로 풀을 만든다. 풀풀 끓어 넘치는 바람에 냄비뚜껑을 열어젖혔다. 하얀 김 한바탕 쏟아내더니 거품이 폴싹 주저앉은 사이로 쌀 알갱이가 그대로 보인다. 모양새가 또렷한 것으로 보아 좀 더 시간을 두어야 푹 퍼져 뭉그러진 풀이 될 성싶다. 올여름 처음 푸새하는 날. 해마다 여름이 되면 손수 푸새할 것을 고집하는 게 있다. 직접 내 손으로 옷에 풀물을 먹이는 것은 떨어내지 못한 마음속의 그리움 때문이리. 푸새하는 풀물 속에는 어릴 적의 정갈하게 쪽진 어머니의 모습이 있고 성미가 까탈스러운 할아버지가 계시다. 고향 집의 너른 대청마루에 다소곳이 앉아 푸새한 것을 손질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떠오른다. 입에 가득 물을 물었다가 ‘푸’하고 내뿜은 물안개로 버석거리는 이불 홑..

좋은 수필 2022.12.26

억새/박종숙

억새 박종숙 가슴이 비어 있어 그리도 눈부신 꽃을 피우는 것일까. 욕심이 없어 은빛 너울 속에 손을 흔드는 것일까. 바람이 불어오면 그 무리 속에서 수런수런 들리는 듯한 이야기가 있다. '모두가 떠나고 있어요.' 멀리 논둑 한자락에서, 또는 잎 진 풀숲 속에서 하얗게 손끝을 세우고 바람을 따라 일렁이는 꽃! 그들은 언제나 빈 들녘에서 행인을 부른다.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듯 길 가던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순결한 모습의 춤사위를 펼치는 유희의 군락이다. 억새는 가을의 늦 동산을 지키기 위해 피어난다. 먼 산에 단풍이 들고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면 기다리기라도 한 듯 멀쑥한 키를 앞세우고 조용한 축제를 벌이는 우아함이 억새의 참모습이다. 11월의 제주는 하얀 융단으로 치장되어 있는 섬이었..

좋은 수필 2022.12.26

시접 한 쪽/정은아

시접 한 쪽 정은아 잘렸다.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의도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순간에 잘려 버린 그 자리를 어떻게 메워나갈 수 있을까. 나는 살아가면서 그 자리를 순간순간 느낀다. 미리 그려놓은 옷본을 원단에 대고, 박음질할 선을 그었다. 박음질 선에서 1cm 정도 더하여 둘레를 따라가며, 솔기를 이루게 될 시접 선도 그렸다. 가위가 시접 선을 따라 경쾌하게 움직였다. 바지의 앞판을 자르고, 이어 뒤판을 자르다가 그만, 싹둑. 시접이 잘려나갔다. 어이없이 한순간에 잃었다. 잘려나간 뒤판 시접 자리만 바라볼 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만들던 것을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잘려나간 부분에 시침핀을 꽂고, 신경 써서 재봉틀로 박았다. 아이의 쫄쫄이 바지 하나를 완성했다. 바느질이..

좋은 수필 2022.12.26

테왁, 숨꽃/박금아

테왁, 숨꽃 박금아 다가갈수록 바다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외지인의 접근을 두려워하는 파도의 울부짖음이랄까. 바닷새의 울음까지 겹쳐 2월의 고내포구는 난장이었다. 그 속을 뚫고 끊길 듯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절절함이 걱정을 한숨으로 내뿜는 호요바람 소리는 아니었다. 죽을 고비 끝에 간신히 안착한 철새의 마지막 울음 같기도 하고, 유년의 늦가을 밤 푸른 어둠을 가르며 마당 한 구석에 떨어지던 비파음 같기도 했다. 숨비소리라고 했다. 파도소리 높고 크다 해도 속을 비워내는 도저한 소리에는 부서져버렸다. 자신의 것을 다 비워야 날 수 있다는 갈매기가 해녀의 머리 위에서 울음을 더해주었다. 속을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는 세상에서 속을 비워야 한다니 가능이나 한 일일까. 사람 속이란 얼마나 깊기에 그..

좋은 수필 2022.12.26

명태/곽흥렬

명태 곽흥렬 드디어 동해 바닷가 작은 포구를 벗어났다. 차는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구절양장의 산허리를 휘돌고 돌아 나간다. 대관령의 험준한 고갯마루를 타고 넘어 줄곧 서西로, 서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 현기증으로 머리가 어찔어찔하고 속이 메슥거려 온다. 그렇게 얼마를 지났을까. 탁 트인 분지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느닷없이 나타난 황태 덕장, 끝 간 데를 모르게 늘어선 명태의 군상들이 사정없이 후려치는 칼바람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인 채로 꾸덕꾸덕 몸피를 줄여 가는 중이다. 이 깊은 산중에 웬 포로수용소가 있었더란 말인가. 사뭇 절규에 가까운 그들의 고통스런 표정에서, 자유를 갈구하며 몸부림치는 뭇 백성들의 환영幻影을 본다. 한껏 벌린 입에서는 피 끓는 혁명가..

좋은 수필 2022.12.25

파를 다듬으며 /신안호

파를 다듬으며 신안호 트럭에 쪽파가 산을 이루듯 쌓여있다. 골판지에 큼지막하게 써놓은 가격은 주부들의 시선을 끌기에 좋으리만큼 착하다. 김장김치에 멀미가 날때쯤이면 봄기운을 안고 찾아오는 쪽파다. 가을 쪽파가 알싸하게 매운 맛이 있는데 봄 쪽파는 매운맛이 덜하다. 매운맛을 싫어하는 나는 봄 쪽파로 삼삼하게 파김치 담아 먹는 걸 좋아한다. 갓 뽑아 온듯 싱싱한 쪽파와 튼실한 대파 한 단을 사들고 오는 내 걸음에 봄볕이 따라붙는다. 베란다에 앉아 파를 다듬는데 햇살이 등에 와 닿는다. 같이 다듬어 주는 건 아니지만 놀러 와 준 햇살이 고맙다. 때깔 좋은 고춧가루에 액젓으로 살짝 간을 하고 통깨를 솔쏠 뿌려 한 접시 나누어 줄까. 살짝 데쳐서 돌돌 말아 새콤한 초고추장에 찍어 먹게 파강회를 해줄까. 조갯살과 ..

좋은 수필 2022.12.25

돌꽃/홍성순

돌꽃 홍성순 금강석 꽃잎 위로 포말이 부서진다. 파도가 절리를 덮을 때마다 검은 잎을 한 장씩 펼친다. 마침내 육각기둥이 부채꼴로 둥그렇게 퍼지며 커다란 꽃 한 송이가 피어난다. 만다라 같다. 절벽 아래서 피어난 바다의 야생화에서 훅 향기가 끼쳐 나온다. 벌과 나비가 찾는 꽃도 아니며 화려한 색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교태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꽃 앞에서 탄성을 지른다. 수없는 시간의 풍랑이 빚어낸 검은 꽃 한 송이, 오늘도 주상절리 앞에 선다. 남편이 생각나면 '파도소리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곳을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온다. 소나무 사이로 채색되는 바다는 청람빛이었다가 푸른빛으로, 다시 초록으로 시시각각 제 모습을 바꾼다. 길 끝에 서면 벼랑이 시작되고 주름 깊은 물결은 먼 수평선에서 밀려와 해안..

좋은 수필 2022.12.25

모루 / 윤진모

모루 / 윤진모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났다. 추석을 앞두고 선산에 벌초하러 간 이튿날 날도 새기 전 아내로부터 날아온 소식이었다. 8남매 가운데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마디의 유언도 남기지 않는 쓸쓸한 퇴장이었다. 아파트 16층 집에서 염하였다. 운명하기 4년 전 어머니는 불의의 사고로 병원 영안실에 빈소를 차렸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몸져누운 안방에 마련했다. 방 한가운데 병풍을 치고, 소렴, 대렴을 마쳤다. 형제들은 한쪽에서 염습이 끝날 때까지 앉아 있었다. 천주교식으로 장례하여 별다른 복장이라든지 상식 같은 건 아예 차리지 않았다. “5년이나 누워 지낸 망자가 욕창도 하나 없네.” 염을 하던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옆에서 거들던 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른쪽 엄지발..

좋은 수필 2022.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