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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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장이 아버지

염장이 아버지 조수일 갯가의 지친 오후가 바람에 쓰러진 후 아버지는 이름 있는 모든 지느러미를 소금에 절여 냈다 아가미는 아가미대로 창란은 창란대로 부위별로 도려낸 자리 왕소금을 한 움큼씩 되박아 고통스러움을 향기로 추출하고 있다 상처 자리에 환한 영혼을 켜는 염장이 오늘은 풀치 떼가 가득하다 은빛 꼬리지느러미의 소란스런 비린내를 건넌방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날개를 읽어 캄캄하던 내 안이 분주하다 푸른 곰피자락이 너울거리는 홑이불을 배에 감고 문가로 기어간다 빳빳한 비닐 앞치마를 두른 채 작업을 서두르는 아버지 어깨에 잔잔한 파동이 인다 지느러미의 촉수 하나 다치지 않으려는 손놀림에 안도한 풀치 떼가 나 몰래 지난 세월을 뱉어낸다 아버지의 지문 안으로 녹아든 소금물 삶의 경계를 허물며 스러지고 풀,풀,풀..

좋은 시 2023.02.05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이주송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 이주송 바위 속에서 나뭇잎의 잎맥인 듯 빗살무늬인 듯 오래된 뼈가 걷고 있었다 참빗을 닮은 한 벌의 뼈 초식이었던 뿔공룡은 일억 일천만 년 동안 바윗속으로 스며든 빗물이나 몇 번의 지각이 이동하는 소리로 연명했다 살점과 내장과 표피를 버리고 온전한 바위가 되어 마지막을 증언하고 싶었을 거다 천적이 없는 단 하나의 계절 속에서 그 오랜 진화의 시간 단단한 근육과 푸른 이끼의 털을 갖고 싶었을 거다 그러다 광물의 구태속에서도 부화의 시간은 다가와 화석에게도 통점이 도졌을 거다 갯벌의 어패류들이 조금씩 달을 뜯어먹는 동안 공룡은 부리주둥이가 뭉툭해지도록 태초의 서식지를 감각했을 것이다 한 겹 두 겹 더위와 추위를 껴입고 돌가루를 되새김질 하며 온 몸에 밴 울음을 초원의 저물녘에 방류..

좋은 시 2023.02.05

생짜배기/박종희

생짜배기/박종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흙구덩이에서 꺼내놓은 투박하고 촌스러운 무를 보면 왠지 자꾸 시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자란 환경이 달라서인지 시댁에 가면 모든 게 낯설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시댁에 갔을 때였다. 저녁밥을 지으려고 부엌에 들어서다가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내 앞에 펼쳐진 부엌은 아주 어렸을 적에나 봤음 직한 구식 부엌이었다. 순간, 새 사람을 격하게 반기듯 입이 찢어지라 웃는 것이 있었다. 마치, 쇠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기세등등한 아궁이를 보니 다리에 힘이 빠졌다. 세월의 더께로 윤기 잃은 가마솥과 넙데데한 나무 주걱 등, 부엌살림을 훑느라 잠깐 방심하는 사이 한쪽 발이 허방다리를 짚을뻔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보니 아궁이 앞이 둥그스름하게 파여 있었..

좋은 수필 2023.02.05

잔 소 리/안병태

잔 소 리 안병태 아내가 야간에 외출을 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구태여 마당으로 쫓겨나 담배를 피울 필요도 없고, 뉴스냐 연속극이냐 따위로 가위 바위 보를 할 일도 없고, 아무 곳에서나 머리를 빗어도 잔소리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내가 가끔 외박을 한다는 것은 더욱 환영할 만한 일이다. 친구들과 노닥거리다가 새벽에 들어간들 잔소리하는 이가 없어 좋다. 대보름이나 백중 같은 날 갓바위부처 앞에서의 철야기도는 왜 하룻밤만 하고 치우는지 모를 일이다. 어차피 소원을 빌러 간 걸음, 여러 밤을 지새우면 부처님께서도 기특하게 생각하시고 특별히 눈여겨봐 주실 것을…. 다행히 막내 입시 문제가 아직 남아 있으니 그때까지는 몇 번 더 외박을 할 것이다. 이미 익숙해진 철야불공, 그 애의 입시가 끝나더라도 꾸준히..

좋은 수필 2023.02.04

넵티누스*의 바다/구애영

넵티누스*의 바다 구애영 바다를 신이 만들었다는 말은 정말일까요 먹갈치의 표피에서 발견된 언어는 뜻밖에 은빛이었어요 항구의 어스름 속에서 위판장 사람들의 장화는 늘 활기찼고 지상의 바다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다에서 제 몸의 무늬를 체득했나요 되돌아갈 수 없는 것 스스로 감지했나요 붉은 아가미만으로 뻐끔거려요 의연한 포즈를 취해야 해요 바다로 가게 해주세요 그런데 나의 뒤엔 도마만 있어요 아이스박스에 담기는 순간 어느 기억이 먼저 지워졌을까요 입을 쭉 내밀고 앞만 보고 달렸던 황홀한 직진 그 너머에 집착하여 꼬리를 내내 흔들었기에 해찰과 관찰 사이에 미끼의 밀어가 있었어요 어떤 선택은 당혹스러운 치명을 불러오죠 치명 뒤엔 해무처럼 짙게 낀 후회와 그리움만 남아있는데 누군가의 비극은 왜 누군가에겐 희극일까요 ..

좋은 시 2023.02.04

눈(雪) 에 대한 시

눈(雪) 에 대한 시 三南에 내리는 눈 황동규 琫準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째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낮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

좋은 시 2023.02.04

압곡사 가는 길 / 김양희

압곡사 가는 길 / 김양희 압곡사에 닿으러 가는 길. 이 길은 길과 잇닿아 자리한 절집을 닮았다. 널찍하기보다 조붓하고 웅장하기보다 아담하며 매끈한 아스팔트가 아니라 거친 시멘트로 바퀴가 지나갈 만큼만 바닥을 다졌다. 산이 주는 그대로 나무를 비끼고 구불 거리며 오르막내리막으로 닫는 길은 딱 압곡사를 위하여 닦아놓은 산속의 마침맞은 트임이다. 간혹 마주 오는 차를 만 나면 여지없이 그 자리에 갇히고 마는 길. 설혹 마주치게 된다면 여유가 되는 길목 그쯤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올 라간다. 압곡사는 나무오리가 날아가 앉은 곳에 지었다는 설이 내려온다. 의상대사는 나무오리 드론을 띄워 산세를 살피고 풍광 좋은 자리에 아담한 절을 앉혔다. 절집 마당에서 봉우리와 능선이 물결치는 멈춤을 바라다보면 누구나 그곳..

좋은 수필 2023.02.04

문병 유감 /안병태

문병 유감 안병태 성의는 고맙지만 문병 좀 오지 마라. 문병을 왔으니 응당 내가 병상에 누워있는 사연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없는 시간 할애하여 문병해주는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성의껏 대답해야겠지만 그것도 한두 번 말이지, 발병 원인으로부터 작금의 와병용태까지를 매번 브리핑하기에도 이젠 지쳤다. 오죽하면 녹음기를 이용할까 조차 생각했으랴. 했던 방송 또 하고 했던 방송 또 하다 보니 숫제 병상일지를 줄줄 외우겠다. 훈장들 강의가 괜히 유창한 게 아닌 모양이다. 나중에 문병 아니 왔다고 절대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 제발 문병 좀 오지 마라. 방금 한 팀 보내고 들어와 겨우 눈 좀 붙이려는데 또 들이닥치면 어쩌란 말이냐. 떼로 몰려와 병실이 비좁도록 북적거리니 이웃 병상 환우들 보기에 민망스럽다...

좋은 수필 2023.02.04

그 많던 일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이덕규

그 많던 일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덕규 모내기 끝내고 제초제 살포한 논과 식물 전멸제를 뿌린 논두렁에는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풀을 집 삼아 살던 온갖 벌레와 곤충들의 밤낮으로 울려 퍼지던 합창이 한순간 뚝, 그쳤습니다 풀잎 끝에 맺혀 기생하던 수많은 어린 이슬도 지상에 도착하자마자 눈도 못 뜬 채 죽었습니다 이제 곧 여름인데 개구리와 뱀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쟁터로 나가기 위해 도열한 병정들처럼 위풍당당 벼들만이 오와 열을 맞추고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사람을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훈육되고 양육되었습니다 용수로와 배수로 고인 물속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고 따가운 햇살만이 오색 빛 기름띠에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살충제와 살균제를 뿌린 논밭은 그 무엇도 얼씬거리지 못하는 지뢰밭이 되었습니..

좋은 시 2023.02.04

될 대로 된다는 것/ 김제김영

될 대로 된다는 것 ​ 김제김영 ​ 될 대로 되라는 말 참 무책임한 말 같지만 지구의 모든 실개천과 그보다 더 큰 강들과 천년을 넘게 걷고 있는 옛길들, 가을걷이 끝에 꼭 입 닫고 있던 곡식들이 몇십 배, 몇백 배로 불어나는 일 그거, 알고 보면 다 될 대로 된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힘의 순차를 세상은 힘겨운 듯하지만 불가역 앞에선 오히려 편안해진다 될 대로 되는 일은 순리의 첫 번째 말 욕심의 반대말쯤 되지 않을까 코카콜라 병이 용케도 비탈을 찾아 한 번은 반드시 굴러보는 일과 평생을 묵언하던 코젤 다크가 정수리를 따는 순간 한 번은 반드시 제 목소리를 내는 것도 될 대로 되는 일이다 냉혈동물인 방울뱀이 사막의 햇빛 아래 똬리를 트는 일도, 다 익은 열매가 끝내 땅으로 뛰어 내리는..

좋은 시 2023.02.04

우주 전파사/정영효

우주 전파사 정영효 노인은 형광등의 멍처럼 쓸쓸한 눈으로 안경을 벗는다 음각이 색겨진 얼굴과 뒤틀린 다리 중심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는 듯 몸은 앞으로 껴안으며 휘어졌다 불룩한 천장아래 놓인 라디오들에서 금성과 삼성이 이따금 반짝거리고 블랙홀에 빠져들 듯 화면이 멈춘 텔레비전은 희미하게 교차하는 신호를 잡지 못한 채 시간과 공간을 잃어버렸다 세월도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빨려가고 있다 멀리 타전된 암호처럼 한 시절이 지나면 노인도 아득한 곳으로 전송될 것인데 잡히지 않는 채널이 켜진 듯 부스스한 유리문 밖 불빛에 갈라진 거리를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의 눈은 월식처럼 어둡다 수리를 끝낸 텔레비전을 맨손으로 닦자 허공의 무늬를 따라 유영하는 먼지들 밤사이 어둠이 이 모두를 정리할 것이다 잃어버린..

좋은 시 2023.02.04

슬픔의 바깥/신철규

슬픔의 바깥 - 낮달 신철규 보라색 보자기를 든 여인이 사거리에 서 있다 꼼꼼히 싸맨 보자기 안에는 쟁반에 담긴 커피포트와 찻잔 두 개가 있을 것이다 보자기 매듭이 토끼 귀처럼 쫑긋 솟아 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다 정면을 바라보는 것도 바닥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것인지 자신을 힐끔거리며 지나치는 행인들을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귀밑머리를 가만히 쓸어 올려 귀 뒤로 넘긴다 오래전 소중한 사람을 배웅하고 난 뒤 한참을 돌아서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쪽 뺨이 파인 낮달이 허공에 떠 있다 그녀 앞 횡단 보도가 한없이 펼쳐진 계단처럼 누워 있다 멀리서 불법 유턴을 하고 쏜살같이 달려온 파란색 소형 승합차가 멈춘다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좋은 시 2023.02.04

같은 바다는 없어요/박재연

같은 바다는 없어요 박재연 ​ ​ 당신에게는 백 년 동안 술에 취해 살다간 한량의 유전자가 흐르고 나에게는 극지를 유랑하며 살다 간 무사의 유전자가 흐른다 당신은 서해의 개펄에 나가 하루치 식량이나 캐며 살자고 하지만 나는 동해의 해풍에 두통이나 말리며 살고 싶다 동해와 서해는 다른 바다일까 해가 지고 또 지는 서해는 사람을 살리는 바다라고 하고 단호하게 파도치는 동해는 냉정해서 싫다는 주장이 있다 당신은 육산에서 태어나 고기잡이를 좋아하지만 나는 악산에서 태어나 은산 철벽을 좋아한다 바다는 바다이고 산은 산이기만 한 걸까 당신은 당신에게로 나는 나에게로 돌아가는 중일까 물 때 달력이 한 장 남은 서해 바닷가 야외식탁 노을과 바다는 한통속으로 붉어지고

좋은 시 2023.02.04

어린 봄을 업다/박수현

어린 봄을 업다 박수현 몇십 년 만에 아이를 업었다 앞으로 안는 신식 띠에 익숙한 아이는 자꾸 허리께로 흘러내렸다 토닥토닥 엉덩짝을 두드리자 얼굴을 묻고 나비잠에 빠졌다 슬그머니 내 등을 내려와 제 길 간 어미처럼 아이도 날리는 벚꽃잎 밟으며 자박자박 걸음을 뗀다 어릴 적, 어른들 따라 밤마실 갔다 올 때면 넓은 등에 얼굴 묻는 것이 좋아 나는 마실 파할 즈음 잠든 척하곤 했다 업혀서 돌아올 땐 부엉이 우는 밤길도 무섭지 않았다 가끔 백팩이나 메는 내 어두운 등짝으로 어린 것의 온기가 전해진다 내가 걸어온 한 생이 고작 두어 뼘 등판 위에서 뒤집혔다는 생각 겁 많고 무른 가슴팍 대신 갖은 상처를 받아내느라 딱딱해진 등이 혹 슬픔의 정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득, 누가 이 말간 봄빛 한나절을 내 빈 등에..

좋은 시 2023.01.31

카오스적 생존기 / 문경희

카오스적 생존기 / 문경희 각다분한 오늘을 언어의 춘추전국시대라 일컬어보랴. 자판기를 굴러나오는 캔음료처럼, 각양각색각미의 신어가 뚝딱뚝딱 창조된다. 귀로, 눈으로 채집되는 그것들은 막 잡아올린 생선처럼 내 안을 퍼덕거린다. 입보다는 SNS라는 소통의 창구에서 주로 애용되는 그들의 말맛은 새콤달콤쌉사레. 그것은 한때 청춘이었던 기성세대를 낡고 닳은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규정지어버리는, 돌도 거뜬하게 소화시킬 MZ세대들의 입맛에서 비롯되었을지니. ​나는 아주 가끔 그것들을 씹고 뜯고 맛보지만 피와 살로 체화하지는 못한다. 그들과 나 사이의 아뜩한 불능의 거리는 야릇한 자괴감으로 채워지기도 하나니. 목에 걸린 가시 같은 그들, 불편유발자를 겨냥하여 유치하게 꿰맞춘 '아무말대잔치'라 구어박아 보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수필 2023.01.29

어깨/김초혜

어깨 어머니의 어깨는 기대고 기대어도 포근한 어깨 아버지의 어깨는 기대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어깨 # ‘쟤 좀 보세요. 어깨에 마구 힘을 주며, 자기과시를 하네요.’ 누구에게 배운 걸까? 얼마 전 친구가 맡긴 잉꼬 한 마리가 외로워 보여 암컷을 구해 새장 안에 넣어 주었다. 새장 속에서 먼저 살던 잉꼬는 새로 들어온 잉꼬 주변을 몇 번 돌더니 보란 듯이 어깨를 힘껏 부풀리며, 이 새장 안은 자신의 영역임을 분명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경우도 상대보다 힘이 세거나 권력이 높은 사람들은 잉꼬 새처럼 어깨를 과도하게 펴고 몸을 부풀려 ‘확대자세’를 취하며 공간을 상대보다 더 많이 차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깨”는 남성적 매력의 포인트 중 하나라고 여긴다. 어깨는 위엄과 권력의 상징이고, 책임감을..

좋은 시 2023.01.29

낙상落傷/오정국

낙상落傷 보기 좋게 벌러덩 나자빠지지도 못한 채 비탈길을 헛딛는 순간, 아이쿠 소리를 들었는데, 누구의 음성인지 나도 몰랐다 여태껏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 몸에 깃든 사람 하나 벼랑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외마디소리 부지불식간의 아이쿠 까마득히 잊고 지낸 아이쿠 감감무소식의 아이쿠가 생면부지의 사람 하나를 들춰냈던 것이니 비로소 내 면상이 화끈거리고 그토록 그에게 빚진 일이 많았던가 이토록 기막힌 아이쿠 무시무시한 아이쿠 순식간의 아이쿠 분명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잡목림 덩굴이거나 허공의 어디선가 울려온 것 같았는데 # “아이쿠”. 잠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소리였다. 발 한쪽을 깁스했을 뿐인데, 누웠다 일어나려는 데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살아오면서 누웠다 일어나는 것이 그리 쉬..

좋은 시 2023.01.29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김완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세상에 하나뿐인 단골집 식당이 사라졌다 그 식당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사소한 즐거움 하나를 잃어버렸다 약속을 잡지 않아도 그곳에 가면 낯익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과 맛깔 나는 된장찌개 내주던 할머니 백반집도 사라지고 알싸한 고향바다 냄새를 토하며 한여름 허기를 달래주던 깡다리 집도 사라졌다 기막힌 국물로 국수를 말아주던 간판 없는 작은 식당도 사라진지 오래다 더불어 사는 사람살이를 향기롭게 하던 작은 공간들이 그렇게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구원과 위안은 미래의 원대한 것보다 오늘의 작고 사소한 것들로부터 온다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대체할 수 없는 사소한 위안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동네 식당에 드나들던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한 시대가 저물어 ..

좋은 시 2023.01.29

대답 / 이도훈

대답 / 이도훈 동그란 감자 씨를 세 쪽으로, 세모꼴로 나누어 심었다 땅속은 난감했을 것이다. 땅속에서 골똘히 궁굴렸을까 갸우뚱, 세모꼴들은 동그랗게 바뀐다 한 알의 씨감자가 땅을 설득하고 요동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구의 소속이니까 별의 본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진도 없이 울렁거리지도 않고 감자알 크기의 땅속을 내주는 여름 땅, 한 줌의 햇살과 한 손바닥 빗물만으로 둥글둥글 살찌는 감자는 삐걱거리지도 않고 툴툴거리지도 않고 모난 종자쯤은 스스로 버린다 봄, 세모에 단 한마디를 던졌을 뿐인데 주렁주렁 둥근 대답을 듣는다

좋은 시 2023.01.28

가시를 바르다 / 설성제

가시를 바르다 / 설성제 가족에게 마음 전하고 싶은 날에는 생선을 굽고 싶어진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사과하기 쑥스러울 때, 미안한 줄 알면서도 그냥 덮어버리고 싶을 때, 유난히 사랑스러워 더욱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생선가게로 간다. 이런 날은 가시가 많은 생선을 고른다. 주로 갈치, 꽁치, 조기, 가자미다. 간이 알맞게 밴 생선이 속까지 잘 익도록 노릇노릇하게 구워 식탁에 올린다. 식구들이 수저질을 하는 동안 가시를 발라낸다. 생선의 참맛은 대가리에 있다고 했던가. 일단 대가리를 떼서 살을 살살 긁어낸다. 등뼈를 통째로 발라내며 갈비뼈도 걷어낸다. 지느러미 부분에 달린 참빗 같은 가시들도 순끝을 따라 쏙쏙 빠져나온다. 생선 가시를 발라내는 데는 이력이 났다. 살점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 것은 ..

좋은 수필 2023.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