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안녕하신지/이복희

안녕하신지/이복희 출근길에 비교적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가는 방향의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이다. 낯은 익지만 인사를 나누지는 못한다. 서양 사람들처럼 누구를 만나던 “하이!” 하고 지나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에게는 그런 정서가 없다. 오히려 서로 눈을 안 맞추려고 애써 외면한다. 시선이 마주치면 “안녕 하세요” 정도의 인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낯익은 사람들인데도 그렇다. 초등학생인 우제를 알게 된 것도 출근길에서였다. 우연한 기회에 말을 건넸다. 키가 작아 저학년인 줄 알았는데 5학년이라며 부끄러워하던 녀석을 아침마다 만난다. 저쪽에서 오다가 나를 발견하면 녀석은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다. 내 눈길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어지간히 가까워지면 나는 그 애에게 눈높이를 맞추며 ..

좋은 수필 2023.03.15

겨울소리/문경희

겨울소리 문경희 사방 바람의 우범지대다. 홀로로는 결코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부조리에 맞서듯 바람은 닿아지는 모든 것들을 다그쳐 소리를 만들어낸다. 소리를 앞세워 자신을 과시하고, 소리를 채찍 삼아 세상을 평정하려 든다. 뒷산 능선을 넘어오는 북풍 역시 을씨년스러운 소리부터 앞세운다. 수척해진 나무들의 등짝에 냉냉冷冷한 문신을 새기고 있는지, 바람의 손이 스칠 때마다 구성없는 비명이 쏟아진다. 바람의 소리인지, 소리의 바람인지, 오늘 따라 집 뒤 굴참나무 숲정이는 귀곡산장이 따로 없다. 얼음장 같은 바람이 헤살을 놓는 날엔 무조건 퇴각을 외쳐야 한다. 바람에 항거하는 방법이란 고작 문이란 문을 꽁꽁 닫아걸고 보일러의 온도를 높이는 것뿐이다. 그러나 철옹성 같은 문도 소리의 출입까지는 막을 수 없나니. ..

좋은 수필 2023.03.15

자전거 소개서 / 이예연

자전거 소개서 / 이예연 빗방울은 등에 지고 땀방울은 지르밟아 가락시장 삼십여 년 공손히 함께해온 온몸에 보푸라기가 훈장으로 매달린 너 골 깊은 허기에도 비상구 없던 외길 숱하게 부대낀 날 짐받이에 걸어두고 힘차게 달리고 와서 숨 고르는 발동무 쭈글해진 두 바퀴에 기운을 넣어주고 다른 데는 괜찮냐고, 아픈 데는 없느냐고 페달과 늑골사이에 더운 손길 얹는다 청지기 받침대가 남은 하루 받쳐 들면 윤나는 안장위에 걸터앉은 가을 햇살 소담한 너울가지를 체인 위에 감는다

좋은 시 2023.03.14

묵은 김치 사설(辭設) /홍윤숙

묵은 김치 사설(辭設) 홍윤숙 묵은 김치독을 부시다가 그것들이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게도 푸른 시퍼렇게 잎이며 줄기 창태같이 푸르던 날 들이 있었더니라 그빳빳하던 사지를 소금에 절이고 절여 인고와 시련의 고추가루 버무리고 사링과 파, 마늘 양념으로 뼈까지 녹여 일생을 마쳤다. 타고난 목숨의 이유대로 이제 창창하던 살과 뼈 다내주고 몇 가닥 뭉크러진 찌꺼기 상한 속으로 남아 오물을 버려진다. 이로써 한 몫.. 한 생을 완성한다. 남은 길 오물로 버려질 쓰레기 한 점 파먹고 버릴 겨울 묵은김치야 한없다.

좋은 시 2023.03.14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서야 김치가 된다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서야 김치가 된다 - 김삼환 순식간에 뽑혀 나와 부르르 떠는 배추 그렇다 분수처럼 절정에서 꺾이는 것 전율은 솟구친 몸이 떨어질 때 오는 거다 증거는 충분하지, 두 쪽으로 배를 갈라 차곡차곡 쌓아 온 이력들을 흔드는 것 오로지 결기(潔己)하나로 한 번 외쳐 보는 거다 소금기가 구석구석 온 몸으로 스며들 때 누구인들 한 번쯤 이렇게 푹 젖다 보면 사나흘 생각이 깊어 돌아갈 수 없는 거다 고추 마늘 온갖 양념을 한 통속에 비벼서 덥고 춥고 맵고 짠맛을 한꺼번에 겪는 것 세상의 눈치 살피며 풀 죽을 수 있는 거다 입 안에서 씹힐 때 마지막 숨 거두며 다섯 번을 죽어서야 맛을 내는 배추처럼 몇 번을 까무러쳐야 시 한 편이 되는 거다

좋은 시 2023.03.14

대청, 골목을 모으다 / 이춘희

대청, 골목을 모으다 / 이춘희 짱짱한 여름 햇살이 마을 구석구석에 내려앉는다. 성안숲의 소나무는 강렬한 빛의 기운을 받아 기개에 날개를 달았다. 모습은 드러나지 않지만, 자양분을 위로 밀어 올리고 있을 뿌리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마을 입구로 들어선다. 길게 이어진 돌담길이 굽은 나무줄기 같다. 뿌리가 준 양분을 곁가지로 배달하는 줄기처럼 골목길은 이 집 저 집으로 삶의 지혜를 수없이 날랐으리라. 돌담을 이루는 돌의 모습이 가지가지다. 길쭉한 돌과 납작한 돌, 둥근 것과 모난 것, 머리보다 큰 돌과 주먹보다 작은 돌이 각자의 자리에서 평안을 붙잡고 있다. 이런저런 사람이 만나 서로 보듬고 감싸며 살아가는 한밤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 듯하다. ‘골목 끝에 무엇이 있을까.’ 설레는 마음이 걸음을 재촉한다...

좋은 수필 2023.03.14

댓돌 위의 신발 / 석민자

댓돌 위의 신발 / 석민자 안나의 집엔 특별한 신발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조그마한 남자용 흰 고무신이다. 노리개로도 모자람이 없을 작고 앙증맞은 신발이 댓돌위에 가지런히 놓인 모양새는 누구라 없이 웃음을 베어 물게 한다. 낯가림을 하는 사람도 단박에 팔을 내어 밀게 하는 친화력이다. 바깥쪽으로 얌전히 놓여진 품새는 신 임자가 집안에 있음을 일러준다. 하기는 백일 전의 아기나 신음직한 신발이니 임자가 집안에 있을 밖에 없을 일이기는 하다. 신 임자가 누구냐는 물음에 예수님이라고 답하는 수녀님 얼굴이 풀꽃이다.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예수님 신발을 준비해둘 생각을 하다니. 고요하기가 물밑 같다. 자식을 하느님사도로 내어주고 노후가 여의찮아진 어른들이 모셔진 곳이다. 지금껏 십자가 고상이나 성모상만 봐오던 ..

좋은 수필 2023.03.14

마루 / 임영도

마루 / 임영도 마루는 불평하지 않는다. 찍히고 밟히고 뛰어도 아파하지 않는다. 따뜻한 온돌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벽창호로 막힘을 거부한다. 방밖에 앉아서 계절의 변화를 밤낮으로 바라보지만 감탄의 소리도 지르지 않고 무표정이다. 앞마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간섭하지 않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마루는 집안 생활의 동선을 이끄는 으뜸자리이다. 경남 함양에 있는 일두一蠹 정여창 선생의 고택을 찾아 민박을 한 적이 있다. 마을 전체가 유서 깊은 선비의 고장답게 고샅길마다 고풍스러운 운치가 깃들어 발길을 멈춰 세운다. 솟을대문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뒤틀린 서까래에서 애잔한 세월의 흔적이 담뿍 묻어난다. 단정하게 배열된 집들은 하늘로 비상하는 듯이 솟아오른 팔짝 지붕의 추녀마루마다 대학자의 기품이 ..

좋은 수필 2023.03.13

돌이라는 새/조선의

돌이라는 새/조선의- 하늘이 잘 보이도록 머리를 내밀었다 몸속에 감춘 길은 한낮 궤적일 뿐 스스로 고립될 때까지 수많은 기착지를 떠나와야 했다 밤에 어울리는 어둠은 새 떼의 체온으로 스며들고 발길질에 걷어차인 돌에 날개가 돋아났다 목구멍 깊이 멈춘 숨소리들은 서슬 푸른 뼛속까지 잠을 가둔 채 수천 년을 밤으로 귀결시켰다 나는 가끔 헛발질하는 탓에 날기를 포기했지만 살다가 놓친 것들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방향도 없이 허공의 입김으로 사라진 새들은 바람의 경전을 따랐다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것들의 문맹(文盲) 식욕은 살아 있어야 누리는 특권인가 천년을 먹지 않아도 살아있는 것이 있을진대 시시한 충격으로는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컹거리는 것은 밖의 일이라 생각했지만 살점이 떨어져 나뒹굴도록 부딪치면..

좋은 시 2023.03.13

섬돌 / 박양근

섬돌 / 박양근 ​ 별스럽지 않은 돌이다. 산이나 들판 웬만한 곳이라면 어렵잖게 찾을 수 있는 한 자 남짓 넓이의 돌덩이다. 주춧돌이 될 만한 모양새는 애당초 타고나지 못했고 솜씨 있는 석공의 마루와 마당 사이의 성긴 틈을 메우는 돌은 이것이 제격이다. ​이 돌이 섬돌이다. 집채를 오르내리도록 만든 평범한 돌층계이다. 하지만 찬찬히 보면 황토가 곱게 다져진 앞마당을 다소곳하게 내려다보듯 대청마루를 혼신의 힘으로 떠받치듯, 단단하게 괸 물상이다. 처음 그것이 놓여 질 때는 빈틈도 흔들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온갖 발자국을 가슴으로 받으면서 채석장의 파석처럼 부서져 내린다. 예나 지금이나 제자리를 지켜내는 미명의 아픔이 쌓이듯 박혀지는 곳이 섬돌이다. ​시골에서는 지금도 집안 어른이 섬돌을 오..

좋은 수필 2023.03.09

우산/ 김애자

우산/ 김애자 희멀건 눈으로 멍하니 쳐다본다. 햇살이 환하면 우산은 현관 귀퉁이에서 무료한 삶을 이어간다. 형형색색이 행렬을 이룬다. 비 오는 날은 누군가에게 들림을 받고 세상을 내려다보며 의기양양하다. 주인의 요구에 따라 반원이 되는가하면 중세의 사원처럼 뾰족하고 둥근 지붕이 된다.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 지나는 눈길을 잡아채거나, 화려한 색으로 자태를 뽐내며 빗속을 누빈다. 날이 들면 찾아오는 실직의 소식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우산의 걸음이 활기차다. 우산은 임시직이다. 언제라도 불러주기만 하면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워한다. 귀한 대접을 받으며 쓰임 받는 날은 높은 꼭대기에 오른 것 같다. 어께를 으쓱거리며 주변을 살필 여유도 잠시 뿐, 언제 관심 밖으로 밀려날까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리며 가슴을 졸인다...

좋은 수필 2023.03.09

간고등어/김완수

간고등어 김완수 ‘맛 좋고 싱싱한 안동 간고등어가 왔어요.’ 불시의 택배처럼 동네를 찾은 소리가 내 아픈 유년 시절을 살 바르듯 헤집는다 행여 골목 어귀에서 생선 굽는 냄새 나면 난 이르듯 조르르 어머니에게로 갔고 어머닌 낡은 지갑만 만지고 또 만지셨다 내 유년의 고등어는 유난히 짭조름했다 어머니의 지갑이 더디 열렸을 뿐인데 가난은 소금버캐를 씹듯 짜디짰었다 고등어를 하시면 잘 뒤집으셨던 어머니 어쩌면 내 어머닌 간이 배인 설움으로 비린내 나는 현실을 감추셨는지 모른다 작가 약력: 1970년 광주광역시 출생 1998년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 졸업 2008년 계간지 '시에' 신인상 수필 부문 당선 2009년 제1회 '강원문학' 신인상 수필 부문 당선 2012년 제15회 재생백일장 일반부 ..

좋은 시 2023.03.09

간수 / 박월수

간수 / 박월수 소금을 샀다. 포대를 열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서해의 태양과 바람 냄새가 났다. 향기로웠다. 포대를 다시 묶으면서 보니 겉면에 소금기가 배어나와 눅진하면서 짭짤한 기운이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졌다. 창고 바닥에 플라스틱 상자를 깔고 그 위에 묵직한 소금 포대를 올려 두었다. 물기가 다 빠지려면 오래 걸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날부터 포대 솔기에선 쉼 없이 소금물이 흘러내렸다. 저의 태생이 바다인 걸 잊지 않으려는 듯 똑똑 소리 내며 소금기를 뱉어냈다. 포대마다 그릇을 받쳐두었지만 언제 넘쳤는지 바닥이 흥건해지곤 했다. 어느 날부터 소금 포대 주변 시멘트 바닥은 늘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 곁을 지날 때마다 내 맘은 이상하게 물 먹은 솜처럼 눅눅했다. 저를 길러 준 서해의 바람과 햇..

좋은 수필 2023.03.09

소금꽃 뒤에 맺힌 열매들 / 박시윤

소금꽃 뒤에 맺힌 열매들 / 박시윤 땡볕의 날들이 흘렀다. 서늘한 바람은 우리가 사는 세계로 숨어들어 천지의 고단함을 탈곡한다. 알맹이가 된 것들은 자신의 무게만큼 지상에 남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날아가 버린다. 우리는 날아가는 것들을 애써 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지상에 남은 무게에 충실히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출 뿐이다. 지천으로 추수의 낱알들이 남겨졌다. 거둠의 시간을 기다리는 열매는 고요하나, 오늘을 기다리며 지난 계절 온 몸을 대지에 내맡긴 농부의 마음은 긴장감으로 일렁인다. 내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동이 트기도 전에 아버지는 빈속으로 낫을 갈았다. 무겁고 둔탁한 조선낫만을 억척스럽게 고집했던 아버지였다. "왜 낫 열 댓 개가 조선낫 한 자루..

좋은 수필 2023.03.09

소금 흔적/김현희

소금 흔적 ​ 김현희 ​ 죽은 것들과 친분이 두터운 소금의 용도는 살아 있는 기를 삭제하는 것 ​ 생살을 파고든 염분에 미꾸라지가 은신처의 내력을 발설한다 짜지 않게 싱겁지 않게 소금의 모서리를 껴안은 생선과 채소와 밑반찬 소금 앞에 엎드린 처세술로 수명을 연장한다 짠맛이 들어가야 싱겁지 않은 인생 이자겸의 굴비淈非*, 쉽게 부서지는 비굴이 뒤집힌 짭짤하고 쫀득한 맛이다 모든 간의 배후에는 소금이 있다 짜고 쓴맛으로 끝난 첫사랑, 다음 사랑에 적당한 간을 맞춘다 싱거우면 위험하다 항아리 속 부글거림과 착한남자의 우유부단에 소금이 개입한다 ​ 외부자극에 반응하는 사람 몸속의 소금 싼 맛에 고용된 일용직근로자 늘 소금기에 절어있다 무거운 등짐에 흘린 소금의 흔적이 검은 옷에 하얀꽃을 피운다 ​ 염전이 문을 ..

좋은 시 2023.03.09

배추를 여니 나비 외/김일곤

배추를 여니 나비 외 김일곤 아내는 배추를 열어 노랑나비, 한마당 가득 날린다 나는 철없이 나비를 타고 놀다 샛노란 문양 노랑노랑 읽다가 고향집 마당가에서 치자 꽃물들이던 누이 생각하다가 어머니의 쪽진 가르맛길 달려도 보다가 문득 뚱딴지처럼 김장배추가 되고 싶은 거다 아니, 아삭아삭한 김치로 익고 싶다 싸락눈표 소금에 절여진 나는 채반에 다소곳 누워 순명을 고한다 설폿한 날개 밑에 양념이 입혀지고 소가 박힌다 항아리 안에 어긋 나긋 누워서 폭 익으려면 옴짝달싹하지 말라고 지그시 가슴에 누름돌을 올린다 갑갑하고 돌연 서럽기도 하였으나 꾹 참아내며 그냥 한데 섞여 가라앉고 부드러워지며 숙성되기 간절히 바란다 맵고 짠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함부로 설익지 않고 착 달라붙도록 갖은 양념에 폭 익은 나, 질항아리..

좋은 수필 2023.03.09

소금사막 / 신현락

소금사막 / 신현락 ​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3만 5천년의 시간은 화석이 모래로 전이하는 데 충분한 풍량이어서 학자들이 사막의 발원지를 추정하는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밤마다 모래가 바다에 빠져 죽은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3만 5천년 후, 그 자리는 소금사막의 발원지가 되었다 모래의 여자는 정갈한 소금으로 밥상을 차리고 바람을 기다린다 사막에서 바람을 많이 먹은 종들은 종종 변이를 일으키는데 그들이 사랑을 할 때는 서로의 입안에 소금을 조금씩 흘려보낸다 사랑을 구하기 위해서 남자들이 여자를 찾아오는 건 소금에 중독된 까닭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래의 동선을 보면 최초의 호모사피엔스가 여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바람의 혀는 감미롭게 모래의 능선을 애무하지만 모래의 여자는 모래만 낳을 뿐이어서 몇 만년 동안..

좋은 시 2023.03.08

오지요강 / 김애자

오지요강 / 김애자 턱 걸터앉는다. 엉덩이로 전해오는 느낌이 듬직하다. 불편하던 속을 시원하게 비우고 남은 한 방울까지 마무리할 때 떨리는 쾌감을 무엇에 비하랴. 세상 부러울 게 없이 편안하다. 해거름이 되면 장독대 구석에 엎드려 있던 요강단지들을 일으킨다. 깨끗이 단장시킨 놋요강은 조부모님 방으로 들인다. 번쩍거리는 황금빛의 기품과 우아함은 있으나 요강단지 들기도 힘겨운 노인들에겐 가벼워서 좋다. 부모님 방에는 순백의 바탕에 활짝 핀 모란당초나 아가리를 크게 벌린 호랑이가 그려진 사기요강이 들어간다. 호랑이의 강한 힘을 얻으려는 아버지의 바람과 도공의 혼이 더해져 포효하는 맹수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운치를 더한 모란꽃이 함박웃음을 짓는 그림은 넓은 치마폭에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는 어머니의 부적 같..

좋은 수필 2023.03.08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 ⑪ 두부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 ⑪ 두부 ▶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 ⑪ 두부 ​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는 시인의 시와 짧은 단상으로 이루어진다. 시를 쓰게 되는 지점, 또는 시를 써 나가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수상은 시를 감상하는데 색다른 묘미를 주리라 생각한다. 일상적 삶에서 건져 올리는 시적 성찰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만상의 자연과 사물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시의 몸 안으로 스며드는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다만, 시인의 글과 생각의 흐름에 따라 시가 먼저 또는 단상이 먼저 나올 수도 있다. 단상은 한 두 줄로 짧을 수도 있고 길수도 있다. - 뉴스부산 강경호 기자 - ​ ​ ​ ​ ​ ​ 지금 식탁 위에는 막걸리 한 ..

좋은 시 2023.03.08

소금벌레 / 박성우

소금벌레 / 박성우 ​ 소금을 파먹고 사는 벌레가 있다 ​ 머리에 흰털 수북한 벌레 한 마리가 염전 위를 기어간다 몸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염전 소금물을 일렁인다 ​ 소금이 모자랄 땐 제 눈물을 말려 먹는다는 소금벌레, 소금물에 고분고분 숨을 죽인 채 짧은 다리 분주하게 움직여 흩어진 소금을 쉬지 않고 끌어모은다 땀샘 밖으로 솟아오른 땀방울이 하얀 소금꽃 터트리며 마른다 ​ 소금밭이 아닌 길을 걸은 적 없다 일생 동안 소금만 갉아 먹다 생을 마감할 소금벌레 ​ 땡볕에 몸이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흥얼흥얼, 고무래로 소금을 긁어모으는 비금도 대산염전의 늙은 소금벌레여자, ​ 짠물에 절여진 세월이 쪼글쪼글하다 시와 소금 이영식 소금과 시, 참 많이도 닮았다. 바닷물의 결정체가 소금이듯 시는 언어..

좋은 시 2023.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