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당삼채 / 류현서

당삼채 / 류현서 짙은 햇살이 창가에 와서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을 하는 아침이다. 팔월 초의 날씨는 여름의 권위를 내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온 힘을 다해 적의를 뿜어댄다. 햇볕은 불덩이를 녹이는 것같이 이글거린다. 잡다한 일상을 접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주로 향했다. 여기에도 마치 하얀 불 파도가 출렁이는 것 같다. 박물관 입구부터 햇살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그늘을 찾아든다. 이런 것을 보면 자연이 천지 만물의 주인이고, 거기에 따르며 사는 사람들은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신라역사관으로 들어섰다. 소장된 문화재들이 많다. 그중에서 자그마한 항아리에 시선이 꽂혔다. 붉은색과 푸른색과 하얀색의 무늬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었다. 삼색이 어울리어 안정감을 준 무늬가 곱다. 경주에서 출토되었지만, ..

좋은 수필 2023.04.18

봄이 오고 있다/ 박시윤

봄이 오고 있다/ 박시윤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골목으로 고슬고슬한 봄볕이 쏟아진다. 해묵은 먼지를 말리듯 창문을 열고 볕을 집안으로 들인다. 뜻하지 않은 손님, 볕들이 들어서자 습한 생각을 마구 쏟아놓게 하던 집은 구석까지 환해진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늘 한자리에 웅크려 깊은 한숨과 고통, 그리고 무표정으로 삶을 살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무의미했고 느닷없는 외출로 가족들을 당황하게 했다. 늘 이불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오열하던 여자, 가슴을 후려치며 늘 아프다고만 하던 여자, 그 여자의 그림자가 설풋한 미소를 보이며 제일 먼저 일어선다. 나는 오랫동안의 동거동락을 이별하듯 무언의 미소를 건넨다. 그림자가 떠나간 자리를 오래토록 바라보며 그간, 그녀의 모습을 되짚어 본다. 그리고 넉넉..

좋은 수필 2023.04.17

껌/박시윤

껌 박시윤 참 오래토록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유년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지 않았다면 그의 존재를 잊고 살았을 것이다. 몇 백 원 하지 않는 가벼운 값어치만큼 있는 듯 없는 듯했다. 언제부터 자리하고 있었는지 기억에도 없는 껌은, 유통기한이 지나 먹을 수 없는 음식처럼 미련 없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곤 했다. 직장에서 상담역을 맡은 후로 온 종일 수없는 말을 쏟아 놓는다. 사람들을 대하는 일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오후가 되면 소금 한줌을 삼킨 듯 온 입 안이 텁텁하고 입술은 부르튼다. 누구와 무슨 소리를 주고받았는지 기억에도 없다. 아이처럼 궁금증의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람을 대하고 나면 온몸에 진이 빠져 꼼짝달싹도 하기 싫어진다. 며칠 전 손바닥을 턱에 괴고 멍하니 있을 때, 동료가 웃으며 ..

좋은 수필 2023.04.17

편지 / 백석

편지 / 백석 ( 서간문 형식으로 쓴 수필) 이 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닭이 울어서 귀신이 제 집으로 가고 육보름날이 오겠습니다. 이 좋은 밤에 시꺼먼 잠을 자면 하이얗게 눈썹이 센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육보름이면 엣사람의 인정 같은 고사리의 반가운 맛이 나를 울려도 좋듯이, 허연 영감 귀신의 호통 같은 이 무서운 말이 이 밤에 내 잠을 쫓아버려도 나는 좋습니다. 고요하니 즐거운 이 밤 초롱초롱 맑게 괸 수선화 한 폭을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노라니 그윽한 향기와 새파란 꿈이 안개 같이 오르고 또 노란 슬픔이 냇내 같이 오릅니다. 나는 이제 이 긴긴 밤을 당신께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남쪽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

좋은 수필 2023.04.16

풍경/ 조정은

풍경/ 조정은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다람쥐가 분주히 달려간다. 쪽빛 하늘과 홍조를 띠기 시작한 숲이 깊은 포옹을 하고 있다. 나무줄기가 수액을 빨아올리는 일을 그치자 잎은 곧 때를 알고 마지막으로 치장을 하는가 보다. 내가 지나쳐 온 가을을 되짚어 본다. 알밤이 떨어지는 밤나무 숲을 가시에 찔리면서 뛰어다니던 유년 시절, 가을걷이에 여념이 없으시던 노부모님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농사를 지어 볼까 꿈꾸던 일, 뜻하지 않게 서울로 올라 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단풍 든 산을 찾아 휴일마다 떠나던 이십대, 아이를 등에 업고 단풍잎을 주워 책갈피에 끼우던 신혼, 그리고 지난 몇 년은 휴일조차 없이 생업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렇게 한가롭게 산사로 오르는 길을 걸어 본 지가 얼마 만인가. 하늘도, 하얀 구..

좋은 수필 2023.04.16

고통도 잘 튀겨지면 맛있다/정채원

고통도 잘 튀겨지면 맛있다/정채원 극장 뒤 모퉁이에는 뻥튀기를 파는 내외가 있다 강냉이를 한 줌 튀김 통에 집어넣고 돌려 가며 볶는다 바람 매운 날에도 콧등이 땀에 맺히도록 한참 돌리고 나면 뻥! 소리 없이 튀겨지는 삶도있을까 그 내외는 빠른 손놀림으로 뻥튀기를 크고 작은 자루에 담아 죽 늘어 놓는다 알갱이가 찌그러진 것, 귀가 떨어져 나간 것, 때깔이 뽀얗지도 윤이 나지 않은 것들도 튀겨지고 나면 얼굴이 환해진다 모두 풍성해진다 불지옥을 한 번 겪고 나면 너 나 할 것 없이 삶이 몇 길씩 깊어져 있다 집으로 가면 늘 튀겨지지 않은 삶이 그들을 기다리건만 오늘도 쉬지 않고 튀겨대는 그 내외의 앞을 사람들이 지나간다 외마디 소리 지르던 기억들은 저마다 한 봉지씩 들고 극장으로 들어간다 화면에는 스릴 넘치는..

좋은 시 2023.04.16

망둥어 국/김규성

망둥어 국/김규성 여든 여덟 어머니가 끓여주신 망둥어 국을 먹는다 평소 간간하던 간이 영 싱겁다 짠 것은 내 혈압에 해롭다는 지나친 염려 탓이시다 그런데 아무래도 통 몸통이 보이지 않는다 살점은 손자들 다 주고 엊그제 큰아들 떠나 하나뿐인 아들에게 설마 뼈다귀만 일부러 골라 먹이실 턱은 없는데, 아! 가뜩이나 어두운 눈에 전기를 아끼느라고 컴컴한 부엌에서 급히 큰놈을 고르다보니 애먼 대가리만 눈에 밟히셨구나 기막힌 魚頭一味 골라 낸 것들을 다시 천천히 발라먹는다 눈물이 한 방을 뚝 떨어져 마침 간을 맞춰준다 ―졸시 '망둥어 국' 전문 아직 젊은 형이 가고 나서부터 어머니는 급격히 기력을 잃으셨다. 그 부럽던 총기도 눈에 띄게 흐려지셨다. 그 것은 내게 있어서 설움이나 안타까움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

좋은 시 2023.04.16

폭설/오탁번

폭설 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

좋은 시 2023.04.16

통한다는 말/ 손세실리아

통한다는 말/ 손세실리아 통한다는 말, 이 말처럼 사람을 단박에 기분 좋게 만드는 말도 드물지 두고두고 가슴 설레게 하는 말 또한 드물지 그 속엔 어디로든 막힘없이 들고 나는 자유로운 영혼과 흐르는 눈물 닦아주는 위로의 손길이 담겨있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도 통한다하고 물과 바람과 공기의 순환도 통한다하지 않던가 거기 깃든 순정한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사랑해야지 통한다는 말, 이 말처럼 늑골이 통째로 묵지근해지는 연민의 말도 드물지 갑갑한 수통 툭 터 모두를 살려내는 말 또한 드물지

좋은 시 2023.04.16

단 한 권의 生/고영서

단 한 권의 生/고영서 달 비친 沙窓에 한이 많아 꿈 속의 넋에게 자취를 나기게 한다면 문 앞의 들길이 반 쯤은 모래로 되었을라나* 해동조선국 승지 조원의 처 이옥봉은 온 몸에 시를 감고 죽은 여인 여염의 아낙이 되어 지아비 얼굴을 깍아내리는 일 따위, 시 따위 쓰지 않으리라 맹세 했다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는 천형을 앓다 산지기의 누명을 벗기는 시 한 수로 내쳐졌으니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를 떠돌다 겹겹의 종이로 떠올랐으니 하나 같이 빼어난 구절양장이 명나라 원로 대신의 서가에 그렇게도 소중히 꽂혀 있었던것 함부로 언어의 작두를 타다 뼈째 썰리는 고통으로 내림굿이 되는 시 씨김굿이 되는 시 * 이옥봉의 시

좋은 시 2023.04.16

조그만 절집을 찾아갔더니 / 김황흠

조그만 절집을 찾아갔더니 / 김황흠 부처님은 안 계시고 문턱 턱 베고 누운 누런 개가 심드렁히 코를 곯고 있네 텅 빈 놋그릇엔 햇빛만 마지못해 차 있고 먼 바람 소리는 풍경하고나 자처울며 노는데 그런 거 아닐까 삶은 무주공산의 저 문턱을 번질나게 넘으며 부처 대신 개가 핥고 난 가난의 놋그릇이나 훔치어보는 것 그 속에, 기울어가는 햇빛 몇 올로 갇히는 것

좋은 시 2023.04.16

가장 아픈 부위/송경동

가장 아픈 부위/송경동 허리가 아프다 어려서부터 어깨에 지게 된 시멘트 밀가루 포대 물엿 상자 질통 곰빵 산소통 LPG통 알곤통의 무게가 다 허리로 갔다 팔이 아프다 평택 대추리에서 전경들에게 목 졸리며 앓게 된 목디스크 증세다 용산 철거민 투쟁 쫓아다니다 교통사고로 재발했다 무릎이 아프다 여긴 복합골절이다 종일 쭈그려 하던 용접일 탓도 있지만 가두 시위하다 연행되는 과정에서 조인트를 까인 후부터다 하지만 정작 더 아픈 건 굳은 머리와 가슴이다 온몸에 덕지덕지 노동과 저항의 상처를 달고도 더 이상 세상의 외부를 꿈꾸지 않고 자꾸만 개량으로 타협으로 기우는 잔 머리 분노를 잃어버린 냉가슴이다

좋은 시 2023.04.16

화랑게에 대한 반가사유/김경윤

화랑게에 대한 반가사유/김경윤 어제는 평생을 갯가에 산 어머니가 안부 대신 화랑게젓을 한 보시 보내왔다 염천에 밥맛 잃은 나는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스슥 손톱만한 게를 씹다 문득 짭조름하고 달콤한 게젓 국물이 조선간장으로 우린 어머나의 눈물만 같아 먹던 밥숟갈을 내려놓고 우두커니 앉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어머나에게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런 따뜻한 말 한 번 해본 적 없었다 갯벌같이 질퍽이는 세상살이 열 발로 기어가며 알량한 자존심 땜에 체면이란 딱딱한 껍질을 벗지 못하고 그저 속살 없는 화랑게처럼 무심하게 살았을 뿐, 누군가를 위해 눈물 한 번 흘린 적도 없었으니 탈파하며 성장하는 게처럼 나도 이제 딱딱한 허물을 벗고 누군가를 위해 울고 싶구나 짭쪼름하고 달콤한 어머니의 화랑게젓처럼

좋은 시 2023.04.16

동지/신덕룡

동지/신덕룡 폭설이다. 하루종일 눈이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 지워졌다. 눈을 감아도 환한 저 길 끝 아랫목에서 굽은 허리를 지지실 어머니 뒤척일 때마다 풀풀, 시름이 날릴 테지만 어둑해질 무렵이면 그림자처럼 일어나 홀로 팥죽을 끓이실 게다. 숭얼숭얼 죽 끓는 소리 긴 겨울밤을 건너가는 주문이리라. 너무 낮고 아득해서 내 얇은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눈그늘처럼 흐릿해서 들여다볼 수 없다.

좋은 시 2023.04.16

하늘에도 정원이 있을까/김채영

하늘에도 정원이 있을까/김채영수필 봄비 치고는 대단한 폭우였다. 보랏빛으로 하늘이 쩍쩍 갈라질듯한 번개와 요란한 천둥이 치고 비바람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있는 남편의 면회를 마치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던 나는 상가건물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우산을 사들고 나오는데 빨간 에나멜 광택의 찻주전자가 불현듯 내 눈을 사로잡았다. 집에 찻주전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무슨 마음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허기가 밀려왔다. 가스 불에 달아오른 주전자는 휘익 하고 열기를 모아서, 이내 맑고 고운 음계로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서 삐삐주전자를 사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은 어느 새벽 피를 토하고 쓰려져서 응급실로 실려 갔고, 간경화라는 진단을 ..

좋은 수필 2023.04.15

◇ 칸나의 담장 / 김채영

◇ 칸나의 담장 / 김채영 ​ 길을 가다가 담 너머로 눈을 맞추려 애쓰는 칸나를 본다. 울안에 여러 꽃들과 함께 심겨졌으련만 칸나꽃은 뿌리만 울안에 담그고 무료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은근하게 곁눈질을 하고 있다. 터무니없이 새빨간 꽃잎을 보라. 영락없이 농염(濃艶)한 여인네의 입술이다. 칸나는 덩쿨 장미처럼 무모하게 담을 넘지는 않는다. 담장 위로 고개를 내밀어 의식너머의 세상을 은밀하게 넘보다 몰래한 사랑에 저리 꽃잎이 애처롭게 고운가 보다. 한동안 내 안에 합류하지 못한 체 수없이 반란을 일으키던 사랑니도 저러했을까. 한철 불꽃처럼 피어 담장 밖을 수없이 넘겨보다 동면하는 칸나처럼 내 잇몸에는 사랑니의 뿌리가 있다. ​ 지혜를 알만한 나이에 발육된다는 사랑니. 그러나 치아 중에 가장 늦게 나서 맨 먼..

좋은 수필 2023.04.15

산을 넘다/김채영

산을 넘다 김채영 낙조가 절정일 때면 서쪽으로 창문이 난 작은방까지 분홍빛으로 물들어 온다. 서녘 하늘가에 활짝 펼쳐진 연분홍 치맛자락. 아파트 유리창들도 이 시간이면 분홍 색유리로 변해 있고, 구름마저 붉은빛으로 동쪽 하늘까지 징검징검 이어져 있다. 그 위로 저녁 새들이 한 떼 후루루 --빠르게 날아 둥지로 향한다. 차를 타고 길을 떠날 때면 산은 늘 싱그러운 초록으로 달려오곤 했다. 그리고 가까운 산 뒤에 겹쳐지는 또 다른 산의 원경들이 중첩되어 보랏빛 혹은 청회색 빛으로 꾸물거리며 따라오곤 했다. 언제나 그렇게 내 인생은 산 너머에서 실타래 풀리 듯 산 끝에 매달려 내 안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산 너머에는 내가 사랑했던 추억 속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어릴 적 헤어진 소꿉친구도,..

좋은 수필 2023.04.15

망개 넝쿨 / 박시윤

망개 넝쿨 / 박시윤 산을 오른다. 산행에서 누군가를 젖혀 보겠다는 생각은 위험한 욕심이라며, 행여 그런 거라면 애초에 빠지라는 말에 발끈 오기가 치민다.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나를 중환자 취급하는 가족들의 태도가 사뭇 못마땅해 이를 악물고 따라나섰다. 누가 뭐래도 산행을 하기에 나의 체력은 충분했다. 남정네들은 일찌감치 걸음을 치고나갔다. 나를 걱정해서인지 큰아들 놈이 느린 내 보폭을 맞추며 동행한다. 무리였을까. 중턱까지도 못 가 주저앉고 말았다. 식은땀이 나고 산멀미가 치밀었다. 아찔한 현기증에 백안이 되어서야 못 이긴 척 바위에 몸을 기댔다. 아들놈이 산행을 멈추고 내려가자 성화지만 여기서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태 전, 암 진단과 더불어 몸의 한 곳을 도려내고 수시로 나타나는 익숙한 증상이..

좋은 수필 2023.04.10

2023년 <수필과 비평> 4월호 월평

작가로서의 자각 / 엄현옥 1. 쓰는 일의 장점은 어떤 일보다 자유롭다는 점이다. 자영업자라 할지라도 업무 시간은 지켜야 하지만, 작가는 원하는 시간에 쓰고 싶은 만큼만 쓰면 된다. 경제적인 욕심만 내려놓는다면 이만한 일도 없다. 작가는 작품을 쓸 때마다 새로운 도전을 한다. 글을 쓰는 한 도전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도 장점이다. 대부분의 일은 근무 연한이 있어 정년퇴직이 적용되지만 작가는 예외다. 한 번 해병이 영원한 해병이듯 작가는 영원한 작가다. 그러나 그 노릇도 쉽지만은 않다. 캐내지 못한 보물은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으로 모니터 앞에 앉지만, 내가 하려던 말은 이미 누군가가 해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렇다고 공산품을 생산하는 작업자처럼 무언가를 쉼 없이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굴복할 필요..

발표작 평론 2023.04.09

반 칸짜리 장롱 / 전유경

반 칸짜리 장롱 / 전유경 여기 김포로 이사올 때 근 10년을 써오던 장롱의 한 쪽을 떼서 버리고 왔다. 시집 올 때 해 온 혼수였는데 고운 손때가 묻어 정이 든 것이었다. 그렇다고 다 싣고 와서 안방에 두자니 커진 안방 크기에 비해 장롱이 작아서 벽면이 많이 드러나 보기 흉할 것 같았다. 궁리를 하다가 연한 분홍색이라서 아이들 방에 넣어 줘도 괜찮을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길이가 문제였다. 줄자로 이리저리 길이를 재보니 그 장롱 세트에서 반 칸짜리 하나만 떼어 내고 서랍장과 붙여 넣으면 그 방에 잘 맞는 한 세트의 가구가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몇 날을 고민하던 일은 반 칸짜리 하나를 버리기로 결정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사하던 날, 경비실 앞 폐가구 수집 장소에 그 반 칸짜리..

좋은 수필 2023.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