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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하늘에도 정원이 있을까/김채영

에세이향기 2023. 4. 15. 08:46

하늘에도 정원이 있을까/김채영수필

 

 

 

 

봄비 치고는 대단한 폭우였다. 보랏빛으로 하늘이 쩍쩍 갈라질듯한 번개와 요란한 천둥이 치고 비바람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있는 남편의 면회를 마치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던 나는 상가건물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우산을 사들고 나오는데 빨간 에나멜 광택의 찻주전자가 불현듯 내 눈을 사로잡았다. 집에 찻주전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무슨 마음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허기가 밀려왔다. 가스 불에 달아오른 주전자는 휘익 하고 열기를 모아서, 이내 맑고 고운 음계로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서 삐삐주전자를 사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은 어느 새벽 피를 토하고 쓰려져서 응급실로 실려 갔고, 간경화라는 진단을 받으면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일반 병실을 거쳐서 보름 후에 퇴원을 했다. 낯선 여자 간호조무사에게 대소변을 받아내게 한 것이 수치스러웠던 남편은 퇴원하는 즉시, 쓰고 남은 환자용 기저귀를 쓰레기통에 버렸었다. 병세가 눈에 띄게 회복하고 있어서 기저귀를 차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삼년 사이 그는 중환자실에 여러 차례 입원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중환자실에 실려 가면서 그는 벗어놓은 자신의 옷가지와 신발을 끌어안고 놓지를 않았다. 중환자실은 개인의 소지품을 들이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는데, 간호사들조차 필사적인 고집을 꺾지 못했다. 간성혼수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와중에도 그는 중환자실에서 반드시 살아 걸어 나가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중환자실 면회는 하루에 두 번이었다. 남편의 모든 장기가 손상되면서 합병증이 한꺼번에 왔고, 치사율 95% 간신증후군이라는 선고를 받게 되어 하루하루가 고비였다. 봄날을 인식하지 못한 채 겨울옷을 입고 다닐 만큼 나의 심신은 극한으로 피폐되어 있었다. 어떤 자극이 필요했다. 집에 돌아오면 도둑이 든 것처럼 어지럽혀져 있었고 모든 것을 털어간 것처럼 공허하기까지 했다.

찻주전자를 새로 구입한 뒤 습관처럼 물을 끓였다. 허브차도 마시고 밥이 넘어가지 않아서 컵라면으로 끼니도 챙겼다. 이상하게 휘파람 같은 물 끓는 소리에 힘이 났다. 쥐죽은 듯 조용한 집안에 무엇인가 존재감을 나타내면서 신호를 보내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닌가.

언젠가 지인에게 선물 받은 허브 차 세트는 다섯 종류였다. 그 말린꽃들을 밀봉된 채 그대로 서랍에 묵혀두었다가, 새로 장만한 주전자로 뜻하지 않게 호사를 누려보는 것이다. 순결무구한 꽃봉오리가 피기 전에 수확해서 말린 로즈버드에 뜨거운 물을 붓자 겹겹이 꼭꼭 봉인된 꽃잎을 수줍은 듯 살짝 열었다. 약간의 분홍빛이 돌뿐 꽃물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지만, 찻잔에 녹아있는 장미향이 싱그럽다. 그윽한 향기와 더불어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허브는 히비스커스였다. 시고 상큼한 맛이 특징인데, 정열적인 하와이 훌라 여인들이 옆머리에 꽂는다는 명성만큼이나 찻물 또한 한눈에 매료될 정도로 고운 빨간빛이다. 불면증과 신경 안정에 특효라는 라벤더 차는 주로 밤에 마셨다. 허브차를 마시면 물먹은 솜 같았던 고단한 몸이 한결 가벼워지곤 했다.

병원 가는 길은 걷는 데가 많아서 면회 시간 30분을 합하면 왕복 세 시간 이상이 걸렸다. 그는 때로 맑은 정신이었고 많은 시간은 간성혼수로 넋이 나가 있기도 했다. 고장 난 필라멘트로 전구가 힘겹게 깜빡이듯이 남편은 빛과 어둠 사이, 한쪽 발은 뜬구름 같은 희망 쪽에 내딛고 한쪽 발은 어둠의 심부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렇다면 병색이 완연한 그의 얼굴은 흑화현상이던가. 한날 면회를 갔을 때 남편은 겁에 질려 있었다.

“여긴 중환자실이라서 하루에도 두세 명씩 죽어나가고 있어. 약 기운으로 잠이 들었다가 울음소리에 눈을 떠보면 옆에 있는 사람이 하얀 시트에 덮여서 죽어나가곤 하지. 난 너무 무서워.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남편은 다음날부터 열흘 넘게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남편은 봄꽃이 난만한 지난 사월에 세상을 떠났다. 급류에 휩쓸리는 사람처럼 야윈 두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영원한 침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육신을 빠져나온 그가 세상 밖으로 떠밀려날 때 어어, 휘청거리면서 당혹스러워했을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 그 상황에서도 나는 기계적으로 찻물을 끓였고, 눈물처럼 허브차를 목안으로 삼켰다. 수많은 꽃들이 내 안에서 진한 향내를 풍기며 슬픔으로 출렁대고 있었다. 그가 생전 입고 쓰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찻물을 끓였다. 레몬그라스를 마실 참이다. 레몬그라스는 레몬향이 나는 억세 비슷한 풀이다. 그러니까 오이 풀에서 오이 냄새가 나듯 레몬그라스에는 레몬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찻물이 끓을 시간을 넘겼는데 삐삐주전자는 기척이 없었다. 불티 하나가 가스 불에서 찰나적으로 반짝이다가, 갑자기 붉은 불길로 주전자를 덮어버린 것은 눈 깜짝할 새였다. 불티는 코팅된 주전자를 호르르 한 겹 벗겨냈고, 짧은 순간 가스레인지 위에 새털 같은 부피의 재로 떨어져 내렸다. 그제서 주전자에 물을 붓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하게 가스 불을 껐다. 울림기능의 주둥이는 녹아 있었다. 주전자의 표면은 얼룩덜룩 불에 그슬린 채 어두운 색채로 변했다. 핏기라고는 하나 없이 검버섯이 핀 남편의 마지막 모습 같았다.

불에 탄 주전자를 철수세미로 닦고 또 닦았다. 주전자의 외양이 초라해도 상관없었다. 소리가 나지 않으면 어떠랴. 나는 담당의사에게 장례를 준비하라는 최후의 통보를 받고도 환자용품을 욕심껏 사모아서 간호사에게 맡겨 놓았었다. 망가진 모습으로라도 버티어주길 바랬고, 맡겨놓은 환자용품을 다 쓸 때까지만 그가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다시 찻물을 끓이기 위해 가스 불을 켰다. 조금 달아오른 주전자는 갑자기 맑은 물을 왈칵 쏟아냈다. 불에 탈 때 납땜한 바닥의 이음새가 녹아 버린듯했다. 빨간 주전자는 순간의 실수로 끝을 보게 되었다. 남편도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빛나는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꿈에서라도 남편을 만나면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찌하여 가족들에게 유언 한마디 없이 떠날 수가 있었을까. 사랑한다고, 미안했다고 ,잘 살아달라고 . 그 정도는 말해줬어야 했다. 행여 하고 병상에서 쓰던 노트를 뒤적였지만, 전화번호까지 바꾸고 잠적한 남자와 관련된 채무보증 내역과 여기저기서 받아야 할 돈의 액수들이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허물어진 가정을 행복한 시절로 복원할 꿈을 내려놓지 않은 채 눈을 감은 것이다. 나는 못 하나 박을 줄도 모르는데, 무거운 짐도 들지 못하고, 전등 조차 갈지 못하는데 ···. 그 먼 길을 떠나면서 걱정도 되지 않았나.

주전자가 남은 물을 푹 쏟아내고 있다. 말문을 앞서 닫아버린 남편이 임종 시 눈가에 흘렸던 눈물처럼. 나는 비닐 장판에 떨어진 몇 방울의 눈물을 한쪽발로 급히 쓱쓱 닦아내며 입을 앙다물었다.

그날 그 찻주전자를 남편의 물건들과 함께 문밖으로 내놓았다. 살아생전 꽃 가꾸기를 좋아하던 남편은 그새 하늘의 정원에서 허브를 키우고 있었을까. 아마도 그에게는 소리가 맑은 찻주전자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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