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우리집 상어이야기 /박청자

우리집 상어이야기 /박청자 상어를 두고 '시카고의 갱'이라 한다. 검은 등과 흰 뱃살, 날카로운 이빨과 지느러미. 세련된 몸매로 거친 파도를 가르며 내 세상인양 종횡무진 유영하는 모습은 가히 바다의 갱이라 불릴 만하다. '영천 장 돔배기'라는 상어를 처음 본 것은 시집을 와서다. 시댁의 곳간에는 시래기 등 말린 채소들을 걸어두는 바람벽이 있었다. 돔배기는 새끼줄에 꿰인 채 그 곳 한 편에 매달려 있었다. 독 간으로 딱딱해 진 베개뭉치 같은 것을 본 순간, 맛보다는 생선의 외양이 더 궁금했다. 살덩어리일 뿐, 머리도 꼬리도 뼈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푸줏간 주인이 쇠고기를 빗 듯 저며 와 쌀뜨물에 담근다. 그리곤 밥이 뜸들 때 함께 넣어 찐다. 지금도 생각하지만 어르신의 밥반찬으로 그만한 것이 또 있을까 싶..

좋은 수필 2023.04.09

쌈 / 김종희

쌈 / 김종희 어쩌다 가는 뷔페식당은 참으로 거북한 곳이다. 그릇을 들고 먹을 것을 찾으러 가는 모양도 그렇지만 더 먹으려고 다시 음식을 가지러 가는 것이 편치가 않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녀적에는 양식당에 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마치 뜻 모를 팝송 한두 개쯤 따라 부르는 것처럼. 세월 따라 식성도 바뀌고 습관도 바뀌었다. 이제는 온돌방에 눌러앉아 질펀하게 먹는 맛이 더 좋다. 뚝배기에 숟가락을 담아가며 먹는 맛이 더 좋다. 이것저것 섞으면 비빔밥이요, 요것저것을 얹어 먹으면 쌈밤이니 한 가지를 주문하고서도 덤으로 두 가지를 먹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음식이다. 주문을 받는 사람 앞에서 수프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나, 밥을 먹을지 빵을 먹을지 선택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 더 좋다...

좋은 수필 2023.04.09

매미의 껍데기/임병숙

매미의 껍데기/임병숙 뒤뜰의 감나무에서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곳은 그늘이 좋아서인지 둥치가 든든해서인지 여름만 되면 녀석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울음소리가 감나무 잎을 흔들었다. 심술궂은 햇빛과 잔인한 바람도 막아주는 매미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풀죽은 나뭇잎처럼 무더위에 지친 심신으로 청량제처럼 스며든다.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들리던 자리에 매미의 껍데기가 매달려 있다. 불필요해서 알맹이만 쏙 빠져나간 것일까. 박제처럼 매달려 있는 껍데기를 살짝 만져 보았다.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녀석의 생김새를 쉽게 유추해 낼 수 있는 모습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애절한 울음이 고막을 울린다. 심신을 적셔주던 울음소리는 울음이 아니라 신음이었을까. 해탈하며 입가로 새어 나왔을 비명이..

좋은 수필 2023.04.09

옥당목 / 장규섭

옥당목 / 장규섭 신기한 일이다. 날마다 보는 이부자리인데도 옥당목 요 호청이 시선을 끈다. 보기에는 단조로운 흰빛이지만 약간 거칠듯 한 바탕이 석새삼베같이 성글게 보인다. 모양새와는 달리 가만히 어루만져보면 유난히 촉감이 부드럽다는 느낌이 와 닿는다. 깨끗이 꾸며놓은 요 호청이라 그런지 더욱 반지르르하고 여름 내내 비가와도 전혀 눅눅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 뿐이랴 우리의 체온에 맞게 온기를 조절해 주어 요즘 나오는 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오묘함마저 지니고 있는 듯하다. 씻을 때마다 꾸밈의 번거로움이 따르긴 해도 그것을 능히 에끼며 사용할 충분한 가치를 지녔기에 기꺼이 마다않고 옥당목을 꾸미는 감촉에 매료된다. 마치 편리한 생활을 거부하는 속성이라도 지닌듯 요즘 고급 천으로 미화된 침구류보다 옥당목 요 ..

좋은 수필 2023.04.09

난(蘭), 나다 / 서찬임

말이 없는 것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지독한 인내다. 난초는 말이 없다. 나도 말이 없다. 특히 난초는 더 그렇다. 누군가 난초는 게으른 사람이 키워도 될 만큼 보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솔깃하여 난초를 들여놓았다. 그런데 난초는 말 없음 속에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시름시름 말라 갔다. 반항 같은 것이었다. 지극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처음엔 내 게으름에 화가 났고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내 무신경이 나를 질책했다. 그 즈음이었다. 흙 사이에서 보일 듯 말 듯 삐죽이 내미는 것이 있었다. '꽃대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하마터면 흙과 난을 신문지로 싸서 통째로 버릴 뻔 했다. 하찮은 식물이지만 자신이 버려진다는 것을 눈치 챘을까. 나는 내 마음에서 벗어난 것은 빨리 정리하는 편이다. ..

좋은 수필 2023.04.09

집 / 조일희

집 / 조일희 양지바른 구릉이 시끌시끌하다. 이장하는 인부들이 평평한 곳을 찾아 손에 든 종이를 내려놓는다. 세월에 풍화된 육신은 제자리로 돌아간 지 오래고, 회백색 시간이 담긴 뼛조각만 백지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바닥에 유골을 길게 늘여 놓으니 사뭇 사람의 형체처럼 보인다. 육탈한 모습 위로 생전의 아버지가 겹쳐 보여 일순 마음이 숙연해진다. 몇 해 전, 친정엄마 생신날이었다. 상을 물린 후 엄마는 "흩어져 있는 묘를 한곳에 모아놓고 죽어야 편히 죽을 수 있겠다"며 이장에 대해 넌지시 운을 뗐다. 밭 한 뙈기 없는 빈한한 집으로 시집왔으니 어디 제대로 된 선산이나 있었겠는가. 궂은일이 생길 때마다 동으로 서로 제각각 모셨을 수밖에. 자식들은 유골을 화장해 가까운 납골당에 모시자고 입을 모았지만 엄마..

좋은 수필 2023.04.09

노천 박물관, 장연사지/변재영

변재영 '노천 박물관, 장연사지'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는 곳 이 절터다.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 같이 산다.’는 명시 한 구절을 곱씹으며 오늘도 길을 나선다. 물길이 비단결같이 곱다는 청도 금천(錦川)의 장연사지를 찾았다. 온화한 부처의 미소가 그리웠을까. 개망초 무리들의 탑돌이가 한창인 절터에는 소녀의 젖꼭지 같은 감또개가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넉넉했던 절터는 천맥으로 내주고 한 뼘 땅에 몸을 부비고 있는 쌍탑의 처지가 딱했다. 금당을 지켜내지 못한 회한 때문일까. 두 탑은 멀리 흘러가는 동창천만 무심히 바라볼 뿐 말이 없다. 태고를 향해 눈물짓는 망부석 같기도 하여 탑돌이 하는 내 마음이 짠해진다.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올린 육화산의 산정기가 흘러내려 살포시 품은 장연사지는 모든 ..

좋은 수필 2023.04.08

장미에게 들인 시간 /유병숙

장미에게 들인 시간 유병숙 점심때 온다던 아들네가 늦을 것 같단다. 프리랜서인 아들은 작업 시간이 늘 들쑥날쑥하다. 급히 보내주어야 할 뮤직비디오 편집이 이제 막바지란다. 결혼 전에도 밥 한 끼 같이 먹기 힘들더니 장가가서도 신혼 살림집이 지척이건만 또 그 모양이다.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남편은 에그 녀석 하더니 TV를 켠다. 툴툴거리지만 아들 기다리기 프로젝트(?)에는 이미 이골이 났다. 음식 차리던 손길을 멈추고 식탁에 앉아 읽다가 접어놓은 를 펼쳤다. 이즈음 친구들이 어린 왕자를 같이 읽자고 했다. 이 나이에 어린 왕자라니! 했는데 한번 손에 잡으니 놓을 수가 없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마침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나는 대목을 읽을 차례였다. “길들인다는 게 뭐야?”..

좋은 수필 2023.04.08

진눈깨비 내리던 날/이미경

진눈깨비 내리던 날 이미경 아침부터 흐린 날은 오후가 되자 진눈깨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위를 달리고 있는 시외버스 안은 가끔씩 하품을 하거나 졸고 있는 촌부 몇 사람뿐이었다. 사내가 버스에 오른 것은 공단을 막 벗어날 때였다. 모자를 눌러쓴 사내는 차비가 조금 모자랄 거라는 말을 하며 태연하게 차에 올랐다. 부족한 차비를 들고서도 미안해하거나 굽실거리는 표정은 없었다. 어깨에 연장 가방을 멘 사내의 몸은 다부져 보였다. 사내는 맞은편 자리에 구겨지듯 주저앉더니 차가 왜 이리 느리냐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흐르는 음악이 좋다고 하다가 방송의 멘트에 불만을 표현하며 한참을 떠들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차가 느리다며 소리를 질렀다. 차창의 진눈깨비가 눈물처럼 주룩룩 흘러내린다.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

좋은 수필 2023.04.08

단아한 슬픔/김진순

단아한 슬픔 김진순 해를 몰아내고 창 밖에 어둠이 서성일 때마다 기다려진다. 옷깃에 바람을 풍성하게 달고 와 줄 것만 같아서 두근거린다. 펄럭이는 푸른 잎처럼 활기차게 너는 그렇게 나에게 온다. 대지로부터 전해오는 발걸음 소리는 이미 현관에 닿아 있고, 무심히 벗어놓은 신발은 왜 이토록 애잔한가. 복숭아 빛깔처럼 고운 미소와 허기에 찬 손놀림을 영광스런 훈장을 보듬듯이 밀도 있게 바라보고 싶다. 온전한 삶이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일상이 명백하게 유지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상실을 통해 알았다. 이별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왔다. 2012년 3월 아들은 교통사고로 인해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될 부재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54개월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아들은..

좋은 수필 2023.04.07

순천만 갈대 /김원순

순천만 갈대 /김원순 순천만에서 비로소 갈대다운 갈대를 만났다. 살면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갈대다. 갈대도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일까. 바람의 등에 업혀서 내게로 쓰러져 눕는다. 을숙도 갈대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저무는 해무海霧 사이로 노을에 타는 금빛 울음을 순천만 가슴에 서리서리 풀어놓는다. 이 곳에 둥지를 틀고 살아온 갈대의 사연을 바람이 넌지시 전해 주고 간다. 뭍이 아닌 물속에 발을 담근 채 살아가는 갈대 줄기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절망 하나에 갈대 하나, 체념 둘에 갈대 둘, 그렇게 식구를 늘리며 휘파람 소리로 외로움을 달랬을 것 같다. 바람에 몸을 맡긴 갈대들은 어느새 바람이 되고, 갈대밭을 지나가는 바람도 모두 갈대가 된다. 늘 흔들리면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의연하고도 비장한..

좋은 수필 2023.04.07

늙은 펭귄의 날갯짓 / 윤태봉

늙은 펭귄의 날갯짓 / 윤태봉 시속 20㎞의 강풍이 부는 영하 60도 극한의 땅 남극, 포식자와 추위로부터 새끼를 지키려는 수컷 황제펭귄의 부성은 65일 동안 눈만 먹으며 서서 자는 고행도 마다치 않는다. 몸무게가 반으로 주는 고통 속에서도 제 위를 게워 새끼에게 펭귄 밀크를 먹이는 희생은 감히 사람도 흉내 내기 힘든 숭고함이다. 눈보라로 한 치 앞이 구분키 어려운 혹한에서의 사투, 그것은 품은 새끼를 지키기 위해 –조심스레 뒤뚱거리며-수천의 수컷 펭귄들이 서로의 체온을 안팎으로 바꾸는 허들 링에서 최고의 정점을 찍는다. 차마 눈물겹기까지 하다. 누가 펭귄을 한낱 말 못 하는 동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짐승도 저러한데 권위적이며 표현이 적다고 누가 내 아버지의 사랑이 모성애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

좋은 수필 2023.04.07

그냥’이라는 말은 / 김영수

그냥’이라는 말은 / 김영수 ​ ​ ​전화를 받으니 친정엄마였다. “여보세요”가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그냥 걸었다. 잘들 있지?”하고 증손주 소식부터 물으며 거긴 지금 잘 시간이겠구나, 했다. ​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를 한 건 아닌지 엄마 목소리로 가늠하며 시계를 보았다. 밤 열두 시 반이니 엄마 계신 곳은 낮 한 시 반. ​ 점심식사를 궁금해 하는 딸에게 엄마는 여전히, “그냥 걸었대도...” 하며 딸의 잠을 방해할까봐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 혼자 살다보니 어떤 날은 종일 입 한번 뗄 일 없이 하루가 지나더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멀리 사는 효자보다 가까이 사는 불효자식이 낫다는 말이 괜히 있을까. 엄마는 말 상대가 그리운 거였다. ​ 거긴 밤일 텐데 이제 자야지 자야지, 하면..

좋은 수필 2023.04.06

7월을 닮은 남자/김유정

7월을 닮은 남자 김유정 천막 안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달, 사슴이 뿔을 가는 달, 또는 들소가 울부짖는 달 ㅡ 인디언이 부르는 7월의 다른 이름들이다. 1년을 반으로 접어 나머지 절반을 새로 시작하는 7월은 살아 있는 그 어떤 것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초록은 보다 원숙해지고 열매는 더욱 단단해지며, 곤충이나 동물은 부지런히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고 허물을 벗는다. 1년 중 생명력이 절정을 이루는 시간, 바로 7월이다. 지하철이 답답한 터널을 빠져 나오자 오후의 햇빛이 객차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꾸벅거리며 조는 사람들 머리 위에도 햇빛이 머문다. 나는 눈이 부셔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사람들 물결에 밀려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사이 내 몸을 지탱하는 발은 굽 높은 구두 속에서 조여들고 있었다. 힐..

좋은 수필 2023.04.04

인간수리공/주인석

인간 수리공 주인석 두 대 정도 세게 때리고 나니 손이 얼얼하다. 전에는 한 대만 때려도 금방 말을 듣던 것이, 요즘은 몇 대를 때려도 꿈쩍 않아 갖다 버릴까 고민 중이다. 저러다가 멀쩡할 때도 있으니 버리기도 그렇다. 평소 말이나 못하면 밉기나 덜하지. 한 번 말이 터지면 청산유수라, 나는 도대체 따라갈 재간이 없다. 지금 입 닫고 있다고 버릴 수도 없고, 안 버리자니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다. 2년 전에 산 카세트가 벌써 며칠째 속을 썩인다. 테이프를 넣으면 씹어서 뱉어 내기 일쑤고, 어째 달래 놓으면 찡찡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은 묵묵부답이다. 혹시 먼지가 끼어 그러나 싶어 드라이기 바람을 갖다 대기도 하고, 면봉으로 살살 닦기도 하고, 뻑뻑해 그런가 싶어 기름칠을 해 봐도 여전하다. 요즘 것들은..

좋은 수필 2023.04.04

4막 53장, 연극은 끝나고/문경희

4막 53장, 연극은 끝나고 문경희 시원섭섭하다. ‘미끄덩’ 오래 전 한생명이 내 안을 박차고 나가던 순간, 아릿하게 전신을 꿰던 야릇한 상실감 같다 할까. 기쁨이다가, 두려움이다가, 안도였다가, 근심이었다가, 그 모두가 어우러진 우울이었다가, 다시 날아갈 듯 홀가분함이었다가……. 자지러지는 울음으로 세상에 첫 신고식을 치르는 핏덩이를 받아 들었을 때처럼 종잡을 수 없는 기류가 나를 휘몰아친다. 급작스레 만져지는 내 안의 동공을 쓸어내리며 훗배처럼 나를 앓던 먼 그날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왜일까. 요 며칠 습관처럼 오래된 샹송, ‘기차는 떠나고’를 거푸 찾아 듣는다. 이별의 애절함보다는 엘렌느라는 여가수의 허스키한 비음이 기억에 남던 곡이다. 경쾌한 음률을 따라 흥얼거리다 보면 그를 보낸 허허함도 다소는..

좋은 수필 2023.04.04

당김 줄 / 배단영

당김 줄 / 배단영 남산 자락 삼릉에 가면 나무들이 당김 줄로 버티고 있다. 휘어진 채 밑으로 쓰러지려는 나무들을 잡아당기며 같이 견뎌보자는 모습이다. 당김 줄을 보면서 진료를 받기위해 찾아온 부부를 떠 올렸다. 언젠가, 같이 시각 장애를 가진 부부가 진료를 받으러 온 적이 있었다. 풀잎 같은 여자가 더듬거리며 문을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누구라도 당황해서 홍당무처럼 붉어질 정도로 무안하게 만드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달팽이처럼 천천히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접수를 했다. 접수를 하면서 남자의 상태가 어떤지 무엇이 필요한지 소상하게 설명까지 했다. 곧이어 그녀의 시선은 뒤따라 들어온 남자를 찾았다. 적당한 자리에 앉힌 다음에야 그녀는 접수를 했다는..

좋은 수필 2023.04.04

북소리 / 문육자

북소리 / 문육자 북소리가 날아오른다. 길 없는 하늘에 길을 만든다. 소망을 매단 소리다. 가끔은 가슴을 멍들게 하고는 매몰차게 뿌리치고 휭하니 가는 연인의 뒷모습 같다. 북은 비어 있어야 우람한 소리를 낸다. 맞아야 울음을 운다. 그 소리가 어떤 색깔을 가지든 그들은 운다. 고모는 사흘 낮밤을 할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았다. 북이 아닌 고모는 북처럼 맞았다. 신이 내렸다고 했고 할아버진 집안 망신에 남세스러워 바깥에도 나갈 수 없다고 같이 목매달자고 추운 겨울인데도 홑적삼에 무명치마 입은 고모를 한을 담아 힘껏 때렸다. 오히려 고모부는 데면데면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역부족이었고 그 시린 겨울의 서리 내린 마당에서 버선발의 고모는 대를 잡았다. 신이 내렸다고 했다. 얼굴은 번질거렸고 정신없이 흔드는 대나무..

좋은 수필 2023.04.01

문간방 사람 /손광성

문간방 사람 /손광성 문간방에 사는 사람은 언제나 불안하다. 문간방 저쪽은 바로 한길이기 때문이다. 문간방에 사는 사람은 언제나 불면으로 괴로워한다. 밤에는 골목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일찍 잠들 수 없고, 아침에는 두부장수의 요령소리에 잠을 설친다. 그러다가 우유배달부의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에 그 빈약한 잠에서마저 결국 깨고 만다. 사람이면 누구나 참을성이 있어야겠지만 문간방에 사는 사람은 더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골목에서 들리는 여인네들의 수다 떠는 소리도 참아야 하고, 마을 아이들의 소란과 아우성도 참아야한다. 설사 야구공이 창문을 부수고 날아드는 이변이 생긴다 해도 참고 견딜 줄 알아야 한다. 대학시절이었다. 친구와 함께 제기동 어떤 집 문간방에서 자취를 했는데, 벽을 사이에 둔 저쪽..

좋은 수필 2023.03.31

태풍 속에서/최금진

태풍 속에서 최금진 폭우가 쏟아진다 하늘에선 거대한 소용돌이가 다이얼을 돌린다 사내는 구인광고지처럼 저녁의 끄트머리에 서서 펄럭인다 우산대가 꺾인 사람들은 황망히 고개를 숙인다 손바닥 위엔 모종처럼 돋은 푸른 메모지 한장 사내는 있는 힘껏 비를 가리며 전화를 건다 동사무소 꼭대기엔 뭉툭 잘려진 입 하나, 커다란 스피커가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낸 듯 안내방송한다. 모두들 일찍 귀가하시압! 아, 그렇습니까......네, 네, 사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버려진 수화기처럼 웅크리고 돌아선다 손에서 구겨진 메모지가 무섭게 바닥에 달라붙는다 먹구름이 하늘을 두껍게 풀칠해놓고 사내의 이력서 위에 새로운 어둠을 발라놓는다 상가에 켜진 TV들은 눈을 깜빡이며 간단명료하게 이 저녁의 풍경을 정의한다 태풍북상, 그러니 모든..

좋은 시 2023.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