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의 꿈/정문숙
검은 실루엣을 벗어내며 희붐하게 다가앉는 새벽 바다다. 정박한 어선의 불빛에 반사되어 비늘 같은 물결이 반짝인다. 파도가 달려오다 일순간 사라지고 또 떼 지어 몰려오다 발아래에서 잦아든다.
파도의 여음을 들으며 해안선을 따라 몇 걸음 옮기니 과메기 덕장이 나온다. 바다에 발목 잡히고 눈이 꿰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오도카니 서있는 과메기들이 줄지어 있다.
마른 밥을 삼킨 듯 목이 메거나 힘에 부치는 일로 가슴이 답답해질 때에는 과메기 덕장을 찾곤 한다. 그들에게도 넓은 바다를 꿈꾸며 수심 깊은 곳으로 나아가던 때가 있었을 게다. 그들에게서 박제된 나의 꿈을 읽는다.
눈빛마저 푸르던 한 마리 청어의 꿈이 아련하다. 문득 심청색의 유선형 몸체를 흔들며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던 청어처럼 바다에 들고 싶다. 신발을 벗어 두고 바다로 향한다. 차가운 바닷물이 발끝을 적시니 잠시 잊었던 지난 일들이 떠올라 한동안 생각에 잠긴다.
이십대에 세상이라는 바다의 한가운데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교사가 되어 후진을 양성하겠다던 꿈을 안고 직장을 다니며 시험을 준비하던 때였다. 푸른 청사진을 그려 보이며 구애를 펼치던 그의 말에 솔깃 넘어가 결혼이라는 한 배를 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꺼이 그에게 허리를 꿰인 셈이다. 고백컨대, 어쩌면 그가 나의 꿈에 날개를 달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는 아니었다.
그는 선장이 되고 나는 그의 신호에 맞춰 동분서주하며 푸른 바다를 항해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로운 항해를 하며 행복을 만끽할 때도 있었지만 사는 일은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처럼 긴 여정이라 예기치 못한 난관을 맞닥뜨리곤 했다. 폭풍우를 만나기도 했고 미처 보지 못했던 암초에 부딪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나의 결혼생활은 꿈꾸었던 것과 달리 하루치의 고비를 넘기면 또 하루치의 파도가 휘몰아쳐 헤쳐 나가기에 급급하여 팍팍하기 짝이 없는 시간들이었다.
크고 작은 파도를 넘나들며 제법 항해에 자신이 붙을 즈음, 비로소 큰 파고의 능선을 넘어섰다 싶어서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니 잊고 있던 소중한 무언가가 생각났다. 결혼과 동시에 가슴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아니 여건이 허락지 않았기에 꺼내어 볼 수도 없었던 나의 꿈이었다. 존재조차 낯설어 얼른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모른 척 외면했지만 그럴수록 꿈은 더욱 간절해졌다.
중단했던 공부를 시작하고 싶다는 나의 말은 남편에게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했던 것일까. 남편은 우리 형편에 무슨 꿈 타령이냐, 밥만 먹고 살면 되지 라는 말을 무심결에 툭 던졌다. 그런 남편이 야속했다. 내심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제 당신하고 싶은 공부 하면서 살아봐.’ 라는 말을 기대했었다. 섭섭함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에는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감의 늪에 빠져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지난해에는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정신에 한기가 들어 안으로 나만의 대문을 닫아걸었다. 일의 전말보다 받아들이는 스스로의 감정이 당혹스러워 낯선 감정들과 싸우며 보낸 셈이다. 멍하니 앉아 하늘만 쳐다보기도 했고 이웃들과 가벼운 만남도 하지 않았다.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린 채 말문을 닫고 혼자서 눈물 흘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병원에서는 갱년기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보다 못한 지인이 유명한 사찰로 나를 데려갔다. 하소연을 들은 후 스님은 다짜고짜 ‘묵혀두세요’라는 말로 화두를 던졌다. 노란 메주콩이 시커먼 간장이 되고 곰삭은 된장이 되는 이치를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묵혀두다 보면 콩이라는 본질은 없어지고 간장이라는 새로운 성질의 물질을 만들어 내고, 또 오래 묵힐수록 더 깊은 맛을 내지 않느냐며 나를 다독였다.
당장 힘든 시간을 어떻게 풀어야할지 몰라서 답답하기만 한데 묵혀두라니. 묵혀둔다는 것은 단순한 정지라고만 생각했기에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스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꽤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남편의 실뚱머룩한 반응에 대한 나의 섭섭함을 마음 한 귀퉁이에 밀쳐두기로 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설익은 감정은 여물고 더욱 성숙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니 정진 하라는 스님의 말씀을 되뇌곤 했다.
외려, 어둠이 짙으면 의식은 더 또렷해지는 걸까. 낯선 감정에 발목 잡히고 남편에 대한 서운함으로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꿈에 대한 열망은 깃대를 흔들며 까무룩 잦아들던 의기를 곧추 세워주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남편에 대한 감정을 묵히는 도구로서 주머니 속에 숨겨두었던 꿈을 끄집어냈는지도 모른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꿈을 확인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휴직 중이던 직장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고 시간 날 때마다 밀쳐두었던 책을 펼쳐들었다. 퇴근 후에는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돌려 세웠다. 그러는 사이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나는 당당히 합격증을 받아 들었다. 낯선 감정도 숙성이 되었는지 지금이야말로 세상사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 지천명의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싶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지 싶은데 어느새 수평선에서 길게 뻗어 나온 햇살이 발끝을 간질인다. 모래사장으로 나와 엉덩이를 깔고 앉으니 종아리를 쓰다듬고 움츠린 어깨를 감싸 안으며 토닥이는 듯하다. 가슴을 펴고 태양의 기운을 들이 마시니 심장이 데워지는지 가슴께가 부풀어 오르며 뻐근해진다.
진홍색 휘장을 드리우며 해가 물 위로 오른다. 젖은 햇살을 털어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찬란한 바다의 끝에서 꿈마저 푸르러 탱탱하던 청어는 간데없고 꼬들꼬들 물기 빠진 또 한 마리의 과메기가 서있다. 삶이라는 휘몰아치는 바람에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 보니 푸석거리고 기름기 빠진 모습이 영락없는듯하여 슬며시 웃음이 난다.
청어도 햇살에 빗장을 풀고 물을 뚝뚝 떨구고 있다. 해풍에 얼고 녹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청어과메기라는 견장을 달기 위해 제 몸을 담금질하는 숙성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푸르던 몸체는 거무죽죽하니 익어있고 결기에 찬 정신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 꼿꼿한 부동의 자세다.
젊은 시절 꾸었던 꿈이 꼭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가슴에 품고 이루고자 노력할 때 온전한 빛을 발하는 것이 진정한 꿈이리라. 아침바다, 과메기 덕장에서 청어의 꿈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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