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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닮은 과일 복숭아/ 허은규

에세이향기 2022. 10. 5. 03:50

꿈을 닮은 과일 복숭아/ 허은규 


 복스럽다고 항간에서 지칭하는 것들은 다 복숭아를 닮았다. 복스럽게 살이 올라 꼬리를 연방 좌우로 흔드는 백구 강아지, 크림빵을 한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볼이 빵빵한 꼬마아이, 남편에게 내조 잘하고 시부모님께 순종하며 손끝이 야무진, 밥 붙은 통통한 얼굴을 한 며늘아기 등 탐스럽고 토실토실한 것들은 죄다 복숭아를 닮았다. 다른 과일보다도 유독 복숭아와 이들이 비견되는 건 복숭아의 유순한 맛, 복숭아의 몰캉한 질감, 복숭아의 묵직한 크기, 복숭아의 완만한 맵시, 복숭아의 보드란 피부 때문일 것이다.
 복숭아의 유독 눈에 띄는 특징은 과실의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길게 세로로 그어진 금이다. 일설에는 이 길게 그어진 금을 국부에 빗대기도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그것은 시야 닫히고 인적 끊긴 심산유곡의 은밀함을 닮았다. 세종의 셋째아들이 꿈에 취해 친우 최항, 신숙주와 더불어 유람한,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 빽빽한 도원동의 절경이 그 선 속에 얼비친다. 선기 어린 계곡에는 때론 아침놀이 수줍게 피었다가 때로는 흐드러지는 저녁놀이 처억하고 걸치어선 시나브로 번지고, 어느 때엔 복숭아의 살냄새 같은 안개가 피었다가 사라진다.

 복숭아는 희한하게도 꿈과 닮은 과일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자면서 꾸는 꿈이란 아련하고 희미하며, 그립고 애틋하기 마련이다. 현실에서 가지지 못한 채 간절히 원하던 것, 한처럼 남은 아쉬움과 미련이 피어난 환상, 이미 유실된 것을 상상으로라도 보고픈 간절함이 한편의 아련한 꿈으로 형상화된다.
이런 꿈의 속성이 복숭아의 특성과 유사하다. 복숭아가 유독 꿈속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건 그 과실과 나무, 도화 속에 ‘꿈과 닮은 속성’을 품고 있어서다. 동양에서 복숭아를 꿈, 환상과 종종 연결 짓고, 서양에서 복숭아의 꽃말을 ‘희망’이라 짝지은 것은 결코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복숭아의 색깔은 은근하고, 맛은 그윽하며, 향은 은은하다. 복숭아의 색깔은 ‘피치핑크’(Peach pink)라 하여 그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색깔로 인정받는데, 색채심리학에서는 이가 행복, 포근, 포용, 격려, 긴장완화, 자유를 상징한다. 꿈을 꾸며 어렸을 적 할아버지 살던 고향을 방문한 감회, 현세에 존재하지 않지만 한번쯤 살아보고 싶었던 이상향을 꿈에서 엿본 두근거림은 복숭아의 연한 선홍 빛깔과 닮았다.
 복숭아는 단맛이 지나치게 진하지도, 신맛이 과하게 침범하지도 않는, 은은하고 따뜻한 맛을 가지고 있다. 만일 복숭아의 맛이 파인애플처럼 강렬했다면 혹은 키위처럼 상큼하거나 레몬처럼 머릿골이 아프도록 시었다면 꿈속의 과일이 되기는 어려웠을 터이다. 그 달보드레한 맛이 자면서 베어 물어도 잠을 깨치지 않을 만큼 얌전하고 기품 있으므로, 사람들은 꿈에서도 흔연히 복숭아를 품는다.
 복숭아의 향은 마치 솜털 하나하나마다 미향이 풍겨 나오듯 희미하면서도 달콤하다. 은연하고 정중하면서도 그윽하다. 머리맡을 바삐 오가는 꿈의 정령에게서 향기가 난다면 복숭아 과육과 같은 향기일 것이다. 장미의 강렬한 향기가 낮의 생기발랄함을 닮았다면, 복숭아꽃의 희미하고 그윽한 향기는 밤의 방순함을 닮았다. 꼬옥 안고 함께 누운 연인에게서 풍겨오는 아련한 냄새, 차란거리는 꿈의 커튼을 살며시 열고 곱게 밀려오는 달밤의 냄새다.

 무엇보다 복숭아의 열매에는 꿈의 영험하고 신비한 속성이 그대로 묻어 있다. 꿈이란 의식이 죽은 듯 잠이 들었는데도 마치 깨어 있는 듯이 여행을 떠나고 사랑을 하며, 이별을 하고 죽음도 맞는 오묘한 정신의 활동이다. 하늘을 날고 숨이 막히지 않은 채로 바다 속에 들기도 하고, 이미 죽어 고인이 된 이를 생시인 듯 만나 동행하기도 한다. 이런 신이함 덕분에 꿈은 대개의 민족에게 신의 계시로 여겨지거나 미래를 예견하는 예지몽이기도 했다. 또 꿈은 죽음의 대리 체험이거나 영혼이 유체 이탈하여 여행하는 혼백의 유람이기도 했고 억눌린 무의식이 의식의 족쇄를 풀고 발현되는 본질의 욕구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민족에게서 저마다의 해몽 방법이 전승되는 건, 그만큼 꿈이 불가해하고 신묘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꿈의 환상적인 속성은 복숭아와 유사하다. 복숭아는 딴딴할 때는 아이였다가 점차 익어가면서 인생의 여로를 따라 청년에서 장년으로 자라고 이윽고 노인으로 변모한다. 과실 한 알에 일생의 비밀을 품고 있는 과일, 나무 위에 매달린 채 도를 깨친 영험한 과일이다.
복숭아는 어떤 때는 만학천봉을 노니는 신선이 되었다가 다른 때에는 천계서 하강한 선녀도 되었다가 늠름한 장수도 되고 영험한 무당도 된다. 불로장생의 명약이기도 하고 광인을 치료하는 회초리이기도 하고 배탈을 낫게 하는 상비약이기도 하다.
 이처럼 복숭아가 펼치는 화려한 둔갑술은 꿈의 변화무쌍함가 신이함을 닮았고, 자연스럽게 과일 중에서 유독 꿈이라는 정신의 활동과 짝지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우리말의 ‘꿈’도 그 한음절의 받침이 ㅁ(미음)으로 끝나기에 ‘꿈’이라고 소리 내어 발음하면 살포시 닫히는 입술의 여운이 앳되고 아련한 느낌을 준다. 꿈을 뜻하는 한자 ‘몽’(夢)은 그 음가가 둥글고 몽글몽글하면서 포근하여 꿈의 심상과 빼닮은 글자다. 영어 단어인 ‘드림’(Dream)도 발음되는 음가가 부드럽고 여리며 사근하고 곰살맞은데, 이 역시 서양인이 감지한 꿈의 속성이 무의식중에 반영된 조어일지 모른다. 꿈을 뜻하는 스페인어 ‘수에뇨’(sueño)의 음가에도 역시 그들 민족이 인식하는 꿈의 부드러운 형질이 여실히 드러난다. ‘어머니’, ‘여인’, ‘어린이’ 등 착하고 포근한 것에는 그 속성에 어울리는 이름을 짝지어 부르듯이, 각각의 나라는 꿈의 특징과 어울리는 이름을 작명하여 부르는 것이다.
 복숭아가 꿈속에서 자꾸만 호명되는 건 복숭아의 속성이 꿈의 둥글고 부드러운 형질과 꼭 닮았고 어울리기 때문이다. 꿈과 닮은 음가를 찾아 꿈을 명명하듯이 꿈을 닮은 과일을 찾아 꿈의 환상과 짝지었고, 여기에는 복숭아만한 게 없다. 만약 ‘꿈’이나 ‘몽(夢)’이라는 글자에다 요술을 불어넣어 물건으로 둔갑시킨다면, 필시 복숭아가 나올 것이다.

 좋은 꿈은 깨고 나면 아쉬운 법이다. 접시를 가득 채운 복숭아 여덟 쪽을 다 먹고 난 후 빈 접시에 방방하게 고인 잔향과 수밀의 끈적이는 체액의 여운은, 막 봄잠을 깨친 비몽사몽간의 뒷맛을 닮았다.
잠은 뽀얀 복숭아의 살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누워서 꿈을 꾸며 복숭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꿈의 여운은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고서 꼭꼭 씹어 삼키고 난 후에 입안을 화사하게 감도는 특유의 향이다. 문득 몽유병 걸린 환자의 들뜬 낯빛을 한 복숭아 한 알이 탁자 위에 고요히 앉아 나를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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