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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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기다리는 나무/조현숙

에세이향기 2022. 10. 5. 03:58

기다리는 나무/조현숙

소낙비 연주에 고요하던 숲이 수런거린다. 빗방울이 푸른 느낌표를 찍을 때마다 한 뼘씩 나무들은 자라고 시나브로 가을도 깊어진다. 하늘과 땅이, 음악소리조차 깊숙이 가라앉은 날, 비 내리는 날은 기다림의 색도 짙푸르다.
비 그친 뒤 고요한 적막이 나무의자에 길게 앉아 있다. 비 탓인지 밤나무는 오늘따라 더 쓸쓸해 보인다. 등에 커다란 옹이가 여럿 있는 걸로 보아 나이가 많은 나무다. 중심을 곧추 세울 기력조차 없는 걸까. 이웃한 언덕바지를 짚고 선 것이 영락없이 지팡이를 쥔 노인의 모습이다.


 
 언제부턴가 낡은 의자처럼 허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산후 후유증 탓이거니 했는데 내 나이도 어느덧 지천명, () 가을에 이르렀음에도 용수철처럼 팽팽하리라 믿고 몸을 혹사한 벌이리라. 하긴, 산처럼 쌓인 배추를 하루에도 몇 백통씩 다듬고 묶고 진열하다보니 몸은 소금에 절인 배추가 되기 일쑤였다. 새벽별을 보고 일어나 미명에 잠드는 일상. 그렇게 열 번의 겨울을 났다.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내게 혀를 차던 의사는 척추의 상태가 예순 넘은 노인과 흡사하다며, 당분간 외출금지령을 처방했다. 뼈에 좋다는 온갖 약을 끼니처럼 챙기고 연체동물마냥 느릿느릿 움직였지만 사후약방문일 뿐이었다. 몸의 중심이 여의치 않으니 외출은 물론 끼니를 챙기는 것도, 생각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때맞춰 우울증이 찾아왔다.
 
  한집에서 하나의 식탁을 두고 한 냄비의 찌개를 떠먹는 식구임에도 생각의 가지는 사방으로 뻗쳐 있다는 걸 그쯤에야 알았다. 채 누워보지도 못 한 채 생을 마감하는 강대나무처럼 서러웠고 볕이 사라진 집안은 응달처럼 어두웠다. 웃자란 아이들이 엄마의 빈자리를 찾아 밖으로, 밖으로 외돈다는 걸 그땐 미처 몰랐다. 한 끼니의 밥을 벌기 위해 하루의 반을 전장 같은 삶터에 저당 잡힌 남편과 엄마의 자리를 애써 붙잡고 있는 두 딸아이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따뜻한 밥과 국을 얹은 밥상 정도는 직접 들고 싶었다. 구차해 팽개쳤던 환자용 복대를 차고 조금씩 운신의 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한 땀 한 땀, 수면에 십자수를 놓는 자벌레처럼 느리게, 꾸준히 걷기 운동을 하다 숲에 이르렀다.
 
  너울 같은 콘크리트 건물 가운데 섬처럼 그 숲이 숨어 있었다. 산이라기엔 작고 언덕이라기엔 꽤 규모가 컸다. 야트막한 둔덕과 완만한 능선이 산책 겸 운동을 즐기기에 제격인 곳이었다. 품이 늡늡한 팽나무와 낮볕에 불콰해진 당 단풍, 성장(盛裝)한 벚나무, 새치름한 배롱나무를 지나 숲의 가장 내밀한 곳에 밤나무가 숨어 있었다. 나무 아래 길게 누워 있는 의자를 본 순간 나는 단박 그곳이 좋아졌다. 푸르고 촘촘한 그늘 밑에서 마실 온 바람, 볕뉘의 수다를 엿들으며 책을 읽거나 사색을 즐기곤 했다. 때론 벌렁 누워 나무가 차곡차곡 쌓아 둔 이력을 읽다 보면 마음에 푸른 물이 번졌다.


 
 할머니를 만난 건 밤나무에 막 아람이 들 무렵이었다. 하늘을 콕콕 찔러대는 밤송이를 바람이 흔들면 비 듣듯 알밤이 쏟아졌다. 족히 두 아름은 됨직한 둥치와 검푸르며 두터운 이끼 옷, 쟁반만 한 옹이가 나무의 나이를 말해주었다. 눈물겨운 노산, 나무의 산고가 두 아이의 어미인 내게도 짠했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이 나무도 이제 늙어서 기력이 딸리나 보이. 아람이 도토리만 한 걸 보니 늙어서 열매 맺느라 을매나 용을 썼을꼬.” 할머니가 슬며시 알밤 한 주먹을 건네셨다. 머리에 하얀 갈대꽃이 수북한, 체구가 작고 아담한 할머니였다. 비어있는 의자 한쪽에 엉덩이를 걸치더니 할머닌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두서가 없는 수다 너머 할머니의 쓸쓸함이, 돌아가신 할머니가 얼비쳤다. 짙푸른 그늘이 일순 환해지는 듯했다.


 
 할머닌 숲 아래 요양원에 계셨다. 2층의 맨 왼쪽이 할머니의 방이라 했다. 내가 주로 한낮에 공원을 찾는 것과는 달리 할머닌 해거름 녘 산보를 나온다 하셨다. 모르는 사이 우린 나무의자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실루엣에서 내 할머니를 뵈었듯 할머니 또한 내 또래의 따님이 있다고 했다. 게다가 허리가 부실한 것까지, 두루 공통점이 많은 우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할머니에게 하나뿐인 따님이 언제부턴가 뜨막해지더니 일 년이 넘도록 연락이 없다는 것을.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주 오래 전 나 또한 할머니와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지 않았던가. 이유야 어찌됐든 일찌감치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먹여주고 입혀주고 키워주신 할머니를 3년 남짓 찾아뵙기는커녕 연락 한 번 안했던 터다. 첫 월급으로 내 손에 쥐어진 금액은 5 6천원, 봉제공장에서 12시간 일해 받은 한 달간의 대가는 고향집으로 보내졌고 할머니는 그 돈을 큰오빠에게 오롯이 쏟아부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지친 나는 고향으로 향하던 마음을 거두고 발길을 끊었다.
 
  겨우내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영하의 날씨 탓이거니 했다. 밤나무 우듬지에 봄햇살이 내려앉아 해실거려도 할머니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망설임 끝에 찾아간 요양원의 침상에 할머니가 미라처럼 누워 계셨다. 겨울 한철을 꼬박 앓고도 봄 맞을 기력마저 잃은 할머니가 날 보더니 희미하게 웃으셨다. 통증이 표정마저 앗아갔는지, 주름 깊은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했다. 짧은 면회를 끝내고 병실을 나서려는 나를 할머니가 불렀다. 삐뚤삐뚤한 이름 석 자와 쭉정이 같은 숫자 몇 개, 오랜 기다림이 해진 쪽지 안에 빼곡했다. 묻지 않아도 따님의 연락처란 걸 알 수 있었다. 늙고 주름진 손가락이 수백 번은 맴돌았을 숫자를 또박또박 눌렀다. 혹시 없는 번호는 아닐까 쪼그라들 듯한 심장을 다독거리며. 나목이 울듯 공허한 신호음 끝에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아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어머니께서 몸이 많이 편찮으시니 메시지를 보는 대로 오시라는 메시지를 적어 띄운 후 봄과 여름이 저물었다.


 
 오랜만에 가 본 숲엔 밤나무가 주렁주렁 영근 밤송이를 달고 있다. 해거리조차 없는 모성을 어쩌면 그녀도 읽은 걸까. 미확인에 머물던 메시지가 수신 완료란 푸른 등불을 켜더니 며칠 뒤 푸석푸석한 음성의 여자가 안부를 보내왔다. 어머니를 뵙고 가는 길이라 했다. 일순 눈앞에 환한 보름달이 뜬 듯하다. 계절이 바뀌도록 명치끝을 누르던 가벼운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삼십년 전 내 할머니도 그러하셨으리라. 장손에게로만 향하던 미욱한 손길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못미더워하면서도 한달음에 고향집으로 달려갔더랬다. 사립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할매~” 하고 부르는 손녀를 눈물바람으로 맞아주신 그 마음을 이제야 알 것도 같다. 가시집을 열어 알밤을 바른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알밤을 찌고,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홍시도 몇 개 넣고 고구마도 넣었다. 달포만의 문병에 들고 갈 것들이 많은데도 허리가 한결 가붓하다. 오늘 밤, 모녀는 풀벌레 울음을 나란히 베고 잠들 것이다. 오글오글한 볕뉘가 밤나무 젖은 몸을 연신 닦아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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