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푸른 기와/허영숙

푸른 기와 허영숙 우체부가 바람을 던져 놓고 가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집 밤이면 고양이들이 푸른 눈빛을 켜드는 오래된 빈집에 언제부터 들어와 살았나 낡은 전선줄을 타고 지붕을 새로 올리는 담쟁이 땡볕이 매미 울음을 고음으로 달구는 한낮에도 풋내 나는 곡선을 하늘하늘 쌓아올리는 저 푸른 노동 질통을 지고 남의 집 지붕을 올리던 가장家長이 끙끙 신열을 앓으며 뒤척일 때 얼핏 들여다 본 어깨의 멍자국 같은, [감상] 생각만으로 이뤄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시절을 무성하게 덮은 담쟁이 넝쿨도 땡볕이며 비바람 마다하지 않고 푸른 허공을 길어 올린 고픈 노동의 손금일 터이다 한 가정을 꾸리고 기업을 경영하고 나라를 이끌어가는 일 또한 담쟁이의 거친 손금과 닮아 있는 것을 본다 담쟁이의 푸른 기왓장에서 온갖 어려..

좋은 시 2022.07.17

간절곶/최정신

간절곶 최정신 소리 내어 울, 일이 산, 만큼 쌓이는 날이 있다 천 개의 손짓으로 천 개의 합장을 밀고 오는 간절곶에 파도가 산다 산다는 건 밀리고 밀리는 일 물살이나 뭍살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 출렁이며 지글거린다 바람이 간짓대 포구에 실없는 말을 건다 포말이 하얀 이를 들어내 대꾸를 한다 저들도 혼자는 외로웠나 보다 기척 없이 오는 봄도 제 분에 겨워 저무는 중이라고 아직도 들어야 할 짜디짠 푸념이 모래주름 현을 뜯는다 화암化巖 주상절리에 핀 겹겹 사연은 언제 가서 다 듣나 억겁을 퍼 내어도 마르지 않는 시간 앞에 삭제한 다짐이 로그인 된다 예매를 빌미로 몸은 부산하고 마음만 사나흘 주저앉아 그렁그렁 깊어진다 [감상] 산다는 일은 이리 치이고 저리 부딪히며 스스로를 몽글리는 일일 것이다. 세상과 어울..

좋은 시 2022.07.17

북엇국 끓는 아침/이영식

북엇국 끓는 아침 이영식 생목이 올라 눈뜬 아침, 아내는 북어를 패고 있다 우리 집 세간에도 패고 두드려 방짜로 펼쳐놓을 무엇이 남아 있던지 빨랫돌 위에 난장을 치고 있다 베링해에서 겨울 산정까지 가시뼈 움켜쥐고 얼리고 말리던 난바다 한 덩이, 살점 튀도록 곤장치레 당한 뒤에야 황금빛 속내 풀어놓는다 일찌거니 명란, 창란젓으로 장기臟器 내어준 보시덩어리 냄비 속 대파 몇 뿌리와 한통속으로 끓는다 기다리면, 내게도 올 것이 있다는 국 한 그릇의 희망이 뜨는 아침 어둠 벗은 길들이 환하게 일어선다. [감상] 지아비의 속풀이를 위해 북어 한 마리를 패대는 아낙의 따뜻한 마음을 읽는다 얼리고 말린 황금빛 속내에 우러나는 파란 바다와 바람 한 덩이, 술김에 벗어둔 골목이며 길들이 마침내 환하다

좋은 시 2022.07.17

막사발/김종제

막사발 구석기김종제 그래, 너희들 몇몇 가진 자들의 안방에 고이 모셔둔 백자도 청자도 아닌 것이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개똥인지 언년인지 이름도 모르고 낯도 설다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무기라던가 원하지도 않던 불구덩이에서 잔뜩 달구어져 잘못 태어난 자식과도 같이 버리기도 뭐 해서 그냥 내버려 두다가 제대로 병구완 받지도 못해 황달기 오른 얼굴에 얼룩지고 껄끄럽고 잘 부서지는 우리네 민초(民草)와 왜 이리 닮았을까 그저 막 쓰다가 밥도 못 받아 먹고 굴러 다니는 그릇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먹고 살기 위해 사기막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 우리 민족이 아니겠느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물이나 져 나르다가 진흙이나 개다가 발물레로 꼬박을 올려놓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종지 한 개를 만든다 숫돌에 간 낫..

좋은 시 2022.07.17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 박제영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 박제영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초등학교도 다 채우지 못했으니 한글 쓰는 일조차 어눌하시다. 아들이 시 쓴답시고 어쩌다 시를 보여드리면 당최 이게 몬 말인지 모르겠네 하신다. 당연하다. 어머니는 참 억척이시다. 17살, 쌀 두 가마에 민며느리로 팔려와서, 말이 며느리지 종살이 3년 하고서야 겨우 종년 신세는 면하셨지만, 시집도 가난하기는 매한가지요, 시어미 청상과부라 시집살이는 또 얼마나 매웠을까, 그래저래 직업군인인 남편 따라 서울 와서 남의 집살이 시다살이 파출부살이 수십년 이골 붙여 자식 셋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 보냈으니, 환갑 넘어서도 저리 억척이시다. 이번에 내 시집 나왔구만 하면, 이눔아 시가 밥인겨 돈인겨 니 처자식 제대로 먹여 살리고는 있는겨 하신다. 당연하다...

좋은 시 2022.07.17

점등인이 켜는 별 / 이정화

점등인이 켜는 별 / 이정화 어스름이 마당을 기웃거린다. 길 잃은 개인지 어린 고라니인지 모를 짐승이 살금살금 뜰을 건너온다. 길고양이 한 마리 담을 넘어 골목 저쪽으로 사라진다. 맞은편 산자락이 천천히 제 능선을 지우면서 어둠이 사위에 드리운다. 딸깍, 저녁의 처마에 낡은 등불을 켠다. 부엉이 울음소리, 쓰르라미 부비는 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밤의 교향곡 선율을 따라 시냇물 소리도 넘실거린다. 주근깨 같은 별들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 밤하늘을 수놓는다. 저 별빛 중에는 수억 년을 달려온 것들도 있겠다. 시간의 장구한 길이를 가늠하자니 먼 빛이 더욱 아득해진다. 내 삶은 등 하나를 찾는 여정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린 그와 나는 두 손을 꼭 잡았다. 세찬 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들..

좋은 수필 2022.07.15

나무 이야기 / 이성복

나무 이야기 / 이성복 수주일 전 아내와 동네 뒷산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내려오는 길에,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 밑둥치에 녹슨 쇠못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현수막 같은 것을 걸만큼 높은 위치도 아니었는데, 거기 왜 그렇게 많은 쇠못이 박혀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손으로 그 못들을 잡아 돌려도 꿈쩍도 않아, 길 옆 돌 부스러기를 집어 못과 못 사이에 넣고 이리저리 돌려보니, 그 가운데 몇 개는 빠져 나왔다. 남은 대 여섯 개의 녹슨 못은 나중에 장도리를 가져와 뽑아 줘야지 하고는,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그 약속이 되살아난다. 또 어느 해 가을인가는 묘사를 지내러 고향 선산에 올랐다가 녹슨 철사줄로 칭칭 동여맨 소나무 몇 그루를 보았는데, 비록 야산이기는 했지만 꽤 깊은 산중에 누가 무슨 ..

좋은 수필 2022.07.09

다듬이질/이진영

다듬이질 이진영 베란다 한 쪽켠에 다듬잇돌이 먼지를 듬뿍 안고 있다. 올려져 있던 화분마저 실내로 들여놓았으니 빈 몸으로 겨울을 난 것이다. 왠지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정한 물을 떠다가 닦아주었다. 증조할머니 새색시 적에 좋은 돌을 골라 석수(石手)에게 부탁하여 특별이 맞춰온 다듬잇돌이란다. 대청 한 켠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 안방마님 못지않게 당당했던 자태가 눈에 선한데, 톡톡하게 세간구실을 하던 과거의 영광은 이젠 혼방섬유나 스팀다리미의 등장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수십 년 모진 매를 맞았음에도, 이제는 화분받침대 역할에 만족해야하는 수모에도 어느 한 구석 깨지거나 떨어져 나가지 않고 반듯하게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나마 할머니의 유품이기에 아파트 베란다 한 켠에..

좋은 수필 2022.07.05

종/윤명수

종 / 윤명수 하늘에 목을 매고 맞는다 속을 텅 비운 채 맞는다 영문도 모르고 맞는다 맞는 줄도 모르고 맞는다 살가죽이 벗겨지도록 맞는다 아픈 곳만 계속 맞는다 상처 위에 상처가 쌓이도록 맞는다 맞아야 할 때 맞지 않으면 불안하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면 불안하다 맞으면 맞을수록 청아해지고 내가 아프면 아플수록 세상은 가벼워진다 기꺼이 매를 맞는다 죽도록 매를 맞는다 웃으면서 맞는다 ********************** 퇴근길에 유난히도 내 그림자가 흐느적이는 날, 솜뭉치 같은 몸이 그래도 가벼운 것은 나로 인해 쑥쑥 커가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종,이라는 소재를 통해 이 땅의 가장들의 애환을 위로해 준다. 왠지 음미할수록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힘이 불끈 난다. 자칫 자학적으로 보일지..

좋은 시 2022.07.04

내 유년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나희덕

내 유년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나희덕 지금도 고향, 하면 탱자의 시큼한 맛, 탱자처럼 노랗게 된 손바닥, 오래 남아 있던 탱자 냄새 같은 것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뾰족한 탱자 가시에 침을 발라 손바닥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생각이 난다. 가시를 붙인 손으로 악수하자고 해서 친구를 놀려 주던 놀이가 우리들 사이에 한창인 때도 있었다. 자그마한 소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놀이란 고작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탱자 가시에 찔리곤 하는 것이 예사였는데, 한번은 가시 박힌 자리가 성이 나 손이 퉁퉁 부었던 적이 있다. 벌겋게 부어오른 상처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왜 탱자나무에는 가시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찔레꽃, 장미꽃, 아카시아…… 가시를 가진 꽃이나 나무들을 차례로 꼽아 보았다. 그..

좋은 수필 2022.07.02

꽃살문/이정록

꽃살문/이정록 꽃에는 정작 방년(芳年)이란 말이 없다네 그래, 천년만년 꽃다운 얼굴 보여주겠다고 누군가 칼과 붓으로 나를 피워놓았네만 그 붓끝 떨림이며 칼자국, 바람에 다 삭혀내야 꽃잎에 나이테 서려 무는 방년 아니겠나 꽃이란 게, 향과 꿀을 퍼내는 출문이자 열매로 가는 입문이라 나도 고개 돌려 법당 마루에 오체투지하고 싶네만 마른 주둥이 훔치는 햇살 천년 바람 천년, 법당 마당의 싸리비질 자국만 돋을 새김하고 있네 그렇다네, 이 문짝에 염화(拈華) 없다면 어찌 어둔 법당에 미소(微笑) 있겠는가? 풍경소리며 목탁소리에도 나이테가 있는 법, 날 쓰다듬고 가는 저 달빛 구름 그림자처럼 씨앗 쪽으로 잘 바래어 가시게나

좋은 시 2022.07.01

양푼 예찬 / 이은희

양푼 예찬 / 이은희 가스 불에 찻물을 올립니다. 그의 온몸은 금세 열로 펄펄 끓어 오릅니다. 주위에서 무어라 저지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파란 불빛 하나에도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떱니다. 파편이 여기저기에 투명한 자국을 남깁니다. 붉은 깃발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가는 성난 투우 같습니다. 머지않아 파란 불 빛과 함께 싸늘히 식어갈 체온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우직한 바보인가 봅니다. 그런 그의 무모한 열정이 꼭 나를 닮은 듯하여 이따금 두려워집니다. 그의 집엔 늘 손님으로 북적거립니다. 차 한 잔을 대접하기 위해 그를 찾아 빠르게 찾아 나섭니다. 국그릇 두 배 크기, 겉과 속은 한 가지 빛깔인 황금색입니다. 그러나 연륜은 못 속이나 봅니다. 가장 평평한 자리인 배가 얼룩덜룩 검..

좋은 수필 2022.06.16

바람든 무로 굴러 본 세상 / 권남희

바람든 무로 굴러 본 세상 / 권남희 무는 잘 보관해야 한다. 신문지에 꼭 싸서 두어도, 비닐 랩으로 싼 후 냉장고에 갈무리해 두어도 일주일 이상 지난 뒤 잘라 보면 바람이 들거나 물러 있다. 무는 양상추나 샐러리 등 비싼 야채처럼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지만 요리를 할 때 여러모로 쓰임새가 있다. 국물이나 매운탕을 시원하게 맛낼 때나 생선 찜, 갈비찜, 설렁탕에 곁들여 먹는 큼직한 깍두기, 갈비집에서 빼놓지 않고 내놓는 무채, 초절임 무쌈, 포기김치 담글 때 켜켜이 박는 무채 등 갖가지로 변신한다. 대충 보관해 두었다가 괜찮겠거니 하며 요긴하게 쓸려고 꺼내 보면 겉모습은 틀림없는 무인데 속은 구멍이 숭숭 뚫려 솜방망이가 되어 있다. 꼭 무로 요리를 해야 제 맛이 나는 경우에 무는 그렇게 망가져 있다. ..

좋은 수필 2022.06.16

비린比鄰구멍 / 허숙영

비린比鄰구멍 / 허숙영 도시의 뒷골목을 걷는다. 누군가 마주치면 몸을 옆으로 돌려 게처럼 걸어야 할 것 같은 이 길이 낯설지 않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접든지 높이를 달리해야 비켜갈 수 있다. 퀴퀴한 하수구 냄새 진동하는 골목에는 허드렛물이 홈통을 타고 길바닥으로 쏟아지는 일도 예사다. 조무래기들이 흘린 '자유시간'이란 과자 봉지는 뜯겨 자유는 하수구를 따라 흘러가 버리고 시간이란 글자만 뎅그러니 맨홀 뚜껑에 걸려 있다. 이 골목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돈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게 남아도는 것은 시간일 테니까. 하루 종일 해도 들지 않고 낮고 음습한 지대, 부엌 하나 방 하나가 대부분인 이곳에는 질병에 익숙해진 노인들이 참으며 살아간다. 대로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

좋은 수필 2022.06.16

황혼 / 설소천

황혼 / 설소천 석양이 창가에 머물러 있다. 저토록 가슴 설레게 아름다운 풍광이 오늘따라 왜 이다지 서글프게 느껴지는지. 내 눈에만 그럴까. 말없이 저무는 것에 대한 고통을 잠시 엿보았던 때문일까. 구순이 까까운 사람 중에 세탁소에 옷을 맡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 가게 오랜 단골인 이천댁과 섭이 할매는 그렇다. 내가 처음 가게를 시작한 때부터 두 분을 알고 지냈으니 수십 년 세월만큼 안면이 두텁다. 이웃에게 듣기로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우리 동네로 시집왔다고 한다. 평생을 제 자리에서 동네를 지켰으니 마을 역사의 한 부분이라 해도 과장은 아니다. 이천댁은 누가 봐도 복 많은 사람이다. 부잣집 맏며느리에 살림은 풍족했고 자식들은 건강했다. 잘 자란 자식들이 공부도 잘해 남들은 삼수, 사수해도 ..

좋은 수필 2022.06.13

신발 / 이복희

신발 / 이복희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뜬 사진 한 장. 다리 난간 안쪽에 놓여있는 신발 두 켤레에 눈이 시리다. 한강에 투신한 부부의 이야기였다. 자신들이 존재했었다는 마지막 증표였을까. 아니면 삶의 미련을 내려놓듯 벗어버린 것일까. 그것을 보며 굳이 속내를 짐작해 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신발에서 느껴지는 결연함은 눈물겹고 쓸쓸하다. 그러나 또 한편, 그 광경은 너무도 태연해 보였다. 마치 바깥나들이를 마치고 흔연하게 벗어놓은 것처럼. 신발을 벗는 일은 그저 일상인 줄 알았다. 저렇게 삶의 마침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렇게 삶을 내던지며 남겨놓고 떠난 신발이 어떤 이에게는 생의 애착과 아쉬움이 되기도 한다. “내 신발이 없어” 병고에 갇혀 일상을..

좋은 수필 2022.06.10

마당, 그 평화롭던 날들/허석

마당, 그 평화롭던 날들/허석 ​ 푸르스름한 동살이 담장을 넘어서나 보다. 아랫목 군불 열기가 아직 후끈거리는데도 창호지 너머로 벌써 마당 쓰는 소리 들려온다. “싸르륵 싸르륵” 새벽 강가에 사공이 노를 젓는 소리, 햇살 알갱이거나 싸락눈 굴러가는 댓바람 소리 같기도 하다. 싸리 비질 소리가 곧 여명이고 천명의 시간이 된다. 희붐한 빛줄기가 들자 마당의 민낯이 보자기처럼 펼쳐진다. 그 새벽의 마당은 언제나 집안 가장의 몫이었다. 아버지가, 외삼촌이, 고모부가 그 자리에 동바리처럼 서 있었다. 할아버지가 힘에 부치면 아버지가, 그리고 또 그 아들이 장대비를 넘겨받았다. 장독대와 작은 텃밭이 있던 뒤란이 어머니의 공간이라면 대문을 향한 앞마당은 아버지들의 ‘터’이자 ‘품’이었던 셈이다. 이른 아침에 마당을 ..

좋은 수필 2022.06.08

너에게 보낸다/황진숙

너에게 보낸다/황진숙 지난 계절 된통 앓았다. 질주하는 감정에 집중하느라 이상 징후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 모른 척했다는 게 맞는 말이다. 어쩌면 회복탄력성에 기댔는지 모른다. 야근으로 날밤을 새우고도, 몸은 때꾼해진 눈빛으로 뚝배기처럼 말없이 움직이지 않았던가. 궁지에 몰릴수록 마음은 애먼 몸에 무게를 부렸다. 속앓이로 심란할 적엔 허벅지가 무지근해지도록 트랙을 돌았다. 걱정이라는 훼방꾼이 넉장거리로 누워 발목을 잡을 때는 심장이 쿵쾅거릴 때까지 내달렸다. 우울한 기분을 날려 버리기 위해 근육들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갉아먹는 온갖 것들에게 먹잇감이 되어주는 몸인데, 고약하게 굴었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속을 굶기는 날이 다반사였다. 아프고 억울해서 눈물이 솟구치면 참으라고 성..

발표작 2022.06.08

부엌궁둥이/강돈묵

부엌궁둥이/강돈묵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빠져나간 유년이 고향 집에 가 있다. 산골짜기의 눈을 끌어안고 내려온 바람이 텃논 가운데의 짚가리에서 한바탕 상모를 돌린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오락가락 몰아치는 눈발. 바람의 궤적이다. 깃털을 헤집고 달려드는 바람을 밀치며, 짚뭇에 앉아 나락을 찾는 산새들이 신이 났다. 그들이 한참 놀다 간 후 차분히 볕이 내려앉는다. 해가 중천을 지났지만 바람이 역시 차다. 태어나면서 잔병치레가 잦았던 나는 여러 형제 중에서 엄마의 속을 가장 썩였던 자식이었다. 자주 골을 부렸고,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물론 한 고집했던 기억도 난다. 한편 부지런하여 가만히 쉬는 적이 없었다. 산에 올라 토끼를 잡아들이고, 장끼를 허리춤에 달고 내려왔다. 심지어 짚가리에 내려온..

좋은 수필 2022.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