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이질
이진영
베란다 한 쪽켠에 다듬잇돌이 먼지를 듬뿍 안고 있다. 올려져 있던 화분마저 실내로 들여놓았으니 빈 몸으로 겨울을 난 것이다. 왠지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정한 물을 떠다가 닦아주었다.
증조할머니 새색시 적에 좋은 돌을 골라 석수(石手)에게 부탁하여 특별이 맞춰온 다듬잇돌이란다. 대청 한 켠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 안방마님 못지않게 당당했던 자태가 눈에 선한데, 톡톡하게 세간구실을 하던 과거의 영광은 이젠 혼방섬유나 스팀다리미의 등장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수십 년 모진 매를 맞았음에도, 이제는 화분받침대 역할에 만족해야하는 수모에도 어느 한 구석 깨지거나 떨어져 나가지 않고 반듯하게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나마 할머니의 유품이기에 아파트 베란다 한 켠에라도 방망이 두 개와 함께 자리 잡을 수 있게 해 준 건 정말 특별한 배려였다.
세월의 때라도 벗겨낸 듯이 말끔해진 다듬잇돌 앞에 옷깃을 단정히 여미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거칠어진 방망이를 양 손에 잡고 빈 다듬잇돌을 두들겨 본다. ‘도닥도닥!’ 맞은편에 어머니가 앉아 다듬이질을 하고 계신 듯하다.
어머니의 다듬이 솜씨는 남달랐다. 언니 혼사 때 함께 이불을 꾸미려 와 주었던 동네 아주머니도 감탄을 했다. 초록 물감, 자색 물감을 들이고 풀을 먹인 후 알맞은 습기를 품고 있는 명주를 다듬잇돌에 개켜 올려놓고 마주 않는 이와 장단을 맞춰서 두들기기 시작한다. 반듯한 자세로 입을 꼭 다물고 두들기는 어머니의 손놀림이 고조된 순간은 북춤을 추는 무희나 악기를 다루는 예인(藝人)처럼 느껴져서 한 동안 숨죽인 채 지켜보곤 했다.
얼마큼쯤 두들기고 난 후 거풍(擧風)을 시키고 다시 다른 쪽으로 개켜서 두들기고, 아픔과 함께 풀기를 깊숙이 간직하게 된 옷감은 아른아른하게 윤기나기 시작했다.
“너도 좀 두들겨 보련?” 흥미롭게 지켜보는 12살 무렵 어린 나에게 어머니가 건네 준 말이다. 난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이리저리 두들기기 시작했는데, 일정한 힘과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옷감 몇 군데 상처에 내고 이내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았다.
“나가 놀아!” 더 하고 싶은 마음을 아쉽게 접고 겸연쩍은 얼굴로 내쫓겼다. 그렇지만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한사코 하고 싶다고 떼를 쓰는 탓에 몇 번인가 더 기회를 얻었지만 솜씨는 제 자리 걸음이었다.
예전엔 명주 두루마기, 무명 홑청 등, 옷감에 구김을 펴고 풀기를 깊숙이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봄〮. 가을이면 동네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가 울려나왔다. 사랑채 글 읽는 소리 벌써 끊어지고 할아버지 헛기침 소리도 어둠 속으로 잦아든 지 언제인가. 섬돌 아래 풀벌레 찌르르 우는 소리조차 숨죽인 듯한데, 두들겨도 갈라지거나 부서지지도 않는 단단한 방망이와 좀처럼 아픔을 내색 하지 않는 돌 받침대가 그 순간 마음을 합해서 내는 소리만 고즈넉한 적막을 깬다.
‘도닥도닥’ 길게 혹은 짧게, 높게 혹은 낮추어 두들기는 다듬이 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여인네들 가슴 속에 한을 토해내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시집살이 고달파도 말 못하는 한을, 서방님 먼 길 떠난 후 돌아올 줄 모르는 답답함을 그렇게 두들기면서라도 풀어내지 않으면 어찌 견뎠겠는가. 그러니 두들기는 것이 어디 무명 옷감뿐이랴. 첫째는 응어리진 제 가슴이며, 혹 더러는 무서운 시어머니도 되고 야속한 서방님도 되고 얄미운 시누이도 되는 것을. 어느새 치밀어 오르던 분노도 얼마큼쯤 숨죽이면 미움도 원망도 모두 창호지 문 밖 서성이는 달빛 사이로 흘려보낸다.
다듬이질은 내려치는 방망이와 받아내는 돌 사이에 절묘한 속도감이 팽팽하게 존재한다. 그건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던지고 받아내는 타협이다. 힘의 적절한 배분으로 인한 조화로움은 풀기가 겉돌아 서걱거리던 옷감, 올 사이사이로 꼿꼿한 풀기를 스며들게 한다. 명주, 무명 옷감들은 아픔을 견디어내고 비로서 깊숙이 받아들인 풀기와 하나 되어 윤기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 흡사 수도자의 모습 같다. 이런저런 세상사 온갖 잡념들도 스며들 수 없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려면 그렇게 끊임없이 얼마나 많은 세월, 호된 매로 자신을 단련시켜야만 하겠는가. 또한 삐끗, 손길의 평정을 잃으면 모서리 옷감 한쪽 결에 비명이 들려온다. 순간의 실수로 인해 가슴 한 켠에 메울 수 없는 구멍이 뚫리는 것처럼.
이루지 못한 꿈이며 홀로라는 한이 가슴 저리게 스며드는 밤이면,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져 되돌아오곤 했다. 나또한 빈 가슴이라도 내려치면서 달래보려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오늘도 빈 다듬잇돌 위에 내 마음을 얹어놓아 본다. ‘도닥도닥’ 조심스레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메마른 현실, 삶의 강약으로 인한 적절한 감정의 균형까지 맞추지 못하니 쉽게 구김살이 펴질리 없다. 또한 삶의 윤기를 내기까지는 주어진 아픔을 깊숙이 받아들여 나와 함께하는 합일(合一)의 경지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끈기 있게 참아내기 보다는 피해가는 요령을 더 빨리 터득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더 두들겨야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이 살아야 어머니처럼 익숙한 솜씨로 마음결 구김살을 펴고 꼿꼿한 풀기를 스며들게 할 수 있을까. 잠시였을 뿐인데, 이렇게 어깨가 저려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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