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자투리/남지은

자투리/남지은 서랍 여는 소리가 뻐근하다. 너무 오랜만에 열어주니 그동안 쌓였던 먼지와 고적함이 서로 뻐걱대는 소리다. 여러 개의 서랍 중에도 자주 사용하지 않는 칸이 있다. 그 속에는 버리기엔 아깝고 딱히 사용처도 없는 자투리 천과 머리타래와 보자기 등이 있다. 1년에 한두 번 열까말까한 이 서랍을 열 때는 마른기침을 한 번 하고 연다. 적요에 길이 든 서랍에 오랜만에 관심 두는 것이 좀 미안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머리타래에 좀이나 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서랍을 여는 순간 고이 잠자던 먼지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켠다. 위로 아래로 너부러지는 먼지들을 모르는 체하며 이것저것 뒤적인다. 가위자국이 선명한 상처를 안고 수십 년 서랍 속에서 잠자는 자투리 천들을 위로하듯 살살 달래가며 공기도 쐐주..

좋은 수필 2022.05.21

골목세탁소 / 송향란

골목세탁소 / 송향란 그 작은 간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서동에서 범내골 넘어가는 골목어귀 오랜 세월 멈춰 선 시곗바늘처럼 늘 그자리에 서 있는 한낮에도 반쯤 꺾인 햇살 고여 있는 창 너머 때 절은 시간이 거미줄처럼 걸려 있다 낮은 담벼락 둘러친 찢겨져 나간 벽보 덧난 상처처럼 번져 간다 나뭇잎 배처럼 떠돌던 사람들 휘어진 골목 안으로 흘러든다 끝없는 폐허의 숲을 지나온, 살아가면서 구겨지고 뭉개진 것들 날마다 찾아들어 끈질기게 붙어있는 먼지 떨쳐내기 위해 몸살 앓는다 통증 털어낸 솔기마다 달아오른 다리미 뜨거운 입김을 뿜어낸다 반듯하게 다려진 옷들 서둘러 길 떠날 때까지 순한 양처럼 길가에 내걸려 허공을 끌어당긴다 페인트칠 떨어져 나간 간판 아래 무언가 말하려다 입 다문 유리창 붉은 글씨들 쓸쓸한 골..

좋은 시 2022.05.21

양파/이삼현

양파 / 이삼현 아내의 부엌에 까다 만 눈물 한 바가지 담겨있다 ​ 나이를 과속할수록 소음이 심한 남편이지만 늘 웃으며 동승해주는 것이 고마워 모처럼 까다만 눈물을 대신 깐다 ​ 거친 흙 속에 걸음을 뻗고 쑥쑥 자라 오른 흔적 이순으로 접어드는 우리 부부도 이제 뿌리와 줄기는 말라붙고 주먹만 한 결실로 남았다 ​ 툭, 던진 한마디에도 쉬 부스러지는 겉껍질 앞만 보며 참고 쌓아온 모래알 같은 기억 때문이다 식구들을 보듬었던 단단히 엉긴 흉터 딱지를 벗겨내니 웅크린 아내의 속살이 비치고 울컥, 눈이 아려온다 ​ 제 안으로 깊숙이 남편과 자식들을 껴안은 한 겹 또 한 겹 벗겨낼수록 작아만 가는 ​ 오늘 저녁 아내는 한 끼 행복을 위해 무슨 밥상을 준비하려 했을까 다 드러내지 못한 속내를 까며 어떤 그늘에 잠겨..

좋은 시 2022.05.21

한뎃잠/문성해

한뎃잠 문 성 해 장례식에서 돌아와 아침에야 밤잠을 잔다 돌아온 잠이 있고 돌아오지 못한 잠도 있다 병풍 앞에 둘러앉아 누군가의 한뎃잠을 지킨 사람들 그가 낯설게 뒤척이는 잠 속에 앉아 늦은 육개장을 집밥처럼 말아 먹어주고 (밤잠이 이리 환해도 될까!) 그가 켜둔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꽂혀 있었다 장례식이란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한뎃잠을 지척에서 지키는 일 돌아올 수 없는 잠에 대해 함구하는 일 생전 그와 같이 한 번도 누워본 적 없는 이들이 길고 지루하고 온전하게 (오, 하루치의 잠을 보시한 채) 한 개의 한뎃잠을 조문한 뒤 이 아침 방으로 돌아와 끊어진 밤잠을 다시 잇고 있다

좋은 시 2022.05.19

모든 것은 근경이 슬프다/문태준

모든 것은 근경이 슬프다 문태준 얼굴이 푸석푸석하던, 누룩 띄운 독 같던 나무들이 봄이 되어 빛깔을 받는다. 매화와 산수유나무가 우선 그렇다. 불꽃을 받는다. 나는 지난 겨울 보고 들었다, 빈집의 마음을, 바람의 노래를, 얼음의 언어들을, 침묵의 세계를. 요즘 해금 같은 가늘은 소리가, 숨결이 나무에게서는 난다. 새순 한 촉을 땅 바깥으로 밀어내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전전긍긍했을까? 참혹했을까? 새순 돋는 나무에게는 회오리가 있다. 새순 돋는 나무들을 보면 나에게 중대사는 무엇인가 묻게 된다. 등짝을 뚫고 나오는 시, 아래로 아래로 땅을 파고 들어가 처음 만난 한 줄기 샘물 같은 그런 시를 받아낸 적이 있는지 묻게 된다. 봄이 오는 산길 들길을 걸으면 그래서 내 마음은 더더욱 오갈 데 없는, 춘설 분분한..

좋은 수필 2022.05.19

자모음 아라리/김경희

자모음 아라리 / 김경희 방송국 우리말 겨루기 예심을 보러 갔을 때다. 1차 서류를 통과하고 2차 관문은 필기시험이었다. 맞춤법이나 우리말 뜻, 공통 서술어 쓰는 것은 수월하게 풀어나갔다. 손등 위로 볼펜을 돌리는 여유까지 부렸는데 자음 첫소리만 띄워 주고 문장을 완결시키는 문제에서 막혀버렸다. ‘ㄷㅈ ㅁㅇ ㅈㅈ ㅁㄱㅇ’ 퍼즐 조각 맞추듯 말들을 끌어다가 잇대봤지만 번번이 어긋나 시간을 축내기만 했다. 시간 종료를 알릴 때서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서둘러 써서 냈다. ​ 디지털시대,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로 일상의 부스러기들까지 나눈다. SNS의 그물망엔 언어유희가 활개를 친다. 깜놀(깜짝 놀람), 버카(버스카드), 열폭(열등감 폭발) 언어들이 해독불가 상태다. 한글 자모를 떼어 닭 모이처럼..

좋은 수필 2022.05.15

돼지 키우기/마경덕

돼지 키우기 마경덕 “돼지를 키워 학교에 가거라” 엄마의 한마디에 나는 돼지 세 마리의 철없는 어미가 되었다 집집마다 수챗가에 구정물통을 갖다 놓고 해거름에 거두러 다녔다 불어터진 밥알, 비린 생선대가리, 무 껍질, 시큼한 잔반냄새ⵈ 그것들이 몇 푼의 등록금이 되어주었다 동네 우물이 있던 윗집 턱수염이 거뭇한 자취생들이 우글거렸는데 내게 편지를 보내던 남학생도 끼어 있었는데 내가 그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휘파람을 불던 남학생들이 마루 끝에 앉아 키득키득 고1짜리 여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갈까 말까 수없이 망설이던 그 집 먹새 좋은 돼지를 굶길 수는 없어 침착하게, 아니 뻔뻔하게 눈빛을 갈아 끼우고 멀건 구정물을 따르고 무거운 양동이를 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섰다 그때마다 사춘기의 뒤통수가 따가웠다 ..

좋은 시 2022.05.13

어리굴젓/김경윤

어리굴젓/김경윤- 아침 밥상에 굴젓이 올라왔다 흰 보시기에 담긴 굴젓이 울다 지친 눈동자 같다 뻘밭 같은 생生을 살아온 울 엄매를 닮았다 남들 앞에선 늘 굴껍데기처럼 강해보였지만 당신의 생애도 팔 할은 눈물이었다 스물둘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칠순이 넘도록 갯바위에 쪼그려 앉아 굴을 까는 울 엄매 수심愁心 깉은 바다에는 얼마나 많은 파도가 울다 갔을까 그 얼얼한 세월 동안 생굴 같은 가슴 속도 죄 삭았으리 썰물 진 아침나절부터 밀물 드는 저녁 무렵까지 죽은 막내 생각 부도난 둘째 걱정 전화 한 번 없는 무정한 큰 놈 원망하다 혼자서 글썽해졌을 그 눈동자, 생각느니 내 오십 생애도 울 엄매 눈물을 파먹고 산 세월이었구나! 울다 지친 눈동자 같은 어리굴젓 아침 밥상 위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좋은 시 2022.05.11

비/장석주

비/장석주 봄비ㅡ 봄비는 겨우내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을 두드리며 온다. 비들은 오, 저 "시체들의 창고"(파블로 네루다)인 땅을 맹인이 지팡이로 두드리듯 두드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은 땅은 풀리고 땅 속에 숨은 씨앗들은 싹을 땅거죽 밖으로 밀어낸다. 봄비가 충분히 내리고 난 뒤에야 작약의 붉은 움이 돋고 모란의 묵은 가지들에도 꽃눈이 돋는다. 들창 너머로 혼자 내다보는 봄비는 쓸쓸하다. 곡식이 있으면 밥을 끓이고 곡식이 끊기면 굶는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일은 책 읽는 것이다. 깊은 산속 쑥대 갈대 아래 숨어 사는 오류선생이나 다름없다. 이승의 인연들을 끊고 시골 구석에 들어와 빗소리나 키우며 사는 건 그윽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다만 조금 적적할 뿐이다. 살을 맞대고 체온과 냄새를 킁킁거리며 잠들..

좋은 수필 2022.05.11

여름이 좋다/ 장석주

여름이 좋다/ 장석주 태양에게 자비심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불볕을 쏟는 태양은 만물에게 아주 가혹한 시련을 안길 따름이다. 한낮 이마에 떨어지는 촛농이라니! 태양이 이마를 태우려 드는구나. 한낮 태양이 던지는 금빛 그물에 포획된 생물은 허덕거린다. 하지만 나는 여름이 좋아! 여름이 오면 내 안에 사는 이마가 반듯한 착한 소년이 환호작약한다. 태양은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숲속 활엽수의 잎잎은 기름을 바른 듯 반짝인다. 저 먼 곳에 있는 푸른 바다는 더욱 파랗게 빛난다. 태양이 만물에 흩뿌리는 빛은 그것이 기쁨, 희망, 자애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태양 아래서 토마토와 복숭아, 자두가 둥글게 익어 간다. ​ 한낮 공중에서 타던 해가 떨어진다. 해 진 뒤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질 때..

좋은 수필 2022.05.11

마경덕 시 모음

우물 / 마경덕 눈물이 다만,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마른 몸에서 물이 솟는 건 내 몸 어딘가에 우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 깊은 곳에 영혼이 물처럼 고여 있는 것이다. 흐르는 눈물은 내 영혼의 하얀 이마이거나 지친 발가락이거나 슬픔에 퉁퉁 불은 손가락이다. 영혼은 고드름이나 동굴의 석순처럼 거꾸로 자란다. 이것들은 모두 하향성이다. 근원을 향해 생각이 기울어 있다. 내가 나에게 찔리는 것, 슬픔이 파문처럼 번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석순처럼 자란 영혼을 손수건으로 받으면 발간 핏물이 든다. 나는 피 젖은 손수건 석 장을 가지고 있다. 그 오래된 손수건을 차곡차곡 접어 냉동실에 두었다. 꽁꽁 얼어붙은 냉동고의 영혼들은 더 많은 우물을 만들고 영혼을 생산한다. 고드름처럼 자라 맹물처럼 ..

좋은 시 2022.05.08

태풍과 칼 / 이인주

태풍과 칼 / 이인주 사과나무 포도나무가 실하게 영근 과일들을 하혈하듯 쏟아 내렸다. 다 털린 빈 몸으로 아랫도리를 휘둘리고 있었다. 짓밟힌 채마밭은 울고 있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태풍의 공습이었다. 열대의 바다에서 태어난 루사는 잉태된 그 뜨거운 입김을 몰아 제주도의 목덜미를 핥고 정확히 한반도의 심장부를 뚫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잔혹한 입김의 자취가 화인(火印)처럼 남았다. 그야말로 벼락같은 자연의 위력 앞에 손쓸 수 없는 한낱 인간의 허약함을 증명받고 싶었던 것일까? 독기를 품었으나 심중을 알 수 없는 여자처럼 그렇게 루사는 한반도를 관통했고 인간은 내장을 다친 어린 짐승처럼 신음했다. 이백 명이 넘는 사상자와 실종자, 그리고 수조 원의 재산 피해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막힘으로 오..

좋은 수필 2022.05.08

효녀 심청 잔치를 벌이다 / 이미영

효녀 심청 잔치를 벌이다 / 이미영 열세 살 난 계집아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치마폭을 뒤집어 쓴 채 삼킬 듯이 소용돌이치는 물속으로 자진했다. 효도밖에 모르는 어린것이 아버지를 살리겠다고 천길 물로 뛰어들었다. 뱃머리에서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두 손을 꼭 잡은 소녀의 잔상이 남아있다. 그림 속 어린아이가 아무리 눈물을 삼키며 서있어도 긴장감은 생기지 않았다. 인형극이며 동화, 거기에 주워들은 이야기까지 보태져서 그 후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뒷일이 오히려 선명했기 때문이다. 인당수에 빠지기 전의 고난은 지워지고 꽃으로 피어난 이후의 삶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효녀 심청 그와 나는 처음 만난 그때나 지금이나 딸자식이라는 처지 하나 밖에는 손톱만치도 닮은 점이 없다. 젖먹이를 두고 어머니는 저세상으..

좋은 수필 2022.05.05

만灣, 만滿, 만晩 / 윤정인

만灣, 만滿, 만晩 / 윤정인 만灣 - 만나고 굽어지다 ​ 물마루가 밀려온다. 둥근 띠를 이루는 파도의 능선이 아래로 꺼졌다 위로 솟구친다. 바람을 따라 공중으로 물보라를 뿜어 올리다,방파제에 부딪쳐 포말로 흩어지기도 한다. 사납게 내달리던 파도는 만灣으로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진다. 파도는 과감하게 경계선을 넘어온다. 무방비로 서 있던 해안선은 뒷걸음치며 물러나지만 소용없다. 바다는 기어이 빈틈을 찾아내 자리를 만들어간다. 물굽이의 시작은 그랬을 것이다. 역동적인 바다는 제 몸피를 육지의 가슴속 깊이 밀어 넣었고, 망설이던 육지는 둥글게 몸을 말아 껴안았을 것이다. 만의 탄생이다. 어느새 훅 들어왔더라는 지인의 말처럼 그도 그렇게 내게로 왔다. 처음 만난 건 친구의 하숙집에서였다. 같은 학교..

좋은 수필 2022.05.01

강적들/신미균

강적들 詩人 신미균 ​ 의자 모서리에 다리를 부딪혔다 의자 모서리는 그대로인데 내 다리가 찢어졌다 ​ 책이 발등으로 떨어졌다 책은 멀쩡한데 발등에 멍이 들었다 ​ 땅바닥에 넘어졌다 땅은 아무 이상이 없는데 내 무릎만 깨졌다 ​ 스타킹을 신다가 스타킹 고무줄은 생생한데 손을 베었다 ​ 꼭 딱딱한 것들한테만 당하는 줄 알았는데 야들야들한 것들도 칼날을 숨기고 있다 ​ 세상에 만만한 것들이 없다

좋은 시 2022.04.28

행복과 불행 사이 / 허정열

행복과 불행 사이 / 허정열 여름의 길섶은 싱그럽고 풍성하다. 와르르 쏟아진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새끼 제비처럼 주둥이를 벌려 먹이를 받아먹는 것 같은 강물 위로 햇발이 깊숙이 뻗친다. 막 버무려 놓은 상큼한 달래 같은 강물이다. 아름다운 만남이랄까? 양 어깨가 무척 넓고 가슴이 따뜻한 어머니가 우리를 맞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일렁이는 강물이 포옹을 끝내고 시침 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소화불량 걸린 작은 일상들의 체기가 서서히 풀리고 지끈거리던 머리와 지친 마음이 금세 맑아진다. 잃어버린 삶의 의욕이 다시 일어서고 불끈불끈 생각들이 치밀어 오른다. 낯선 통증이다. 누구보다 아픔이 많은 그녀다. 작년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상을 치르고 남편마저 혈압으로 쓰러져 7개월간의 병원 생활을 했다. 지금도..

좋은 수필 2022.04.27

만돌이, 부등가리 하나 주게 / 목성균

만돌이, 부등가리 하나 주게 / 목성균 지금은 다 산이 되었지만 강만돌 어른이 살아 계실 때는 윗버들미의 유지봉 넓은 산자락에는 따비밭들이 누덕누덕 널려 있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일 때는 사랑간에 한방 가득 장정들이 모여서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달빛이 방문을 하얗게 적시면 “달 떴네” 하는 좌장(座長) 말에 놀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사랑 마당 가득한 지게에서 제 것을 찾아 지고 유지봉 따비밭으로 올라갔다. 아직 바심(타작)을 못하고 가려 놓은 채 있는 뉘 집 서슥(조) 더미를 울력으로 져 내리기 위해서다. 강만돌 어른네 따비밭의 서슥 더미를 헐어서 한 짐씩 짊어 놓고 앉아서 내려다보던 푸른 달빛이 어린 골짜기. 풀어 널은 명주자치처럼 달빛에 하얗게 바랜 냇물이며, 순산한 산모가 조용히 숨을 고..

좋은 수필 2022.04.27

다소곳이 오 4편/이삼현

다소곳이 외 4편 / 이삼현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며 또, 이만큼 자랐구나 살았구나 이 길이만큼의 목숨을 잘라내며 기쁨도 조금 감추고 살아온 슬픔도 조금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지난 무덤덤한 날들을 미움인 줄도 모르고 섞인 흰 머리카락을 함께 자른다 동에서 서로 저무는 달처럼 아내 쪽으로 기울어 잠든 밤에도 너는 깨어 있었구나 일손을 놓지 못한 순간에도 칼바람이 뿌리를 드러낸 틈새 속에서도 너는 속도를 잃지 않았구나 키를 키웠구나 밀어 올렸던 성장판은 닫히고 가슴은 뜨거워지는 걸 잊었지만 또, 이만큼 깎는구나 버려야 하는구나 사진: 세상을 보는 또 다른눈 양파 아내의 부엌에 까다 만 눈물 한 바가지 담겨있다 나이를 과속할수록 소음이 심한 남편이지만 웃으며 동승해주는 것이 고마워 모처럼 까다만 눈물..

좋은 시 2022.04.22

쇠꽃, 향기 머물다 / 허정진

쇠꽃, 향기 머물다 / 허정진 둥글둥글한 버섯들 군생처럼 옹기종기 처마를 맞댄 시골 마을이다. 한해의 결실을 보고 난 뒤의 들판은 허무인지 여유인지 텅 빈 충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담장 너머 등불처럼 붉게 매달린 홍시가 방학 때마다 외갓집 오고 가는 길목처럼 정겹기만 하다. 숲속 어딘가에서 갑자기 허공으로 높이 날아오른 새가 폐곡선을 그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선들선들한 바람이 조붓한 돌담길을 따라 마을을 안내하듯 앞장선다. 오래된 시골집이다. 귀향을 염두에 두고 잠시 머물 거처를 찾던 중이었다. 뒤란에서 불어오는 대숲 바람, 호박넝쿨 타고 오르는 낮은 돌담, 우물가 옆에 돌확이나 숫돌이 주인 잃은 빈집을 지키고 있다. 한때는 올망졸망한 자식들 앞세운 일가족이 등가죽 따뜻하게 살던 집이었으리..

좋은 수필 2022.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