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노란 서점 / 김인선

노란 서점 / 김인선 늙으면 햇살 잘 드는 공터에 집 한 채 지어놓고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로 서점이나 하며 살고 싶다. 판매를 하진 않을 테니 정식 서점은 아니겠고, 굳이 용도를 말하라면 책 읽는 어른들의 문화공간이라 할까. 다 늙어서 웬 책이냐고 물어오면, 세상 이야기 두루두루 나누면 그게 다 책 얘기지, 라고 말할까 한다. ​ 일생이 소박했으니 집이 클 필요는 없겠고, 꽃들과 다감했으니 유일한 사치는 그런 것에나 부릴까 한다. 이왕이면 오솔길을 내어 책을 읽으러 오는 길이 산책길이면 좋겠고, 노란 물감으로 멋을 부린 집 주위로는 키 낮은 해바라기를 심어 아예 ‘노란 집'이라 불리면 더욱 좋겠다. 고흐가 사랑했던 아를도 이만큼 노랬을까 생각하면서 먼 나라 화가 흉내로 짜릿한 기쁨도 맛보겠지. ​ 이름도..

좋은 수필 2022.03.28

입, 주름을 말하다 / 김인선

입, 주름을 말하다 / 김인선 내 얼굴에는 생각하는 괄호 하나가 산다. 말하는 입의 가장자리에 앉아 말하지 않는 침묵의 힘을 담고 있다. 입술이라는 것이 말하는 날개라면 이는 입가에 어른거리는 민무늬 날갯짓이다. 팔랑팔랑 말의 언저리를 따라 다니지만 수많은 갈래의 인생을 일획으로 담은 웅숭깊은 무늬다. 언제부터 이 괄호가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미세하게 찾아왔을 시작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마도 기슭이 편하다는 걸 알아가던 즈음이지 싶다. 어쩌면 처음부터 변방을 좋아해서 수척한 테를 일찍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슬픔을 감미롭게 좋아한 반가사유상처럼 턱을 자주 괴었던 내 지난날들이 거기에 담겼으리라. 햇살과 바람에도 모습을 숨기지 않았던 무모함에 이제야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얼굴..

좋은 수필 2022.03.28

반추상(半抽象) 수필/ 윤재천

반추상(半抽象) 수필/ 윤재천 반추상 수필은 그 의미가 다의적(多義的)이다. 수필은 자연현상과 함께 각기 다른 삶의 실상과 그에 따른 경험을 기록할 목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대중화되어 있는 문학이다. 수필은 형식이나 내용에 제한이 없는 글로 인식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지만, 이런 기존의 인식이 수필의 어려움이기도 하고,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수필의 내용이 작가의 삶의 모습이라는 선입견이 강함으로써 창작과정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수필은 경험의 기록이기도 하고, 기대하는 소망의 피력일 수도 있어 다양한 것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경계를 넘어 다양성을 토대로 자라나야만 미래를 바라보는 수필이 된다. 다의적 수필은 그 특색이 불투명한 메시지로 독자에게 다가가지만 '이미지'..

수필 이론 2022.03.28

행복은 값이 없다 / 김서령

행복은 값이 없다 / 김서령 사무실엔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엔 당연히 컴퓨터가 놓였다. 책상에 앉는다는 것은 컴퓨터 앞에 앉는다는 의미다. 컴퓨터를 밀쳐놓고 새삼 종이책을 펼치거나 펜글씨를 쓸 수는 없다. 종일 모니터 안에서 내가 읽어 치우는 활자가 도대체 얼마만한가. 그러나 정작 머리에 입력되는 정보는 많지 않다. 마음을 울리는 내용은 더욱이 드물다. 연초에 서로들 푸짐하게 복을 빌었다.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은 미쁘고 고맙지만 남발되면 의미가 증발해 버린다. 복이 과연 뭔가? 돈인가? 건강인가? 잘난 자식인가? 편한 친구인가? 기분 좋은 마음인가?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뭉친 것이라면 좋기야 하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런 항목의 속성이 한결같을 수야 없다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지금 가졌다 하더..

좋은 수필 2022.03.26

몽돌 해변에서 만난 소리 / 최선욱

몽돌 해변에서 만난 소리 / 최선욱 파도를 앞세우고 몰아오던 바닷바람이 절벽을 돌면서 순해져 섬마을로 마실 오듯 넘나드는 곳쯤에 내가 서 있다. 일행 중 앞서 가던 이가 깎아지른 절벽 중턱쯤 깊숙이 파인 곳을 가리킨다. 저기 보이는 너럭바위가 기氣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명당자리라 한다. 그곳에 오르려면 물 빠질 때를 맞춰 와야 한다며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대지 위 삼라만상에 광활한 우주의 기운이 스미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하늘과 맞닿은 망망대해 앞에 서면 언제나 숙연해지는 것은 그 광대무변함 때문만이 아니다. 바다는 세상의 온갖 오물을 달게 삼키는 대신 끊임없이 새 생명을 만들고 생기를 뿜어내준다. 그 넉넉함으로 선순환의 질서를 베풀어 주기에 어머니의 품 같은 바다 앞에 서면 겸손해지고 생..

좋은 수필 2022.03.25

포대기 / 이혜경

포대기 / 이혜경 몇 번의 실랑이 끝에 큰엄마는 기어이 봉투를 밀어 넣었다. “애 낳을 때 못 와서 미안하다. 이걸로 포대기라도 하나 사라.” 물기 오른 눈빛 앞에서 힘껏 뿌리치던 손이 스르르 풀리고 말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품고 다녔으면 각진 모서리가 둥글게 닳았을까. 빈 봉투를 채우기까지 성치 않은 다리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걸레질했을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뜨거워졌다. 사람 좋기로는 동네에서 큰엄마를 따라 올 사람이 없었다. ‘때마다 밥숟가락을 입에 넣으니 사람인 줄 알지, 그렇지 않으면 부처라고 믿을 사람’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이웃들에게 선뜻 밥솥을 열었고, 마을 경조사에 내 일처럼 팔을 걷어붙였다. 햇볕에 그을린 주름진 얼굴이지만 찔레꽃을 닮은 미소에서는 은은한..

좋은 수필 2022.03.24

가을 무렵 악기 한 소절/박성현-

-가을 무렵 악기 한 소절/박성현- ​ ​ 담장 밑 버려진 소주병에 바람이 들었습니다 볕이 내려앉아 알맞게 데우고 갔습니다 날벌레 몇 마리도 깊숙이 들어갔다 걸어 나왔습니다 조용히 숨죽이며 날개를 접었습니 다 어디선가 금 간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모락모락 부풀고 느릿느릿 퍼졌습니다 악보가 수집하지 못한 소리라 생각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음표와 음표 사이에 고여 있는 말들이 었습니다 멀어서 늦은 당신처럼 기록되기를 잠시 멈춘 가을, 그 무렵의 악기 한 소절이 늦은 달을 틀어 놓고 있었습니다

좋은 시 2022.03.24

수필은 주역(周易)에 생활복을 입힌 것이다 / 박양근

수필은 주역(周易)에 생활복을 입힌 것이다 / 박양근 “가는 것은 모두 이 시냇물과 같구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어느 날 공자님이 시냇물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가면서 한탄한 말이다. 우리들도 일상에 묻혀 지내다가, 모든 것들은 쉬지 않고 변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때 하늘에 뜬 구름을 쳐다본다. 기원전 6세기경 희랍의 서정시인도 인생무상을 이렇게 노래했다. 보게나, 세월이 내 관자놀이 위로 흰 서리를 뿌리더니, 어느새 내 머리를 흰 눈밭으로 만들었네. 이가 빠져 버린 잇몸은 자꾸 넓어지고 젊음도 기쁨도 오래전에 스쳐가 버렸네 시인이든 철학자의 명석한 논리와 다감한 감정이 지향하는 곳은 한 곳, 한 것이다. 그것은 인생과 자연의 변화이다. 천지개벽 (天地開闢), 상전벽해 (桑田碧海)..

수필 이론 2022.03.24

발/황진숙

발/황진숙 굽혔다 폈다 하루를 끌고 간다. 구렁텅이 같은 바닥을 딛고 저벅거린다. 무명으로 태어나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채의 몸집을 짊어지고 세상의 길을 헤집는다. 갈라 터진 세월은 발뒤꿈치에 쟁여놓는다. 일생을 동행한 이력으로 너덜거리는 기억들이 허옇게 층을 이룬다. 종일 신발에 몸을 구겨 넣은 채, 보이지 않는 시야를 점유하느라 잡힌 물집과 덧난 상처쯤은 덮어 둔다. 습한 어둠 속의 고린내를 탓할 겨를도 없다. 뒤꿈치가 땅에 닿아 지축을 울리자마자 바닥을 박차고 나간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불란하다. 핏줄 불거지도록 오그라들며 노면을 움켜쥔다. 요령을 부릴 줄 모르는 우직함은 타고났다. 허기진다고 꼬르륵 소리로 보채거나 화가 난다고 핏발을 세우지도 않는다. 눈물로 슬픔을 호소하거나 푸념을 늘어..

발표작 2022.03.23

그림자를 따라서/최지안

그림자를 따라서 최지안 아직 해가 산을 넘지 않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선다. 어떻게 알고 따라붙은 것인지, 바닥으로 길게 누워 앞장선다. 빛도 못보고 자란 식물처럼 가늘다. 그림자도 주인을 닮는가. 연하고 긴 목을 바닥에 누이고 가는 팔을 휘두른다. 가는 다리로 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누가 밀면 금방이라도 저만치 나가 엎어질 것 같다. 발꿈치 끝을 물고 허물처럼 붙은 나의 동반자.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눈도 없는 얼굴로 나를 보는 그의 감정은 차가울지 뜨거울지 알 수 없다. 나를 따라다니느라 지쳤을까. 제 맘에 들지 않아 못마땅하지는 않았을까. 나를 따라다닌 지 꽤 되었다. 휘청거리며 걸음마를 할 때부터였을 것이다. 얇은 발목으로 디딘 지상이 그리 단단하지 않았을..

좋은 수필 2022.03.23

등잔 / 유현주

등잔 / 유현주 시골집에 들렀다가 허드레 것을 쌓아 둔 창고에서 등잔과 부러진 등잔대를 발견했다. 석유 냄새는 사라진 지 오래고 심지는 죽은 뿌리처럼 부서져 있었다. 골동품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챙겨와 깨끗하게 닦았다. 명주실로 새 심지도 만들어 끼웠다. 부러진 곳까지 붙이니 본래의 모양새가 되었다. 여기저기 편안한 자리를 찾다가 아이의 책꽂이 한 칸에 세웠더니 맞춤이다. 겸손한 도령의 얼굴처럼 하얗게 빛나는 것이 환귀본처還歸本處를 이룬 듯했다. 등잔! 불러 보니 따뜻한 발음에서 봄볕의 나른함이 돌았다. 등을 담는 잔이라니, 세상 어떤 잔이 이렇게 아름다울까. 등잔은 소심하지만 진실성 있는 맏이의 느낌이 난다. 꾸밈없는 단순함이 외곬수의 믿음을 준다. 위태로운 흔들림은 보호 본능을 자극하여 관대함과 너..

좋은 수필 2022.03.20

입 없는 돌/유안진

입 없는 돌 유안진 돌은 입이 없어 먹이사슬에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아득한 저 시대에는 돌도 입을 가져 먹고 살았는가. 돌이 먹은 수억만 년 전의 동식물들이, 소화되지도 못한 채 미 라가 되어 박물관에 모였다. 입을 가진 돌은 아직도 먹어야 사는가. 전시장 수석(壽石)에는, 먹어 온 천둥과 번 개 강물과 바닷물, 달과 별빛 눈 서리와 비 안개가 보인다. 물과 바람과 짐승의 소리 까지, 더러는 소화되고 더러는 변형된 채 훤히 내비친다 얼비친다. 온 몸으로 삼켜 먹고도 입 없는 듯 입을 감춘 돌. 보리매미 울음조차 핥아 빨아 마 시고, 시침떼며 살찐 몸에 자욱진 문양. 돌의 몸 돌의 색깔도 그의 식욕이었다. 고 요는 아니었다.

좋은 시 2022.03.18

헤어진 다음 날 / 김애자

헤어진 다음 날 / 김애자 그립고 아쉬운 것이 있어 비 내립니다. 실낱같은 외줄에 몸 기대고 있다가 지상에 내린 첫날, 깊어진 만큼 남아 있는 상처를 씻으라고 비 오시는가 봅니다. 서걱서걱한 가슴을 쓸어안고 문을 열어 첫 공기를 훑습니다. 퇴각 되어야 할 시간 속에 피어나야 할 무엇이 있는가 봅니다. 마른 기억들이 빗속에 떠다닙니다. 시간 속에 길이 있다 하셨지요. 한 몸인 양 인연의 옷을 입었던 그 순간들이 서러움 속에서 너울거립니다. 고통이라 여겼던 숱한 사연들도 이제는 슬프고도 아릿한 기억으로 허공에 매달리겠지요. 언젠가는 그대 없는 첫날을 맞으리라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 쉬 손을 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잠결엔들 꿈결엔들 한차례 불었던 바람이 뜨거웠던 한때를 식혀버렸습니다. 아직은 첫날이니 시간 ..

좋은 수필 2022.03.18

11월은 빈 몸으로 서다 / 이해연

11월은 빈 몸으로 서다 / 이해연 물새 한 마리가 후드득 날아오른다. 몇 번의 날갯짓으로 산만했던 대열을 가지런히 가다듬은 새들은 저무는 강 위를 두어 번 선회하더니, 선홍빛 노을 속으로 유유히 멀어져 간다. 휘모리가락처럼 사위를 온통 붉은 빛으로 휘몰아 넣던 노을이 스러지고 있다. 한지에 먹물 스미듯 시나브로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빛과 어둠이 만나는 시각이다. 한낮의 거센 빛살에 숨을 죽이고 있던 사물들이 수런수런 제 기색을 찾는다. 산 빛, 물빛이 깊어지고 불빛이 생기를 찾기 시작하는 시각. 낮이라기에는 어둡고 밤이라기에는 아직은 밝은, 빛과 어둠이 함께하는 이 짧은 순간을 음미하며 나는 하루의 고단함을 벗고 평온함에 잠긴다. 모자란 게 많은 탓일까. 돌아보면 나는 늘 한 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좋은 수필 2022.03.18

현산일기 / 이인주

현산일기 / 이인주 마파람이 가슴을 넘나들어 잠이 오지 않는다. 몇 번을 자는 시늉으로 뒤척이다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복성재로 향한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은 자연 발길이 이쪽으로 향한다. 나는 지금 보름째 현산에 머물며 손암의 뒤를 좇고 있다. 손암의 육중한 그림자가 내 안에 들어와 겹쳐지며 하고 싶은 말들을 주술처럼 쏟아낸다. 그의 말 가두고 있기가 버겁다. 언덕길을 오르니 갑갑하던 숨이 좀 트이는 듯하다. 복성재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온통 붉은 기운으로 뒤덮여 있다. 근 열흘 동안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해 왔다. 혜성이 꼬리를 길게 동쪽으로 뻗치더니 서쪽 바다 쪽으로 떨어지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숲의 저편으로부터 엄습해 온다. 내게 지금보다 더 암담한 상황이란..

좋은 수필 2022.03.18

껍질 / 권현옥

껍질 / 권현옥 너는 좋아. 너는 아니야. 야채 가게에서 분명 껍질을 보고 맘에 든 놈을 바구니에 담아왔다. 그런데 그것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앞치마를 두르면 둘로 나누기 시작한다. 먹을 것과 버릴 것, 순하게 말하면 ‘다듬기’라 할 수 있지만 실은 껍질을 죄다 버리는 일이다. 다듬어진 깔끔한 알몸이야 식욕을 자극하니 흐뭇하다 치고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껍질에게서 야릇한 선함을 느끼는 것은 무얼까 싶다. 체온을 위해, 속을 위해, 껍질이 되었다가 지쳐 벗겨진 빨래 통의 빨랫감처럼 껍질로 수북한 음식 쓰레기가 밉지 않다. 사람의 손과 입을 실컷 거친 음식쓰레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선한 죽음 같은 것인지, 훌러덩 속을 던져 놓음으로 느껴지는 가벼움인지 모르겠다. 껍질은 제 존재의 깃발이었다. 제 몸..

좋은 수필 2022.03.18

자리표 / 우광미

자리표 / 우광미 보이지 않는 소리에도 자리가 있다. 자리의 높고 낮음은 악보에도 나타난다. 높은음자리표의 음은 상향이고, 낮은음자리표의 음은 하향이다. 높은음자리표 안에 사는 음들은 우리 눈과 귀에 익숙하다. 평소 노래를 부르면서 보아왔기에 쉽게 읽힌다. 그에 반해 낮은음자리표 안에 사는 음들은 눈에 설다. 면밀히 층수를 헤아려 보아야 알 수 있다. 시작되는 기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 사는 이치에 비추어 보면 큰 것에 대한 만족도는 높은음이 크고, 작은 것에 대한 만족도는 낮은 음이 더 크다. 높은음은 화려하게 상승하면서 돋보이기도 하고 우월감을 마음껏 발산하여 주위의 이목을 쉽게 끈다. 이에 비해 낮은음자리표에 사는 음에는 더는 내려갈 데가 없어 날선 감정의 열등의식이 잠재되어 있기도 하다. 이..

카테고리 없음 2022.03.18

돌들의 묵언을 읽다 / 김정화

돌들의 묵언을 읽다 / 김정화 햇볕 쨍쨍 한낮에 연지 해자 뜰을 걷는다. 잎자루를 든 연잎이 잎을 길쭉하게 오므리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다 마실 듯하다. 더러는 잎을 납작하게 펼치고 검게 고인 물을 덮었다. 분홍 메꽃과 태극 문양 흙길 따라가니 또 하나 둥근 해자가 펼쳐진다. 성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거대한 돌, 작은 돌, 잘 생긴 돌, 못생긴 돌덩이로 쌓은 성벽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졌다. 돌과 돌 틈에 작고 납작한 돌이 균형을 잡아 울퉁불퉁한 성 벽면을 자로 잰 듯 평평하다. 내가 서 있는 눈높이에 네모난 돌은 모퉁이가 부드러운 곡선을 띤다. 그 위에 각이 진 반듯한 인공 돌이 층층 놓였다. 오목하고 볼록한 직선으로 번갈아 길게 이어졌다. 검버섯이 핀 큰 돌들로 반룡의 몸통이 꿈틀거리는 듯하다...

좋은 수필 2022.03.17

돌/손진은

돌 손진은 노당리 뒷산 ​홍수 넘쳐 물살 거친 계곡 밑으로 ​쪼그만 돌들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노당리의 산과 들 ​지난 수십 년의 계절과 햇빛 바람 다져넣고도 ​동으로 혹은 서으로 머릴 누이고 ​낯익은 백양나무 강아지풀 개구리 울음 뒤로 한 채 ​이 마을 사람들 대처로 대처로 나가듯 ​물살의 힘 어쩌지 못하고 떠내려간다. ​떠내려가서 ​형산강 하구나 안강 쪽 너른 벌판 ​낯선 땅에서 발붙이며 ​지푸라기 다른 돌들과 섞여 부대끼거나 ​길이 막히면 ​굽이진 어느 구석 외진 도랑에서 비를 긋거나 ​구름자락 끌어 덮으며 길들여지다가 ​비가 오면 또 떠밀려갈 것이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그냥 안주하기도 하는 돌들의 행려(行旅)여. ​몇몇 친숙한 식구가 떠난 뒷산 계곡의 남은 돌들 ​더 깊은 시름에 잠기..

좋은 시 2022.03.17

고등어의 눈물 / 최순덕

고등어의 눈물 / 최순덕 시퍼런 바다가 쏟아진다. 탱글탱글 터질 것 같은 싱싱한 고등어가 배에서 바로 집으로 왔다. 스티로폼 박스에 얼마나 꾹꾹 눌러 담았는지 박스가 미어터진다. 고등어 사이사이에 신문지 뭉치를 쑤셔 넣듯 쿡쿡 박아 넣은 한치는 또 얼마나 많은지, 쏟아 놓으니 큰 대야에 가득하다. 제매가 오징어 좋아하는 줄을 어찌 기억하고 있는지 제철 만난 한치를 많이도 보냈다. 맙소사, 작은오빠가 바다 한 귀퉁이를 툭 떼어 보낸 것 같다. 막내 오빠는 고등어잡이 선단의 운반선 조리장이다. 오빠가 전하는 고등어와의 사투는 각본 없는 드라마다. 남항 부두에서 고등어잡이 선단은 새벽바다를 빠져나간다. 본선 한 척과 환한 불을 밝히는 등선 두 척과 운반선 세 척이 모여 여섯 척의 배가 선단을 꾸리고 목 좋은 ..

좋은 수필 2022.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