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놋쇠종 / 지영미

놋쇠종 / 지영미 작고 앙증스러운 모양이 한 손안에 쏙 들어온다. 세월의 때가 묻었다. 장인이 수없이 두들겨 만들어낸 고운 결은 시간 속에서도 그대로다. 나비 모양 무쇠공이가 가만히 흔들린다. 바람결에 깊은 여운을 담은 소리를 금방이라도 들려줄 것 같다. 어릴 적 우리 집 대문에는 자그마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어느 해 할머니가 메어 놓은 후부터 청아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그것이 질병이나 액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라고 믿고 계셨다. 마치 고목에 정령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종에도 혼이 깃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주술적인 믿음을 담은 종은 늘 그 자리를 지키며 우리와 함께했다. 어린 나는 그 소리가 참 좋았다. 종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우리 집에는 좋은 일만 생길 거라고..

좋은 수필 2022.02.26

소금 벼락 맞던 날/김서령

소금 벼락 맞던 날/김서령 어릴 적 내 이름은 웅후였다. 수웅자 뒤후자. 뒤에 사내동생을 낳으라는 염원이 담긴 작명인데, 그건 나만의 소유는 아니었다. 내 이름은 고모 이름 '후웅'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었다. 고모의 고모는 '웅후', 고모는 '후웅', 나는 '웅후'. 대를 거듭하며 우리 집안 딸들의 이름은 반복됐다. 딸의 이름은 이를테면 사내동생이 태어날 길을 터주는 전령 노릇을 맡긴다는 임명장이었다. 여러 입에 자꾸 불리면서 이름은 일종의 주문이 돼버렸다. 그 효력은 탁월해 고모에게는 아버지가, 내게는 남동생이 생겨 대문 앞에 떠들썩하게 고추를 매단 금줄을 치는 날이 왔다. 각자 남동생이 태어나던 날, 우리 숙질은 30년의 간극이 무색하게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어른들에게서 사랑스럽게 머리가 쓰다듬어졌다...

좋은 수필 2022.02.25

설거지 방식을 다시 살핀다/ 김서령

설거지 방식을 다시 살핀다/ 김서령 부엌 안에 하수구가 없던 시절 엄마의 설거지는 복잡했다. 먼저 밥솥 안에 두 바가지 정도의 물을 붓는다. 숭늉을 긁어 냈으므로 밥 찌꺼기가 남아 있지는 않은 솥이다. 거기다 식사한 그릇들을 거두어 담는다. 나물 접시, 국그릇, 된장찌개 냄비도 거기 들어간다.한 번씩 헹궈낸다.그릇에 묻은 곡기와 간(엄마는 소금기를 '간'이라 불렀다)은 물에 말끔히 헹궈진다. 솥 안의 물은 금방 뿌옇거나 누레진다. 이 물을 다시 바가지로 퍼낸다. 퍼낸 물이 더럽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땅에서 나온 곡식기운이 뿌옇게 담겼으니 소중하고 아까울 뿐이다. 이 물은 부엌 뒷문 앞에 놓인 항아리에 조심스레 부어진다. 이건 집에서 기르는 짐승의 밥이다.개가 먹을 때도 간혹 있지만 대개는 소죽 끓일 재..

좋은 수필 2022.02.25

그에게 열광하다/ 김서령

그에게 열광하다/ 김서령 죽은 윤택수의 박물지를 읽는다. 엊저녁 읽던 것을 아침에 가방에 넣어가지고 왔다. 이 친구의 글만큼 날 격렬하게 만드는 게 없다. 십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두어 문장만 읽으면 핑그르르 눈물 돈다. 아무리 누선 관리가 안 되는 갱년기의 나라지만 윤택수, 그는 내 정서의 핵심 스팟을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하긴 별 것도 아니다. 대단한 내용이랄 게 아무것도 없다. 고작 국수를 먹거나 무밥을 먹는다는 얘기다. 떨어지는 낙숫물을 손등으로 받으면 물사마귀가 생긴다고 했다는 풍문들, 사마귀를 잡아서 물사마귀를 뜯어먹게 하면 그게 없어지더라는 기억들, 국수 빼는 엄마를 따라 방앗간에 가는 걸 좋아하는 이유에 관한 글들이다. 충청도 어느 시골, 임하만한 마을이었을 그 동네의 방앗..

좋은 수필 2022.02.24

예산장터 버들국수 집/김서령

예산장터 버들국수 집/김서령 예산 장터엔 휘장을 친 국수집이 5군데 있다. 국수뿐 아니라 국에 만 밥도 판다. 예산은 언제부턴가 장터국밥과 장터국수가 유명한 고장이 돼버렸다. 예산국수 한 그릇을 후루룩 들이키고 갱지에 싼 국수 한 묶음을 사기 위해 충남 내륙에선 일부러 예산장(1일과 5일)에 들른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예산국수는 슈퍼마켓에서 파는 기업형 국수가 아니다. 기계와 사람이 반반쯤 품앗이를 해서 만드는 핸드메이드 국수다. 게다가 햇살속에 널어 말린다. 이게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국수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깊은 맛을 지닌다는 것이다. 맛뿐 아니라 씹는 감각인 치감( 齒치 感감 )과 목구멍에 넘기는 감각인 설감( 舌설 感감 )에 있어서 공장국수들이 범접 못할 매력을 지닌다는 평가였다. 대도시는..

좋은 수필 2022.02.24

덕산 양조장에 가보셨나요/김서령

덕산 양조장에 가보셨나요/김서령 술조사라는 것이 있었다. 술조사는 대개 세무서 직원이 맡았는데 그들이 오면 할머니는 누룩자루를 들고 다락으로 숨으셨다. 밀주빚기가 그처럼 범법이 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젠 집에서 가양주 한 두종류쯤 담글 줄 아는 것이 되려 범절있는 집안으로 환호받는다. 술빚기는 똑같이 쌀을 재료로 하는 일이지만 밥이나 떡과는 다르다. 뭔지 들뜨고 흥청거리고 비일상적 설렘이 있다. 누룩이란 말 자체의 은밀함, 노을 아래 술익는 마을이란 도가적 서정, 아랫목에 묻어둔 술항아리의 추억들이 뒤얽혀 술빚는 행위에 모종의 문화적 아우라를 형성한다. 누룩냄새를 맡고 싶었다. 술항아리에 귀대고 아득하게 괴어오르는 소리에 집중하던 순간이 그리웠다. 양조장은 사양산업이긴 하지만 면단위로 내려가면 아직 어렵..

좋은 수필 2022.02.24

아름다운, 낡은, 빈,집/김서령

아름다운, 낡은, 빈,집/김서령 아름다운, 낡은, 빈,집? 하나의 명사앞에 세 개의 관형사를 늘어놓는 것은 온당한 짓이 아니다. 아름다운을 빼거나 낡은을 빼고 빈 만 둬야한다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나 저 빈 집은 낡지 않았다면 빈 집이 될 리 없고 낡지 않은 빈 집이라면 비었다는 의미는 전연 달라진다. 저 집은 말하자면 천명을 다한 집이다. 자연사해서 자연 속에 녹아들어 이물감이 사라진 집이다. 그랬기에 아름다운을 그 앞에 척 걸쳐놓는 것 역시 자연스러울 수 있다. 아름다운을 빼고 낡은과 빈만을 둘 수도 물론 있었다. 요즘의 글쓰기는 너무도 간단해 내가 맨처음 글쓰기를 연습하던 시절처럼 지우개로 뭉개거나 줄을 죽죽 긋거나 종이를 구겨서 내던질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커서를 화살표에 올려놓고 자판을 누르..

좋은 수필 2022.02.24

삶은 테크닉이 아니다/김서령

삶은 테크닉이 아니다 올해가 사흘 남았다. 지진과 해일이 남아시아를 휘덮어 수만명을 검불같이 끌고 가고 멀쩡하게 파안대소하던 사람이 배 속에 암세포가 가득 찼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래도 아침해는 잔인할 만큼 무심하게 떠오르고 앞산도 태연하게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새삼 사람의 무력이 실감나는 연말이다. 해는 사흘 뒤에도 분명 똑같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이미 낯설고 새로운 2005년의 해일 터이니 올해의 남은 사흘을 안타깝게 부둥켜안지 않을 수 없다. 뭘 할까 궁리하다 나는 결국 피같이 아까운 이 시간을 청소에 쓰기로 작정한다. 군사정부 시절 징역살이를 경험한 소설가 송기원 선생의 말 중 잊지 못하는 대목이 있다. "감방을 새로 옮겨가면 통 정이 안 붙는단 말이야. 그러면 한구석에 놓인 변기통..

좋은 수필 2022.02.24

가을무에 단맛을 들여라/김서령

가을무에 단맛을 들여라/김서령 가을무에 맛이 들 철이다. 알다시피 제철 채소는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다. 철마다 다른 채소를 길러내는 땅에 발을 딛고 산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황홀하다. 이승에 생명을 얻어 사는 보람은 그걸로 충분한 건지도 모른다. 그 외의 것은 모조리 덤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새 옷을 입는 것도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마주 앉은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그 아이의 입안에 밥을 넣어주는 것도, 내 몸이 이 땅에 발을 디디는 기쁨 이후에 감각하는 덤에 속한다. 누구의 삶이든 이 덤이 크니 생명을 얻어 지상에 둥지를 튼다는 것은 꽤나 남는 장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우린 덤에 취해 정작 본질을 잊고 산다. 생의 본질! 그건 가을무의 푸른 어깨에 있다. ..

좋은 수필 2022.02.24

아카시아에 바친다/김서령

아카시아에 바친다/김서령 아카시아가 아니라 아카시라고? 침대 머리맡으로 아카시아 향기가 꿀처럼 흐르는 아침, 아카시아 꽃 위로 꿀벌 잉잉대는 소리 소란한 오월 오후, 아카시아 꽃주저리가 송이마다 빗방울을 달고 있는 어스름,그런 때엔 새로 바뀐 아카시라는 한글 표준어법 대신 애뜻하고 경쾌하게 두 입술을 활짝 벌려 라고 덧붙이는 걸 용서해줘야 한다. 비구니의 피부는 왜 저렇게 맑은 건가 늘 궁금했다. 밭일로 얼굴이 검게 그을렸어도 흰 살갗에 못지 않게 투명한 게 신기했다.유명 피부 미용실의 특수 석고 맛사지를 받는 것도 아닐테고 백화점 일층의 수입화장품 코너의 수십만원 하는 수분크림을 바르는 것도 아닐텐데... 여승들이 얼굴에 투명함과 윤기를 유지하는 비결은 생리심리학이 연구해볼 과제이기도 하고 뷰티 컨설턴..

좋은 수필 2022.02.24

사과/김서령

​​사과 김서령 나는 행복하지만 언제나 똑같은 뉘앙스로 행복한 건 아니다.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도 많다. 희망이 없다고, 지금껏 잘못 살아왔다고, 곁에 손 내밀 사람 아무도 없다고 착각하는 날도 종종 있다. 그럴 때 나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스스로에게 일깨워 줘야 할 필요와 의무를 느낀다. 그런 날 꺼내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 직접 처방한 묘약인데 도마뱀의 눈물, 소금 뿌린 로즈마리, 밀랍과 복숭아씨 같은 까다로운 재료가 필요한 건 절대 아니다. 외려 아주 간단하다. 그렇지만 효능은 즉각적이고 강력하다. 그건 사과 한 알을 껍질째 와사삭 깨물어먹는 일이다. 너무 시시하다고? 아니 그렇지 않다. 까다로우면 까다롭지 간단하다고 비웃을 일은 아니다. 사과는 와사삭 소리가 입안에서 비강을 통..

좋은 수필 2022.02.24

[나목을 내다보는 시간]/김서령

[나목을 내다보는 시간] 김서령 내 등뒤에 나목으로 이뤄진 숲이 있다. 저 나무들은 아마도 참나무일 것이다. 누가 심은 게 아니라 원래 이 땅에서 절로 돋아난 나무들. 참나무에 꿀밤이 열리면 꿀밤나무다. 도토리를 꿀밤이라고 부르지 상수리라 부르는 건 들은 적이 없는데 나무일 땐 도토리나무보다 상수리나무라고 부르는 빈도가 더 높은 건 왜일까(난 아직도 세상에 이렇게 모르는 것 투성이다). '참'이라니, 그 외의 다른 나무는 '거짓'나무라도 된다는 뜻일까. 전에 꿀밤 나무에 관해 들은 이야기가 있다. 산에 꿀밤이 열리면 그걸 다람쥐가 먹고 꿀밤을 먹고 사는 다람쥐를 오소리 같은 좀 큰 짐승이 잡아먹고 오소리를 잡아먹는 너구리같은 더 큰 짐승을 또 호랑이가 잡아먹고, 그런 먹이사슬의 고리가 제대로 꿰어지자면 ..

좋은 수필 2022.02.24

콩을 심자/김서령

콩을 심자/김서령 봄이 온다. 봄은 땅에서 뭔가 맹렬히 돋아나는 계절이지만 반대로 땅이 입을 벌려 씨앗을 맹렬히 삼키는 계절이다. 나무라면 꼬챙이만 꽂아둬도 물이 오르고 씨앗이라면 땅바닥에 굴러 떨어지기만 해도 싹이 돋는다. 우주가 약동한다. 모든 길짐승, 날짐승의 피톨과 핏줄들이 바쁘게 요동친다. 땅에 뭔가를 심지 않으면 안된다. 봄에 땅에 씨앗을 묻어본 사람은 그 짓을 안하는 봄을 견딜 수 없어진다. 한톨 씨앗이 싹을 틔워 꽃이 피고 한들거리다 수백 배의 알곡으로 여무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는 가을이 무슨 소용 있으랴. 봄에 씨앗을 묻는 이의 일년은 암만 빨리 흘러도 허망하지 않다. 진작 내 인생의 봄날에 깨우쳤어야 할 진리였다. 그러나 늘 그렇듯 알고 나면 너무 늦다. 대신 봄이 오면 나는 회한을 곱..

좋은 수필 2022.02.24

노숙露宿 / 김사인

노숙露宿 / 김사인 ​ ​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 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은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좋은 시 2022.02.23

칼잠 / 최일걸

칼잠 / 최일걸 ​ ​ 칼잠을 자 본 사람은 알고 있다 삶이 얼마나 마모되어야 잠이 번득이는 날을 세워 칼에 이르는 건지 녹슨 양철지붕 같은 밤, 어떤 폭압이 저들을 협소한 공간에 몰아넣어 포화상태에 이르게 한 걸까 꿈마저 바닥을 드러낸 사람들이 바로 누울 수도 없는 생의 갈피갈피를 비비며 칼갈이를 하지만, 단 한 번도 칼잡이를 꿈꿔보지 못한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아 온돌이 되어 아랫목을 넓혀 가며 아궁이 보다 깊게 서로의 속을 헤아린다 부지깽이 같은 손으로 서로를 다독거리다 보면 군감자 보다 더 따스해서 입김 호호 불며 한 덩어리가 된 삶을 나누어 먹는다 겹겹의 칼날을 이룬 그들이 허기의 단속을 피해 곤한 잠으로 풀어지려면 무허가의 밤은 도대체 얼마나 울음을 삼켜야 할까

좋은 시 2022.02.23

‘아줌마’라는 말은 / 김영남

‘아줌마’라는 말은 / 김영남 일단 무겁고 뚱뚱하게 들린다 아무 옷이나 색깔이 잘 어울리고 치마에 밥풀이 묻어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은 낯설어 하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이 ‘아줌마’하고 부르면 낯익은 얼굴이 뒤돌아본다. 그런 얼굴들이 매일매일 시장, 식당, 미장원에서 부산히 움직이다가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짓는다 그렇다고 그 얼굴들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함부로 다루면 요즘에는 집을 팽 나가버린다 나갔다 하면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폭탄이 된다 유도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진 못하겠지만 뭉툭한 모습을 하고도 터지면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이웃 아저씨도 그걸 드럼통으로 여기고 두드렸다가 집이 완전히 날아가버린 적 있다 우리 집에서도 아버지가 고렇게 두드린 적 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

좋은 시 2022.02.23

삼겹살에 대한 명상 / 고 영

삼겹살에 대한 명상 / 고 영 ​ ​ 여러 겹의 상징을 가진 적 있었지요 언감생심, 일곱 빛깔 무지개를 꿈꾼 적 있었지요 불판 위에서 한 떨기 붉은 꽃으로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 적 있었지요 ​ 흰 머리띠를 상징으로 삼았지요 피둥피둥 살 바에는 차라리 불판 위에 올라 분신자살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지요 육질이 선명할수록 사상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거든요 달아오른 불판이 멀리 쏘아 올리는 기름은 발가벗은 내 탄식이었지요 ​ 몸 뒤틀리고 몇 번쯤 뒤집혀지고 나면 (제발, 세 번 이상은 뒤집지 마세요) 내 사명도 끝난 줄 알았지요 노릿하게 그을린 얼굴들이 참기름을 두르고 앉아 마늘처럼 맵게 미소를 주고받을 때 소원할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저 말라비틀어진 살점들을 어찌할까요 ​ 어쩌다 간혹 안부나..

좋은 시 2022.02.23

꽃밥/엄재국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 마른 나무에 목단, 작약이 핍니다 ​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 ― 엄재국, 〈꽃밥〉 전문 ​ 담양에서 태어났지만 갓난아이 때 이사 온 후 쭉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궁이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밥을 짓는 풍경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본 게 전부. 당연히 가마솥 밥을 먹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이 시의 매력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아궁이에 마른 장작을 밀어 넣어봅니다. 불이 붙은 나무에서 함빡함빡 목단, ..

좋은 시 2022.02.22

싹튼 양파들 / 조말선

싹튼 양파들 / 조말선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통화중 신호음을 들었다 나는 한번 시도한 일은 멈출 줄 몰랐다 나는 한번 들어선 길은 돌아갈 줄 몰랐다 뚜, 뚜, 뚜, 뚜 듣지 못할 응답이 나에게로 돌아와 꽂 혔다 차창 밖으로 발개진 꽃잎들의 통화가 소란스러워졌다 세상는 모 두 통화중이었다 나는 나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안에 통화중 신 호음이 가득 차올랐다 귓바퀴가 수백 다발의 코일을 빨아들였다 나는 나의 고백을 듣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디 간 거야. 나는 나의 응답을 찾지 않았다 나는 고독해졌다 나는 팽창했다 귓속에서 입이 찢어졌다 백년은 늙은 내 입 속에서 푸르른 말들이 나를 겨냥했다 조말선: 1965년 경남 김해 출생 1998년 으로 데뷔 시집: 소통되지 않는 전화와 ..

좋은 시 2022.02.21

신춘문예평론

1. 몸의 기억에 부여되는 리얼리티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결과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쩌면 예술이 끝자락에 도달해 있고 이제 “규정 불가능성”(하이데거)에 빠진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현대는 예술 과잉의 시대이자 ‘무(無)예술성’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는 헤겔이 비유한 것처럼, 이제는 예술이 인간의 비대해진 욕망을 더는 채워 줄 수 없다는 “예술의 종언”을 증명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쓰고 읽는 시 또한 예외가 아니다. 현대성과 서정성이 미학적으로 반목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은 이분법적 폐쇄성이 낳은 관념적 산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시의 속성을 탈(脫)서정성에 두려는 해체적 사유는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현대성과 서정성은 대척적 개념이 아니라..

평론 2022.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