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돌확의 노래/이정인

돌확의 노래 이정인 정중동(靜中動)이다. 빗물 고인 돌확에 하늘빛 젖어드는 사이 흰 구름 살포시 제 몸을 적신다. 잠시 타는 목을 축이던 서산의 해는 긴 밤을 흘리고 사라져간다. 어둠에 빠져버린 웅덩이에서 달은 또 한 번 떠오른다. 자연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돌확의 풍경에는 허허로운 운치의 노래가 흐른다. 돌확은 살아있는 추억의 화석이다. 나보다 먼저 고향집에 생겨나 지금까지 한자리에 망부석처럼 머물러 있다. 시골농가 개조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헐고 고쳐도 돌확은 처음 있던 그대로다. 정들 틈도 없이 빨리 변해가는 시대에 그대로인 모습을 보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돌확을 볼 때마다 잊힌 날들을 재회하는 기분이 든다. 이미 돌확은 무정한 한 물건이 아니다. 고향집에나 내 마음에나 정겨운 한 존재다. 긴 세월 ..

좋은 수필 2022.02.11

나무도마/방만실

나무도마/방만실 시댁 둿길을 산책할 때 개골창에 박혀있는 나무토막 하나가 눈에 띄었다. 꼿꼿하게 박혀 서 있는 것이 꽤 그 상태로 오랜 시간이 흘렀으리라 짐작되었다. 가운데 언저리를 이끼가 졸라매듯 옥죄고 있었고 보기에 반쯤은 거무튀튀하게 삭아들고 있었다. 뽑아 드니 숭숭 뚫린 작은 구멍이 여러 개였고 그곳에서 벌레들이 슬슬 기어 나왔다. 그나마 웟부분엔 물이 닿질 않아 나무토막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크고 둥근 옹이가 박혀 있다. 그 옹이는 시커면 몰골에도 눈동자마냥 말똥말똥하게 날 바라보는 듯했다. 그대로 썩히기엔 아깝단 생각에 들고 와 말갛게 씻은 다음 그늘에서 말렸다. 도마라기엔 꽤 두텁고 커 보여 안반인가 싶었으나 가운데에 칼자국이 보이는 걸로 용도는 도마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한창 때..

좋은 수필 2022.02.11

항아리 /방만실

항아리 /방만실 웅덩이 안을 들여다보니 나뭇가지 끝을 담고 활동사진처럼 흘러가는 구름을 보여주고 있다. 열 서너 살까지 그랬듯이 그 안에 발을 담그고 실컷 꾸정거리다 물을 가라앉혀 웃물에 물수제비뜨듯 발에 묻은 모래알을 씻어내고 싶다. 그냥 스쳐가기가 망설여진다. 들여다볼수록 우묵하니 폭 파인 모양이 항아리 속 같다. 그 즈음 우리 집에는 하릴없이 입을 벌리고 빗물이나 받아마시던 큰 독이 있었다. 웅덩이 같은 독이었다. 주둥이에 금이 간 그 큰 항아리를 자주 들여다 보았었다. 항아리를 들여다 볼 때도 내 배경으로 구름이 흘렀었다. 나를 보다가 내 배경을 바라보다가 그도 시시해지면 손으로 휘휘저어 항아리 안이 소용돌이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면 더 이상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배경이고 뭐고 얼굴까지 일그러..

좋은 수필 2022.02.11

묵 쑤던 날 / 박상미

묵 쑤던 날 / 박상미 찬장 양념 칸 한 귀퉁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몰리던 도토리가루를 집어 든다. 겁만 먹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실패하더라도 한 번은 시도해봐야 할 것 아닌가. 매주 금요일마다 교회 할머니들 기도회 중식봉사를 한답시고 설쳐댄 지 몇 달이 지나고 있다. 전부 넷이서 돕는데, 두 사람이 짝지어 당번을 정했으니 격주로 내 차례가 돌아오는 셈이다. 치아가 성치 않은 할머니들이라 거의가 말랑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을 준비한다. 하여 나는 감히 도토리묵을 직접 만들겠다는 야무진 결심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곁눈질으로라도 훔쳐 본 적이 전혀 없던 일이다. 가루 담긴 비닐봉지 건네주던 시댁 앞집 아저씨의 말을 되새긴다. 묵 65대1의 비율로 물을 잡으면 된다고 했다. 곰솥을 꺼내 물의 양을..

좋은 수필 2022.02.11

귀얄 / 박상미

귀얄 / 박상미 웃자란 잡풀들만 마당에 가득했다. 스산한 바람이 불때마다 간신히 매달린 문짝들이 덜컹거렸다. 추억찾기 여행만 아니었다면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을 것이다. 폐가의 전경은 지켜보던 나를 두려움으로 머뭇거리게 했다. 먼저 들어간 남편이 손짓을 했고 둔덕아래서 기웃거리던 나와 딸아이가 두근거리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소품들만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때 묻은 것들에게서 행여 이야기라도 쏟아져 나올까 귀를 기울여본다. 딸아이 눈이 쥐눈이콩 마냥 새카맣게 빛이 난다. 귀신이 나올 것만 같다며 호기심 어린 표정이다. 구석구석 쌓인 먼지가 사람손길이 떠난 두께를 말해주었고 시간의 무게만큼 내려앉은 아랫방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찍는 재미에 푹 빠진 남편 덕분에 덩달아 누려보는 호사이..

좋은 수필 2022.02.11

똬리 / 장미숙

똬리 / 장미숙 동그란 중심이 참 옹골지게 생겼다. 그 작은 몸집으로 온 세상을 떠받쳤으니 어찌 야무지지 않겠는가. 이지러지지도, 모나지도 않은 동글동글 어여쁜 모양새는 맘씨 좋은 시골 아낙 같기도 하다. 소박하지만 단단하기는 또 어떤가. 무엇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부드럽다. 부드러움 속에 감춰진 유연함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힘이다. 융통성은 만물을 소통하게 하는 통로다. 완고하지 않으면서 품어주는 아름다움이 있었기에 수많은 생이 그 안에서 시름을 녹이고 위안을 얻었으리라. 그 무엇도 대신해줄 수 없었던 철저한 외로움과 고달픈 육신을 스스로 위무하며 인고의 탑을 쌓은 수많은 여인네의 한숨이 배어있다. 촘촘한 결 사이사이에 쌓인 설움이 단단한 응어리가 되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만들었다. 그 중심..

좋은 수필 2022.02.10

따배기 / 김용삼

따배기 / 김용삼 온도계가 또 최고점을 갱신했다. 한풀 꺾일 만도 하건만, 태양의 기세는 세상 전부를 태울 듯 나날이 등등하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혹은 형편에 따라 제각각이지만 달포 이상 이어지는 열대야는 종내 입맛까지 잃게 했다. 폭서를 핑계 삼아 지인 몇몇을 꼬드겨 보양의 길을 나선다. 태양의 횡포를 피해 찾아든 곳이 근처의 밤나무 숲이다. 그곳에 내 오랜 단골식당인 '밤나무집'이 있다. 추어탕 하나로 근동에서 이름이 자자한 곳이다. 밥때가 지난 탓에 평소보다는 한산하지만, 뜨거운 추어탕에 코를 박고 앉은 이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그들도 폭염과 맞서기 위해 이열치열의 전법을 동원하나 보다. "와우! 저기 보소. 묘기다 묘기!" 도우미 아주머니가 4인분 상을 통째 머리에 이고 오는 모습..

좋은 수필 2022.02.10

춘풍추수(春風秋水)로 가는 글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 박양근

춘풍추수(春風秋水)로 가는 글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 박양근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러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 /터키의 시인 (1902-1963) 명문장의 종착지점은 있는가. 그것에 다다르면 순결한 영혼에 덕지덕지 붙은 굳은살을 벗겨지련만. 원래의 심성으로 돌아갈 수 있으련만 아쉽게도 명..

수필 이론 2022.02.10

벼랑에 핀 꽃 / 고경서(경숙)

벼랑에 핀 꽃 / 고경서(경숙) - 굳게 닫힌 시간의 수문을 열다 누렇게 익은 보리밭을 지나고, 빈 원두막을 돌아 오솔길로 접어들면 솔향기가 먼저 달려들었다. 밀밀한 솔밭에서 젊은 아버지는 걸음이 느렸고, 나는 펄쩍펄쩍 뛰어가도 자꾸만 뒤처졌다. 그 길을 벗어나면 저수지가 나왔다. 저수지 양옆으로 바다를 밀어낸 해안선과 갈대를 품은 늪지가 있었다. 그 사이를 차지한 방죽이 우리가 즐겨 찾던 낚시터였다. 저수지 수문이 열리는 날이면 아버지는 발목까지 찬 물속에서 낚시를 하셨다. 석축 틈새는 뱀장어들의 은신처였다. 거름더미에서 파낸 지렁이를 일 미터 남짓한 댓살 끝에 미끼로 달았다. 소쿠리 안에는 내 손목보다 굵은 뱀장어들이 뒤엉켜 똬리를 튼 채 미끌미끌한 점액질을 게워냈다. 긴 등짝에 새긴 흑갈색무늬가 선..

좋은 수필 2022.02.10

돌매 / 류영택

돌매 / 류영택 콩콩 마늘을 찧는다. 아래층에 소리가 울릴까봐 사타구니에 백철절구를 끼고 마늘을 찧는다. 절굿공이에 빗맞았는지 메뚜기처럼 마늘한쪽이 절구를 타고 넘는다. 어디로 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손을 뻗는다. 겨우 손이 닿았지만 슬슬 짜증이 난다. 믹스기로 갈면 될 텐데 굳이 절구에 찧어달라는 아내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나는 일에서 놓여나고 싶어 물끄러미 아내를 바라본다. 아내는 보채는 아이 보듯 두 눈을 치켜뜬다.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것 같다. 나는 반항이라도 하듯 쿵쿵 공이를 내리찧는다. "그게, 그렇게 힘들어요?" "믹스기로 갈면 편하잖소!" "찧는 것과 가는 게 같아요!" 아내의 말에 뚱한 표정을 짓지만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내 말마따나 불린 콩을 믹스기에 가는 것은 ..

좋은 수필 2022.02.09

맷수쇠/정원정

맷수쇠 정원정 한낮이다. 길가 목 좋은 모퉁이에 벌여놓은 보자기가게坐商에 들렀다. 무 하나, 애호박 두 개를 사 들고 쉬엄쉬엄 오는 길에, 어찌나 걸음걸이가 팍팍하던지 길녘 벤치에 앉았다. 맞은 편, 눈부시게 하얀 아파트 한끝에 머문 시월막사리 하늘은 푸른빛이 깊다 못해 왕연旺然한 반물빛이다. 지난겨울, 이사한 집의 묵은 때를 벗기느라 힘이 들었다. 그 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 정형외과에 가 보았더니, 엑스선 사진을 살펴본 의사 설명인즉 걸어가다 쉬고 싶을 거라며 척추골 네 개가 협착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게, 어느 시인이 어머니 말투를 빌린 시구에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하듯 나도 그랬던가 보다. 척추는 저뭇한 세월에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끈끈한 묵은 정으로 몸 매무시를..

좋은 수필 2022.02.09

풀매 / 신정애

풀매 / 신정애 두 개의 행성이 맞물려 돌아간다. 드르륵 드르륵! 어처구니를 잡은 손등 위로 더운 김이 솟아오른다. 밖엔 눈이라도 내리는지 소란하던 사위가 고요하다. 미열로 시작된 감기에 잣죽이 좋다며 엄마가 풀매를 돌린다. 따뜻한 방 안에는 어린 내가 누워 있고 대청마루에 그린 듯 앉아있는 엄마의 치마폭에서 솔향기 같은 잣 냄새가 난다. 유년 시절에는 감기를 달고 살았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흐르던 콧물로 코밑은 성할 날이 없었다. 환절기가 되면 편도부터 부어올라 밥보다 죽을 먹은 기억이 더 많다. 뽀얗게 불린 찹쌀과 잣을 풀매에 곱게 갈아 주걱으로 저어가며 끓이면 온 집안에 잣 향기가 아늑하게 퍼졌다. 엄마는 남은 찹쌀가루로 작고 동글납작한 녹두전이나 찹쌀전병을 만들었다. 그 위에 꿀을 듬뿍 뿌려 ..

좋은 수필 2022.02.09

맷돌/주인석

맷돌/주인석 눈이 보살이다. 친정 뒷마당 응달에 측은하게 머리를 박고 있는 맷돌을 발견했다. 박박 얽은 피부에는 집 밖에 산 고생의 흔적으로 이끼가 군데군데 나 있다. 음식 한 번 제대로 못 얻어먹어 그런지 아가리에는 백태처럼 흙이 끼였다. 몰골은 엉망이었지만 아랫돌과 윗돌이 껴안고 있는 모습이 왠지 사람 같아 가엽기 그지없다. 비가 올 때마다 튀어 오른 흙덩이가 곰보 자국에 붙었고 거기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이끼가 뿌리를 내렸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전을 폈다. 편리한 믹서기를 두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어머니는 잔사설이 많았지만 그런 소리보다 내 마음이 더 앞섰다. 어머니는 구경만 하시라 큰소리치며 옛날 기억을 떠올려 남편과 나는 어설픈 두부 만들기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에 맷돌로 곡물 가는..

좋은 수필 2022.02.08

김종태 시집 [풀꽃]에서

♠ 김종태 시집 [풀꽃]에서 ​ ​ 도르르 말려 있는 꽃봉오리 마음을 닮아 연분홍인데 설레는 가슴 피어보면 아무도 보지 않는 서러움에 하늘을 좇아 파란색이다 서 있는 사람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작은 꽃 가슴 한가운데엔 그래도 버릴 수 없는 노란 꿈을 부여안고 실바람에도 꽃마리 가로눕는다 ​ ​ 선선하니 서그러운 분초록 몸매 수수하니 수줍은 보랏빛 얼굴 누군들 원해서랴만 누추한 곳이라도 깔끔하니 끌밋하다 꿋꿋한 여인 하늘을 짝사랑하여 쪽빛으로만 살고프나 몸 속 뜨거운 피는 놔두지 않아 달빛 아래 시퍼런 칼 어제도 갈았구나 흐트러진 심사 오늘도 가다듬네 세 장 바깥 잎 부끄러워 고개 숙이고 세 장 안 잎은 손 모아 기도하네 언제 어느 곳에 어떻게 살더라도 하늘이여 비옵나니 헛된 욕심 버리고 청초한 숨결로만..

좋은 시 2022.02.08

속수무책 / 김경후

속수무책 / 김경후 내 인생의 단 한 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 척하고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 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 절벽에 가서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 독서중입니다. 속수무책 산다는 것, 속수무책의 페이지들을 읽어 내려간다는 것. 대책도 없이 대책을 모색할 시간에 속수무책의 페이지들이 넘어간다. 타들어간 꽁초들과 함께,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을 지나 진흙참호 속을 지나 당신은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바다절벽으로 향한다. 속수무책, 이것이 당신이 세운 유일..

좋은 시 2022.02.08

노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은/황진숙

노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은/황진숙 병원 대기실에서 코로나 백신을 맞으려는 방문객에게 문진하기 바쁘다. “최근 14일 이내 백신 안 맞으셨어요?” “그러믄유.” “백신 접종 후 알레르기 반응 나타난 적 있으세요?” “아이, 그런 거 없어유. 골치 아픈께 물어보지 마유. 여기 노다지 다니는 사람인데유.” 만사가 귀찮다는 듯 창수씨는 쇳소리로 되받아친다. 수액실에서는 간난씨가 소리를 지른다. “아이고, 사람 죽이네. 큰 바늘로 찌르니까 아프잖어.” 작은 바늘이라고 설명하는 간호사의 말에도 간난씨는 병원이 울리도록 목소리를 높인다. “워매, 누가 모를 줄 알고. 내가 큰 병원 다녀봐서 다 알어. 어디서 그짓말이여.” 수액이 들어가자 겨우 진정이 된다. 세월을 먹은 당신은 이방인 차지다. 혈압 당뇨가 불침번을..

발표작 2022.02.07

생각 따로 말 따로 / 홍혜랑

생각 따로 말 따로 / 홍혜랑 학기말이 되면 자신의 학점이 생각했던 것보다 덜 나왔다고 문의하는 학생이 간혹 있다. 학생의 짐작이 맞다. 특히 주관식 서술형이 아닌 외국어의 경우는 시험 본 당사자의 채점이 어지간히 맞아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딴 사람들이 시험을 잘 보면 본인의 점수가 내려가고, 딴 사람들이 시험을 못 보면 본인의 점수가 올라간다'는 상대평가의 성적 산출 근거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설명을 듣고 난 학생은 체념이 빠르고도 명료하다. 그럴 적마다 마음이 우울한 건 오히려 내 편이다. 이미 수없이 많은 상대적 경쟁의 터널을 지나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상대평가라는 잣대는 그들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핸드폰의 존재만큼이나 친숙하고도 당연한 것 같다. 나의 능력, 나의 노력대로가 아니라..

좋은 수필 2022.02.07

분이/김아가다

분이/김아가다 곱다. 꽃 속에 파묻힌 어머님이 웃고 계신다. 향년 100세. 상객들이 모두 호상이라면서 웃고 떠들썩하니 잔칫집을 방불케 한다. 너도나도 망자와 얽힌 추억을 회상하면서 술잔을 기울인다. 사진 속을 걸어 나온 어머님이 기웃거리며 자손들 이야기에 참견하고 다니시는 듯하다. 무연히 타고 있는 향불 연기 속에서 이태 전의 일이 떠오른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님께 생신을 축하드린다면서 꽃바구니를 안겨드렸다. “오늘이 이월 열사흘이냐?” 그 말씀에 깜짝 놀랐다. 머리끝이 치솟는 느낌이었다. 간간이 정신 줄을 놓으시더니 자식도 못 알아보고, 아득한 과거 속으로 묻혀 지낸 지 오래되었다. 자식들 얼굴도 못 알아보는 처지에 생일의 기억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월 열사흘은 어머님께 어떤 의미였을까? 단순한 ..

좋은 수필 2022.02.04

놋그릇/서소희

놋그릇/서소희 놋그릇을 닦는다. 거친 수세미에 모래를 묻혀 서걱서걱 소리가 나게 문지른다. 온몸에 앙금이 되어 까맣게 붙어 있는 세월의 흔적을 벗겨낸다. 검은 녹이 흩어지며 표피가 오래된 침묵을 밀어낸다. 저 작은 물건이 삶의 고달픔을 검은 녹으로 껴입고 있었던가 보다. 사지를 포박하며 피어났던 푸른 녹이 겹겹이 쌓여 꺼멓게 될 때까지 놋그릇의 운명도 묶여 버렸는지 모른다. 새삼 아무 꾸밈없는 소박한 물건이 한 세상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팍팍한 것인지를 느끼게 해 준다. 한참 만에 광택을 잃은 그릇의 표면이 거친 물질에 의해 땟자국을 벗어갔다. 우악스러운 손놀림만으로 누런색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한다. 녹이라는 것은 몸의 한 귀퉁이와 함께 헐어내야만 사라지는 것인 모양이다. 시간의 흔적을 헐어낸 자리에는..

좋은 수필 2022.02.04

둑길/함명춘

또 갈 곳 잃어 떠도는 나뭇잎이랑, 꼭 다문 어둠의 입속에 있다 한숨처럼 쏟아져 나오는 바람이랑, 상처에서 상처로 뿌리를 내리다 갈대밭이 되어버린 적막이랑, 지나는 구름의 손결만 닿아도 와락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별이랑, 어느새 잔뿌리부터 하염없이 젖기 시작하는 풀잎이랑, 한 줌의 흙 한 그루의 나무 없인 잠시도 살 수 없는 듯 어느 결에 맨발로 내려와 둑길을 걷는 달빛이랑 ㅡ함명춘(1966-- ) 책의 옛 사진을 보다가 지금의 내 사는 동네를 만나 반가웠습니다. 반쯤 부서진 살곶이 다리 풍경이었는데요, 돌다리 저편 뚝섬 언덕 위가 아름다운 ‘둑길’이었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곡선으로만 이어진 그 생명 가득한 길 위에 어린아이들이 노는지 걷는지 아득한 몇 점으로 보였는데 보나마나 신이 났겠습니다. 그 둥긂..

좋은 시 202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