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등잔/신현림

등잔/신현림 불이 켜지면 마음은 더 이상 먼 데로 가지 않고 내 안으로 향한다. 홀로 있을 때의 외로움은 자아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해주고, 사람들이 모이면 등잔불은 가장 아름다운 빛을 뿜어낸다. 손의 감촉은 더 예민해지고, 사랑하는 자들의 손길은 더 부드러워진다. 까무잡잡한 얼굴은 빛나는 구릿빛으로 바뀌고, 흰빛의 얼굴은 은은하게 달빛으로 끌어당긴다. 하루 동안 노동으로 지친 기분은 평화롭고 아늑해진다. 쓸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도 무엇이든 잘될 것 같은 기분으로 바뀌니 이 아담한 전등불은 밤 속에서 더욱 신비롭다. 등불을 보면 ‘생을 마감한 뒤에 남는 것은 그가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나눠줬던 것’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등잔의 철학이 바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사람에게 빛을 나눠주는 것..

좋은 수필 2022.01.22

석유풍로/김해준

심지에 성냥불을 붙이면 검은 연기와 함께 석유 냄새가 올라온다. 그을음을 먹은 풍로는 비린 향을 품고 내가 지나온 공간의 한편에 자리 잡는다. 불꽃을 품고 배경을 흔드는 등으로, 또는 쌀 두 홉을 안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의 그림자로 어른거린다. 허기진 사람의 무력감을 해방하는 풍로는 그 공간에 갇힌 사물을 부조로 파낸다. 끝만 타버린 성냥개비 같은 머리통을 하고 잠드는 밤이면 나는 유년 시절과 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누이고 잠이 든다. 사람을 끌어안고 잘 때와 같이 풍로의 온기 속에는 불씨가 존재한다. 타인의 숨소리를 받아주는 여유를 갖고 귀 기울이면 맥박이 느껴진다. 캄캄한 부엌에선 지난 시간이 고스란히 쌓여간다. 나는 그때의 기억으로 불꽃을 본다. 산막에서 야영을 하거나 계류낚시를 할 때면 나의 몽..

좋은 수필 2022.01.22

지게/문태준

지게/문태준 나의 아버지는 평생 지게를 지셨다. 지게를 벗은 적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에게 지게는 등짝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지게를 업고 다니셨다. 논과 밭과 산과 하늘을 업고 다니셨다. 빈 지게를 지고 나가셨다 땔나무를 지고 돌아오셨다. 빈 지게를 지고 나가셨다 풀짐을 지고 돌아오셨다. (풀짐을 지고 돌아와 풀더미를 부려놓으면 저무는 내내 울안에는 동실한 풀냄새가 흘러넘쳐났다!) 빈 지게를 지고 나가셨다 봄과 가을과 겨울을 지고 돌아오셨다. 골짜기 깊은 곳에 들어가셨다 소낙비와 검은 구름과 눈보라를 지고 오셨다. 지게에는 늘 뭔가가 실려 있었으므로 지게는 포만(飽滿)했다. 흘러넘치도록 가득가득 차 있었으며 묵중했다. 지게에는 낫과 도끼와 톱과 삽과 괭이와 써레와 쟁기 등속이 실려 있었다. 가끔 멀리..

좋은 수필 2022.01.22

약속도 없이/전영관

약속도 없이 전영관 하룻밤 물에 불린대도 멥쌀의 찰기로는 허기를 채우지 못할 거 같아 찰밥 해드려야 안심이지 싶은 사람 하나 있다 수수꽃다리가 조청만큼 달달하니 서둘러 왔는데 늦었다 해도 넘겨줄 수 있겠다 찬 없는 두레상에 모셔도 결례는 아니려니 어스름 무렵에야 찹쌀 뼈가 다 무르면 만월과 겸상으로 올려드리련다 비린 것 한 토막을 앞으로 밀어놓고 잔가시 없는 등 쪽으로 떼어드리련다 숭늉 권하는 동안도 꽃은 피고 봄은 뜸 들고 여름을 당겨올 것처럼 눈빛이 짙어지리라 창밖으로 만발한 이팝나무 숭어리가 보인다 바람으로 씻고 늦은 안개에 불려 헛밥이나 짓는다 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봄을 다잡아보려 찰밥이라 고집 부리는 것이다 내 것인지네 것인지도 모르게 뒤엉겨 어쩔 수 없으니 주저앉자고 생떼라도 써볼 사람을 기..

좋은 시 2022.01.22

세업 / 최태랑

세업 / 최태랑 아버지의 몸에서 언제나 돌 깨는 소리가 났다 그 차디찬 돌에도 뜨거운 피가 흐르는지 쩡쩡, 손끝에서 불꽃이 일었다 눈이 밝은 아버지, 돌 속에 숨은 거북이도 꺼내시고 사자, 호랑이도 불러냈다 먼지 푸석이는 소리로 밥을 짓던 아버지 열손가락을 다 버리시더니 돌을 반죽하기까지 칠십 년이 걸렸다 열 개의 지문을 다 핥아먹고 돌덩이들은 비로소 몸을 열어주었다 돌의 혈관을 찾고 심장을 찾아 숨을 터주는 것을 천직이라고 믿으셨을까 막힌 혈을 찾아 엎드린 아버지 새벽잠을 털고 일어설 때면 소리도 함께 일어섰다 한 자 한 자 각을 세운 비문의 이름들 어느새 묘비는 이끼가 끼고 어디론가 엉금엉금 기어간 거북이들은 어느 정원에 탑이 되어 앉아있을 것이다 평생 남의 이름만 쓰다가 당신 이름 석 자도 새기지 ..

좋은 시 2022.01.22

아버지의 연필 /전영관

아버지의 연필 전영관 풍구의 회오리가 가슴께를 후려친다 갈탄의 낭자한 선혈 사이로 피 맛을 본 강철이 달아오른다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강철연필은 학력편차가 크다 몇 자의 비문만 학습한 경우가 있고 공덕문을 줄줄이 암기하는 실력파도 있다 까막눈 돌쟁이는 단지 내장된 글자들을 강철연필로 파내는 것뿐이다 거북이나 두꺼비를 만나 호되게 당하기도 한다 환절기에는 떠나는 사람들 많다 해마다 반복되는 덕분에 그의 한문 실력도 지명이나 이름자에 두각을 나타냈다 담금질로 단단해지는 것은 강철뿐 돌쟁이의 가슴은 반비례로 물렁해졌다 구부리는 법을 터득한 까닭에 굽실거렸어도 칠십 평생 부러지지 않았다 그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덕분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 적 있다 아버지는 물푸레나무들과 뒷산으..

좋은 시 2022.01.22

귀촌/전영관

귀촌/전영관 ​ 오후 네 시의 햇살은 손이 느리다 옆집 숟가락까지 챙기는 산촌의 오지랖처럼 호박이며 무와 가지까지 매만진다 당신은 등 돌리고 앉아 오가리들과 자분자분 비밀이라도 있는 듯 들췄다가 남이 들을까 가만히 덮고 여고 동창생 표정으로 내가 모를 것을 나눈다 겉마르기 전에는 탱탱했으니 사소한 것들도 내남없이 화려했던 날은 있는 것이다 ​ 마음 단단히 먹어야 귀촌한다고 우쭐대면서 진지한 척 머리로만 예행한다 조붓한 당신 뒷모습을 콩밭에 앉혀놨다가 주방으로 가는 걸음걸이를 파스 사러 읍내 나가는 길 위에 올려본다 서울 새댁 곱다느니 머리숱도 많다느니 허리 굽은 인사말을 붙이며 노인네들도 동행하겠지 읍내 나갔으니 중국집까지 들르겠지 ​ 아내는 콩밭에 앉히고 읍내 심부름이나 시키고 녹슨 보습만큼 게으른 나..

좋은 시 2022.01.22

생선을 구으며/전영관

생선을 구으며 전영관(1950~2016) 중간불로 뒤집고 약한 불로 다시 뒤집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일상의 알몸을 통째로 굽는다. 노릇노릇 구워져 하루의 밥상에 오를 때까지 타오르는 열기 속에서 뒤집히고 또 뒤집힌다. 탁탁 소리 내며 반항하고 싶은 젊은 날도 있었지. 큰 불만 고집하다가 상처까지도 모두 태운 때도 있었지. 비린내가 풍긴다. 비린내가 묻는다. 한 끼의 맛있는 밥상을 위해 인내를 해야 하는 많은 시간들이 훨훨 날지 못하는 시든 지느러미 날개가 되어 불꽃 속으로 사라진다. 내가 피웠을 냄새와 연기 지금쯤 어느 자리에 엉겨 붙어 부끄러운 모습으로 녹슬어 가고 있는지. 어느 가슴에 남아 아프게 하고 있는지. . 시인은 생선을 구우며 시 한편도 같이 구웠으니 그는 다만 아침상을 차린 것이 아..

좋은 시 2022.01.22

울음의 인연/손창기

울음의 인연 손창기 왕릉 곁에서 손을 펴고 있으면 생명선의 어느 마디가 죽은 자의 입김이라도 받은 듯 손금에 얼마큼 보태지고 있는 느낌 지긋이 손금의 인상을 흐뭇해하지만, 죽은 자는 내 손금을 꼭 무인상武人像의 손금과 닮았다고 말한다 손바닥에 전생이 흘러왔을지도 모른다 이미 내 안에 얼마간 살고 있는 고구려 안시성을 지킨 도부수이거나 신라왕을 호위한 아랍인이거나 친일파를 척결한 아나키스트이거나 서글픈 귓불을 만지면 토막 난 삼생의 길을 잇는 새소리, 천 년 전에 조율되고도 다시 울리는 현들 구부정 소나무 속 수억 광년 떨어진 후투티 울음의 인연을 나는 모른다 무인의 칼날 위를 스쳤던 새의 조상으로부터 어떤 새는, 무인의 목청을 새겨두고 있었을까 새소리 전에는 전생이거나 새소리 후에는 후생이거나

좋은 시 2022.01.22

나무 한 그루를 읽는 동안 / 최지안

나무 한 그루를 읽는 동안 / 최지안 여름이 문을 닫고 간다. 변심한 애인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그렇더라도 여름이 남긴 발자국은 아직 푸르다. 보리수도 한창이다. 봄에 빨간 열매가 골목을 환하게 밝혀주던 나무다. 키가 크지 않아도 열매를 달았다는 자부심도 있었으리라. 인심도 좋아 동네 아이들이 오며가며 따 먹어도 부러 가지를 내어주고 본척만척하였으리라. 많은 열매를 품고도 나무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고작 열 개가 채 못 된다. 아마 나무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몸에 달렸어도 자신이 가져갈 수 있는 양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아이의 손이 놓치거나 바람에 실족한 것들이 보리수의 몫이었다. 제 발밑에 오종종하게 떨어진 것을 내려다보며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나마도 몇 개는 개미나..

좋은 수필 2022.01.22

마늘 까던 남자 / 민 혜

마늘 까던 남자 / 민 혜 언젠가부터 마늘을 까는 일은 그 남자의 몫이 되었다. 퇴직하고 하릴없이 늙어가는 터수에 아내를 도와 마늘 좀 깠기로서니 유난 떨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분명 이변이요 사건이었다. 왕년의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스스로 밥 한 끼 챙겨먹지 못했으며 자기 마누라가 허리 다쳐 누워 있을 때도 설거지 한번 도와주지 못했던 남자였으니 말이다. 퇴직하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집밥 먹는 남자를 ‘삼식이’라 한다는데 그는 정말 집 밖에 모르는 원조 삼식이었다. 착실한 삼식이 생활로 접어든지 어언 6년, 까칠해진 마누라의 눈치를 의식한 거였을까. 어느 날 그는 아내인 내가 바가지에 수북 담아 놓은 마늘을 보더니 까주겠노라고 자청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몇 해 전만 해도 김장철에 마..

좋은 수필 2022.01.22

몌별 / 황선유

몌별 / 황선유 온통 붉은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벌겋게 물든 바다와 하늘과 그 경계에서 타는 햇귀. 달리 말이 없으니 일출인지 일몰인지조차 모른 채, 망아의 일순간. 시선을 타고 들어온 붉은 바닷물이 심장의 피와 섞여 전신을 붉혔다. '붉다'를 잇는 다음은 필시 '유혹'일 터. 무어 확답도 없이 바삐 길을 나섰다. 막상 당항포의 일몰은 시시했다. 순천만의 장엄함과는 한참 멀다. 채석강의 홀림도 다대포의 아련함도 아니다. 색도 힘도 반이나 잃은 햇발은 쓸데없이 길어 성가시기만 하다. 썰물로 잦감이 된 개펄에 조개껍질만 듬성하다. 저만치 나앉아서 해안도로와 멀어진 바다가 겉만 불그스름하여 아쉬운 일몰의 면치레를 한다. 열린 차창으로 물바람이 좀 낫다. 죽 이어진 해안길의 상수리나무들이 헐벗었다. 다옥했을..

좋은 수필 2022.01.20

시간을 읽다 / 박종희

시간을 읽다 / 박종희 시간은 기억의 방이다. 아주 내밀하게 드나들 수 있는 나만의 통로다. 문을 열면 아스라이 멀어져 간 추억이 머물고, 손을 뻗으면 놓치고 싶지 않았던 순간이 닿을 듯한 그리움의 곳간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애써 떠올렸던 흔적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오히려 통증만 남겨두는 시간의 속을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지나간 시간을 열면 그리움과 아픔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하루가 다르게 조바심 내던 시간이 마침내 어머니의 손을 놓았다.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지 8개월 만이었다. 단, 1분 만에 생과 사를 정확하게 갈라놓은 시계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초침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이승에서 어머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사흘뿐이다. 한정된 시간은 야속하게도 융통성이 없다. 어머..

좋은 수필 2022.01.20

숨비소리 / 김미향

숨비소리 / 김미향 잔잔한 물면을 뚫고 열정을 뿜어대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부레를 부풀려 다시 물속으로 사라지는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사뭇 나를 붙들어 앉힌다. 시간조차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듯한 짙푸른 바다를 나는 미동도 없이 바라다본다. 태초의 바람으로 돌아가는 양 희푸른 바닷바람은 까마득한 기억을 건져 올린다. 어머니의 눈물은 바닷물보다 짰다. 언니, 오빠의 등록금 때문에 골목골목 다니며 남에게 하소연하는 어머니의 일상은 언제나 고달파 보였다. 한뎃솥 앞에 앉아 치맛단을 뒤집어 눈가를 닦는 어머니의 그 모습에서 학비 마련을 위해 스스로 해녀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바다를 끼고 있는 고향이기에 해변 여자들만의 본능이 내게도 잠재되어 있었던 것일까. 열다섯 살 먹..

좋은 수필 2022.01.19

물을 달래다 / 김현숙

물을 달래다 / 김현숙 물이 끓는다. 차(茶) 한 잔이 되기 위해 물은 지금 뜨거운 주전자속에서 제 살을 뜯고 있다. 가혹한 끓는점에서 사정없이 부서지고 있다. 상처투성이가 된 물을 찻잔에 부어놓고 후우, 후우, 입김을 불어 달랬다. 나는 그렇게 찻물을 달랜다. 알맞은 온도도 없고 따라야 할 다도(茶道)는 더욱 없다. 입 바람을 타고 물결이 켜를 지으며 찻잔 벽에 가 부딪혔다. 늙은 찻잎은 미처 갈무리되지 못한 잔결 사이를 파고들어 물의 깊은 속살까지 찢어놓고 수몰되어버렸다. 그 갈라터진 살갗에 신록 빛의 새살이 차면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니다. [찻물을 달래다] 지난겨울, 나는 모처에 있는 찻집에서 이 문구를 처음 봤다. 흰 광목천으로 만든 조각보에 주인을 닮은 글씨체가 수(繡) 놓여있었다. 주인 여자..

좋은 수필 2022.01.14

그릇의 종류

가. 그릇의 종류 귀박:나무를 직사각형으로 네 귀가 지게 파서 만든 함지박. (예)저 귀박에 담아둔 밤은 작은댁에 보낼 거니까 손대지 말아라. 대고리:대오리로 엮어 만든 고리. (예)그는 부업으로 대고리를 만들어 파는데 플라스틱의 유해성이 알려지면서부터 눈코 뜰새 없이 바빠졌다. 댕댕이바구니:댕댕이 덩굴의 줄기로 엮어 만든 바구니 (예)길녀는 그 사내를 보자 댕댕이바구니를 내팽개친 채 도망치기 시작했다. 동고리:둥글납작한 작은 버들고리. (예)삼십년 넘게 쓴 어머니의 반짇고리는 바로 시집 오실 때 가져 오신 동고리 였다. 동방구리:동이보다 배가 부른 질그릇 (예)동방구리에 쌀을 가득 담아 두었는데 장마가 지니까 바구미가 득실걸렸다. 밀박:큰 바가지 (예)어른 하나가 들어가도 충분할 그 큰 독의 물도 밀박..

향기로운 글 2022.01.11

매화/한광구

매화 한광구 창가에 놓아둔 분재에서 오늘 비로소 벙그는 꽃 한 송이 뭐라고 하시는지 다만 그윽한 향기를 사방으로 여네 이쪽 길인가요? 아직 추운 하늘문을 열면 햇살이 찬바람에 떨며 앞서가고 어디쯤에 당신은 중얼거리시나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 하나가 매화꽃으로 피었네요. 매화꽃으로 피었네요. 이쪽 길이 맞나요? ―한광구(1944∼) 좋은 것 중에서도 드문 것에 대하여 우리는 ‘귀하다’고 표현한다. 매화도 그중의 하나다. 봄날의 꽃은 많아도 혹한을 이기고 피는 꽃은 드물다. 옛 선인들은 백매화를 보면 깨끗하다 칭송했고 홍매화는 보면 신비롭다고 사랑했다. 그들에게 매화는 결코 물체가 아니었다. 그 속에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화분 안에 심겨 있는 것은 분재가 아니라 일종의 마음이었다. 역사상 매화..

좋은 시 2022.01.10

눈과 손의 위상에 관한 형이하학적 고찰/최민자

눈과 손의 위상에 관한 형이하학적 고찰 최민자 사람의 신체에서 눈과 손처럼 돈독한 사이도 없다. 그림을 그리거나 바느질을 하거나, 물건을 고르고 과일을 깎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눈과 손은 함께 일한다. 눈이 손을 이끄는 건지 손이 눈을 거드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좋은 일 궂은일을 함께 도모하며 먼 듯 가까운 듯 일생을 살아낸다. 눈을 최고사령부의 파수병이라 치면 손은 변방의 행동대원이다. 위치로 보나 생김으로 보나 가까운 촌수는 아닐 성싶은데 무슨 연고로 의기투합하여 상부상조를 하게 된 것일까. 둘 다 말단이니 상명하복(上命下服)이 통할 리 없고,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으로 소관부처마저 다른데 말이다. 어쨌거나 무관한 듯 유관한 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역학구조에는 미심쩍으면서도 꽤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

좋은 수필 2022.01.05

억새의 노래 / 나대영

억새의 노래 / 나대영 ‘여백(餘白)을 가득채운/저 숨가픈 날갯짓,/꿈꾸는 세상(世上)은/아직도 아득한데/바람이/키운 씨앗들/눈꽃으로 피어난다.//무위(無爲)로 뿌려놓은/수많은 아우성,/별빛에 씻기우다/꽃등에 맺힌 이슬은/어쩌다/서럽게 흘린/눈물인 줄 알았다.//세월(歲月)뿐인 산등성이/적막(寂寞)도 인연(因緣)이니/덩실덩실 춤추고/허공을 걷노라면/무심한/가을 노을도/너털 웃음 터뜨린다.’ ​ 한 계절 아름다운 채색(彩色)과 향기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장미나 모란, 국화 등은 대부분 사람의 손으로 애지중지하며 가꾸어진다. 그에 비해 억새풀은 결코 뭇사람들의 관심을 갖고 자라나는 풀이 아니다. 물론 화려한 빛깔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짙은 향기를 품어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찌 보면 빈 공간에..

좋은 수필 2022.01.05

눈꽃막사발 / 류영택

눈꽃막사발 / 류영택 봉긋한 모양새다. 보기만 해도 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어쩜 저렇게 닮았을까. 건조대에 엎어놓은 막사발이 여인의 젖가슴 같아 보인다. 주방 한쪽에 놓여있는 상자에는 그릇이 담겨져 있었다. 이게 웬 건가.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는 누가 빼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귀엣말로 ‘새미골 가마터’에서 빗은 하동막사발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잘도 참는다 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군.” 아내는 영화 취화선 촬영장을 다녀온 후 막사발을 사고 싶어 안달을 했었다. 이럴 때 아내의 기분을 맞춰주면 좀 좋을까. 나는 그릇을 살피다말고,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다며 맥 빠지는 소리를 했다. 내 말에 기분이 상했던지 환하게 웃음 짓던 아내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나. 졸지에 분..

좋은 수필 2022.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