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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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이야기 / 류미월

숟가락 이야기 / 류미월 몸이 지쳐 힘들 때 뜨거운 죽이나 국물을 휘휘 훌훌 떠먹다 보면 힘이 솟는다. 기운을 북돋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도구가 숟가락이다.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노숙자든, 연예인이 든, 기업 총수든, 아니면 최고위 권력자는 신분과 직업에 관련 없이 밥을 먹을 때는 누구나 숟가락을 사용한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 금수저나 은수저뿐 아니라 놋수저도 찾기 힘들다. 보통 우리네 밥상에 오르는 것은 스테인리스 숟가락이다. 최근에는 수저에 계급론이 불거져 언론에 자주 오르내린다. 금수저들이 갑질을 하는 오만함을 접할 수 있고 금수저나 은수저로 태어나지 못 한 흙수저들의 가슴 시린 애환도 종종 등장한다. 숟가락은 흥겨울 때는 밥상을 두드리는 타악기가 된다. 작거나 큰 밥상에 둘..

좋은 수필 2021.12.24

달달한 자궁 / 피귀자

달달한 자궁 / 피귀자 칼맛을 보더니 더 독해진 걸까. 날 선 칼을 튕기며 길을 내주지 않는 단호박. 남반구의 강렬한 햇빛이 키운 완강한 근육을 진작부터 알아봤지만 이리 돌 같을 줄이야. 칼의 길을 더 이상 용납 않는 호박과의 씨름이 낭패스러웠다. 겉가죽이 검푸른 단 호박 한 덩이를 샀다. 작은 크기에 비해 묵직한 뉴질랜드산 호박이다. 깨끗한 공기와 끝없이 푸른 들판을 머금은 환경은 직접 보기도 했지만 숨긴 속내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 먼 길을 돌았어도 상처 하나 없이 암팡지게 내려앉은 모습이 유장하기까지 하다. 말쑥하게 목욕시키고 식초 단장까지 마친 후 자르려고 칼을 넣었다. 처음부터 이가 약한 세라믹 칼을 들고 설친 게 실수였다. 칼끝을 날리고서야 겨우 빼내고 무쇠 칼로 바꾸었다. 쇠 칼날을 물..

좋은 수필 2021.12.21

파도에 너울거리는 비릿한 것들/마경덕

파도에 너울거리는 비릿한 것들 짜고 비릿한 것들이 내 기억 속에서 출렁거린다. 녹슨 양철지붕을 흔들던 사나운 바람 소리, 갯바위에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 수정처럼 맑은 물의 뼈들, 길게 뱃고동을 울리며 장군도를 지나가던 여객선, 아득히 수평선 너머로 멀어지던 통통배 소리, 끼익끼익 적막한 밤바다를 헤집는 노 젓는 소리ⵈ 모두 바다의 숨소리였다. 밤바다는 내 머리맡까지 밀려와 철썩거렸다. 지척에 있는 장군도에 해마다 벚꽃이 피고 홀로 봄이 다녀갔다. 사람이 살지 않던 장군도는 급류가 흘러 가깝고도 먼 섬이었다. 마을 아낙들이 장군도까지 씨알 굵은 조개를 캐러 가다가 거친 물살에 배가 뒤집혀 죽을 뻔했다고 숙모는 몸서리쳤다.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우리 마을은 술병, 화병(火病)에 골병들고 노름과 폐병으로 가..

좋은 수필 2021.12.19

사람 지나간 발자국/이경림

사람 지나간 발자국 사람 지나간 발자국 이경림 아름다워라 나 문득 눈길 머물러 그것의 고요한 소리 보네 누군가가 슬쩍 밟고 갔을 저 허리 잘록한 소리 한참 살다 떠난 부뚜막 같은 다 저문 저녁 같은 ―이경림(1947∼) 사랑시에서 고독은 좋지 않은 것이다.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마주 보는 둘이 있어야 하니까, 홀로 있는 고독이 좋을 리 없다. 고독한 연인은 이별 앞의 연인이다. 혼자서 하는 사랑은 슬픈 사랑이다. 그렇지만 사랑시를 제외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시와 고독은 오래전부터 유명한 짝꿍이었다. 슈타이거라는 이론가가 정리하기를, 서정시는 대체로 고독의 공간을 다룬다고 했다. 혼자 고요히 앉아, 삶과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은 분명 ‘시적인 시간’이다. 이것이 단 오 분이라도 주어지면 우리는 좀 충..

좋은 시 2021.12.19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피재현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피재현 아버지는 가을이 깊어지면 감 따러 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나는 감 따는 게 싫어 짜증을 냈다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아느냐고 감 따위 따서 뭐 하냐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다시 가을이 왔을 때 엄마는 내게 말했다 니 애비도 없는데 저 감은 따서 뭐 하냐 나는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톱을 내려놓고 오래도록 울었다-피재현(1967∼) 시를 읽으러 오신 분들은 모두 시의 손님이다. 손님께는 물 한 잔이라도 정성껏, 맑은 차라도 계절에 맞게 드리는 법. 그래서 봄에는 꽃과 나비의 시를, 겨울에는 흰 눈과 쓸쓸함을 준비하곤 했다. 그러니 오늘, ‘별이 빛나는’ 시를 준비한 것이 어색하지 않다. 늦게까지 별을 올려다보는 계절은 여름날이니까. 나아가 감나무 이야기를 준비한 것도..

좋은 시 2021.12.19

낙타가시나무 / 김삼복

낙타가시나무 / 김삼복 매번 낯선 길이다. 여러 겹의 얼굴을 가진 사막 안, 밤새 돌개바람이 별빛을 뿌렸는지 다져놓은 발자국은 노란 모래로 덮여 있다. 꾸역꾸역 마른 바람이 나를 떠민다. 엊그제 살짝 삐끗한 발목이 시큰거린다. 내가 들어가는 곳은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 한복판, 사구 위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건물 속이다. 그 속에서 온종일 길을 찾고 먹이를 구하려 서먹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목에 사원증을 걸고 컴퓨터를 보며 일하는 그들 또한 먹이를 벌기 위해 주눅 든 사막여우들이지만 나에게는 고객님이시다. 잘 차려입은 여직원 손에 구수하게 내린 커피가 들려 있다. 아침 식사를 커피로 대신하는 그녀에게 식사 대용 전단을 주었다. 커피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나에게 눈길 한번 없이 새침하다. 숙취로 눈이 빨간..

좋은 수필 2021.12.18

각시붕어에게 쓰는 편지/윤영

각시붕어에게 쓰는 편지/윤영 각시붕어에게 쓰는 편지장맛비가 사나흘 내리더니 무논에 미꾸라지가 살이 제법 올랐더라.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도 네가 읽을 수 있을까? 몇 번 생각했지만 결국 내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버렸어. 사실은 그날 내가 많이 힘들었어. 정사각형이 되고 싶었지만 꼭짓점 하나 떨어져 나가 버리고 삼각형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은 날엔 그 강가로 훌쩍 떠나 물속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는 거 너도 알고 있었을 거야. 다층의 집을 짓고 아웅다웅 눈에 불을 켜듯 살아가는 물 위의 세상과는 다르게 수면 아래 풍경은 고요 그 자체더라. 이끼를 덮어쓴 채 바위에 붙어 있는 다슬기, 자갈 더미를 쿡쿡 쪼다가 이방인의 숨결을 느꼈는지 바위틈으로 쏜살같이 숨어버리는..

좋은 수필 2021.12.18

가을 손/이상범

가을 손 가을 손 이상범 두 손을 펴든 채 가을 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 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이상범(1935∼ ) 땅 파서 장사하는 사람 없고, 남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인생을 보라. 가는 게 있어도 오는 게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분명히 줬는데 남들은 기억도 못 하는 경우는 더 많다. 준 것과 받을 것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미움이 깃든다. 내 마음과 시간, 재물과 ..

좋은 시 2021.12.17

돌아오는 길/김강태

돌아오는 길/김강태 ……춥지만, 우리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 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보기 희망 한 단에 얼마예요? ―김강태(1950∼2003) SF(Science Fiction) 영화에는 외계인도 나오고 우주선도 나오니까 황당한 거짓말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SF의 묘미는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같은, 더 낯선 상상력에 있지 않다. 이 장르의 본질은 인간 바깥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라는 명제에 있다. 사람 아닌 자의 눈에 비친 사람은 어떠한가, 혹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걸 탐색하는 것이 SF 장르다. 차가운 AI와 인조인간 사이에서는 뜨거운 인간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런 심정으로, 우리는 추운 겨울날을 맞이하여 따뜻한 것들을 그리워하고 ..

좋은 시 2021.12.17

꿈 다 잊으려고/정양

꿈 다 잊으려고 정양 밤마다 꿈을 꾸어도 아침마다 대개는 잊어버리고 어쩌다 한 토막씩 말도 안 되게 남아 있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나 잊어도 좋은 꿈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고, 꿈꾸며 살 날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잊었나 사는 게 잊어버리는 연습이라면 말도 안 되게 남은 꿈들은 언제 다 잊을 것인가 그 꿈 다 잊으려고 아침마다 잠이 모자라나보다 아침마다 말도 안 되는 몇 토막 그리움으로 모자란 채로 나는 남는다 정양(1942년∼) 박태원의 소설 중에 ‘적멸’이라는 작품이 있다. 1930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소설인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인생은 꿈이다. 그리고 인생이 좇고 있는 것도 꿈이다.” 무려 90년 전에 박태원은 이미 알았던 것이다. 인생..

좋은 시 2021.12.14

녹/이두래

녹/이두래 호미는 죽은 듯 보인다. 꼿꼿한 몸에 고개를 외로 꼬고 누워 온몸은 말라붙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사람 손에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났을 호미자루는 잡으면 바스러질듯 거무죽죽하고 촘촘히 갈라졌다. 날이 부러져 버린 곡괭이 자루엔 이름 모를 버섯까지 뿌리를 내렸다. 버섯의 생장은 그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곡괭이의 야무졌던 이빨에는 여지없이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하고 그들의 죽음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였을 것이다. 낫이며 쇠스랑, 곡괭이, 호미 등 그것들은 소용되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아래채 처마 밑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맏형 격인 경운기는 아래채 소 마구간에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소출 많은 상답上沓을 갈고 추수한 곡식들 실어 나르느라 달달거리며 바빴을 경운기..

좋은 수필 2021.12.12

칼과 도마/심선경

칼과 도마 / 심선경 악연이다. 너와 나 사이엔 오로지 끊임없는 전쟁만이 계속 될 뿐이다. 그 뻔뻔한 낯짝이 이제 막 물오른 듯한 싱싱한 야채를 만나 어떻게 요리해볼까 깐죽대는 꼴이란 차마 두 눈 뜨고는 못 볼 만큼 아니꼽다. 너는 유달리 고깃덩이를 선호했다. 정육점에서 뭉텅이로 잘라 온 아직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홍두깨살을 보는 네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네 몸 위에 던져진 제물을 향해 너는 사악한 뱀처럼 혀를 내밀어 그 뜨거운 피를 빨아들인다. 너의 몸과 더불어 뒹굴던 다른 매운 몸들이 질투로 활활 타오른 내 손에 의해 으깨어지고 짓이겨진다. 선창가의 비릿한 심장들이 파닥이며 너의 가슴팍에 안겨들 때 네 입가에 번지는 야릇한 미소가 부아를 치밀게 한다. 너는 근본을 속일 수 없..

좋은 수필 2021.12.11

부지깽이 / 김미경

부지깽이 / 김미경 싸늘히 식은 부지깽이가 도망가던 등 뒤 마당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가시나가 허구한 날 책만 들다보고 그라쌋노. 엄마 좀 거들면 손가락이라도 뿌라지나.” 뒤따라 날라 온 엄마의 잔소리는 피할 새도 없이 등짝에 바로 내리꽂혔다. 갑자기 날라 온 부지깽이를 용케 피하긴 했지만, 바깥 추위만큼 놀랐던 기억은 아직도 서늘하다. 그 당시에는 겨울 날씨가 꽤나 매웠다. 밤새 창가에는 고드름이 아이스크림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꽁꽁 언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너나없이 방 아랫목에 깔린 이불 속을 먼저 헤집어댔다. 아랫목에는 수건에 똘똘 싸여 푹 파묻힌 밥이 어김없이 식솔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을 집어넣었을 때 온몸으로 스며드는 구들장의 온기는 그 날의 고단함을 녹여주는 위로와도 같았다. 뜨뜻한..

좋은 수필 2021.12.11

바닷바람의 지문/장미숙

바닷바람의 지문/장미숙 어디서부터 발원하여 여기까지 밀려온 것일까. 바람이 한입 물어다 놓은 잔물결이 몽글몽글 피어난 이팝나무 꽃 같다. 바다는 물결을 휘감고 뒤척인다. 생명의 꿈틀거림이다. 일시에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파랑(波浪)의 모양은 가지각색이다. 작고 큰 게 있는가 하면, 동그랗고 모난 것도 있다. 뭉쳐서 움직이면 곱게 빗질한 머리카락이 바람의 오선지를 두드린다. 그러다가도 어느새 마구 헝클어진 봉두난발이 되기도 한다. 바다 위로 우뚝 솟은 바위 옆 파도가 짓궂다. 겁도 없이 높은 바위벽을 기어오른다. 뒤이어 높이뛰기 선수처럼 놀치다가 곤두박질친다. 부서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함이 거대한 거품을 잉태한다. 부서지는 것들은 망설임이 없다. 시간을 쪼개 그 속으로 거침없이 질주한다. 물..

좋은 수필 2021.12.11

입장불가 함에도 불구하고/김정옥

입장불가 함에도 불구하고 / 김정옥 탁구 동호회 가을 야유회 날입니다. 어제가 입동이라더니 날씨가 제법 쌀쌀합니다. 바깥바람을 쐬는 게 한참만입니다. 옷은 두툼해도 마음만은 가을 하늘에 떠 있는 새털구름만큼이나 가벼웠습니다. 아기 궁둥이처럼 탱탱하게 부풀었던 기분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습니다. 관광지에서 ‘루지’를 타려는데 65세 이상은 입장이 불가하다는 바람에 혼자만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회원들은 나만 떼어놓고 타려니 미안한 모양입니다. 누군가 같이 남겠다느니, 괜찮다느니 하며 실랑이를 했습니다. 예순예닐곱 살만 같아도 신분증 보여 달라면 안 가져왔다고 둘러대고 어떻게 회원들 틈에 묻어 들어가 볼 것입니다. 내 나이 칠십 살이나 되었으니 그럴 엄두나 낼 수 있겠습니까. 회원들에게 신경 쓰지 말..

카테고리 없음 2021.12.07

걸레/박시윤

걸레 박시윤 봄같이 따스한 날이다. 꽁꽁 얼었던 수도가 녹고 잔뜩 움츠렸던 몸이 기지개를 켠다. 할머니가 아침 일찍 방문을 열어젖히신다. 모처럼 맞는 휴일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나 대청소를 하자는 말씀에 못 이기는 척 걸레부터 집어 든다. 손부인 내게 걸레가 쥐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걸레를 물에 텀벙 던져 넣는다. 비틀린 채 바싹 건조된 걸레는 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움츠린 몸을 푼다. 푸른 추억을 더듬기라도 하듯 원래의 제 모습으로 풀어지는 걸레다. 뽀얀 빛깔과 가녀린 고름이 제법 앙증맞다. 쳐다보는 내내 물처럼 맑은 미소가 걸레 위로 떨어진다. 하늘하늘 잘도 풀어져 느낌마저 보드랍다. 욕조 속에서 여린 몸을 드러내고서 첨벙첨벙 조심스레 물길 질을 하는 아이의 모습 같다. 잔잔한 미소가 얼굴에 번질 즈..

좋은 수필 2021.12.05

글쟁이들 대장간/이문자

글쟁이들 대장간/이문자 풀무질에 쇳덩이가 익어간다. 벌겋게 달궈진 쇠가 모루에 놓이자 드디어 시작되는 메질.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 리드미컬한 연주다. 앞 메 옆 메가 번갈아 치고 때리면 엿가락처럼 휘었다가 늘어난다. 대장장이가 집게로 잡아주는 방향에 따라 대충 매무새가 잡히다가 불 속에 들고 나기를 수십 차례. 두드리고 펴고 다듬기는 또 몇 번이던가. 찬물 담금질을 수없이 거쳐야만 온전한 모습으로 탈바꿈 한다. 시우쇠 한 도막이 명품 연장으로 탄생되는 순간이 감격스럽지 않은가. 글 대장간이 차려졌다. 글쟁이들이 차린 온라인 대장간이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단숨에 좌정하는 장인들! 이레 만에 지척에서, 수천수만 리에서 눈결에 달려와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야말로 인간의 IT 두뇌는 찬사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좋은 수필 2021.12.04

귀명창 / 정연원

귀명창/정연원 소리에는 귀명창이 있다. 귀명창에는 추임새가 날고 있다. 판소리 공연장에 갔다. 그곳에서 귀명창을 만났다. 부채를 쥔 소리꾼과 북과 북채를 쥔 고수(鼓手) 뿐인 단촐한 무대다. 고수가 엇! 기합 소리를 내며 북채로 타당 탁, 북을 치자, 소리꾼이 춘향가의 쑥대머리 대목을 시작한다. '그때 춘향이는 옥중에서 머리를 풀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설인 아니리를 한다. 다시 고수가 엇! 타당 탁, 북을 치면 소리꾼은 '쑥대머리~' 하며 본격적인 창으로 들어간다. 고수는 시작이나 변화, 음절마다 박을 치며 '얼씨구' '잘한다.' '좋다' 등 추임세로 소리꾼의 목을 풀고 흥을 불러낸다. 소리꾼의 창과 고수의 추임새에 몸짓의 발림이 어우러지면 조용하던 관중석이 소란해진다. 판소리를 들을 줄 아는 관중이..

좋은 수필 2021.12.02

바람 부는 날/윤강로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윤강로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만을 보면서 오래 오래 기다려 보았나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로 세상에 매달려 보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에 시달려 보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이 되어 스친 것들을 잊어 보았나 삶이 소중한 만큼 삶이 고통스러운 만큼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개의 낡은 잎새를 사랑해 보았나 윤강로(1938∼) ‘감응’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만난 결과, 우리 마음이 따라 변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 만나면 변하기도 하겠지’ 싶지만 시에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시는 감응을 마법같이 대단한 힘으로 보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시인은 오롯이 저 혼자서 시를 빚어내지는 못한다. 오늘 만난 타인, 말, 장면, 심지어 지나가는 바람마..

좋은 시 2021.11.29

풍로초 2 / 정성화

풍로초 2 / 정성화 동생이 전화를 했다. 엄마가 요즘 말하는 것도 귀찮아하고, 매일 챙겨 보던 TV 드라마도 재미없다고 하며 그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본다고 했다. 폐질환으로 심년 넘게 입 · 퇴원을 반복했으니 그럴 만하다고 이해하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옷을 사드리고, 신나는 노래 테이프를 틀어드려도 엄마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감정이란 걸 죄다 내다버린 것 같기도 했고 모두 잃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사는 게 귀찮다고 했다. 위로하는 차원에서 달달한 믹스커피를 한 잔 타 드렸더니, 몸에 좋지 않은 걸 권한다며 타박하셨다. 아주 심각한 상태는 아닌 듯했다. 내가 중학생일 때까지도 엄마는 좁은 마당 한 편에 분꽃과 채송화를 심었고 종종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꽃을 들여다보곤 했다...

좋은 수필 2021.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