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습기 혹은 눈물 / 박월수

습기 혹은 눈물 / 박월수 신혼시절, 내게는 말 잘 듣는 세탁기 '예예'가 있었다. 그전까지와는 달리 전자동으로 만들어져 동작단추만 눌러 놓으면 저 혼자 빨래를 했다. 하지만 거기엔 치명적이 결함이 있었다. 전원 단추가 포함된 계기판은 습기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세탁실이 따로 없는 탓에 세면장 습기를 뒤집어 쓴 '예예'는 차츰 말을 듣지 않더니 얼마 못가 중병이 들었다. 몸에도 물기가 차면 마음에 한기가 들고 나중엔 앓아눕게 된다는 걸 그 무렵 알게 되었다. 겉만 번듯하고 속은 허술한 이국풍의 집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집을 한 번 보고 대번에 전세를 들었다. 마주 보이는 언덕에 유채꽃이 살가운 봄볕을 이고 푸지게 피어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날마다 봄날일 것 같았다. 나는 차이코프스키와..

좋은 수필 2021.10.22

소리막골 / 정서윤

소리막골 / 정서윤 골 초입에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나무들이 잎을 버린 산등성이는 마치 용이 꿈틀대듯 골짜기를 향해 걸어가는 우리를 앞서 길을 안내하는 것 같았다. 계곡의 야윈 물소리는 얼음 속으로 가늘게 속삭이며 골짜기 밖으로 내려가고 우리는 골 안쪽으로 올라갔다. 능선이 구불구불 걸어가다 멈춘 것 같아 잡고 가던 길을 잠시 놓고 고개를 들었다. 골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언제부터 전해 왔는지 알 수 없으나, 그곳은 소리막골이라고 앞서가는 이가 말했다. 제법 널찍한 터를 잡고 나직하게 엎드려 있는 초가집 한 채가 외로워 보인다. 마당에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가 충직하게 버티고 선 채 나그네를 맞았다. 누군가가 거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집은 비어있었다. 소리꾼 ..

좋은 수필 2021.10.22

아버지의 손 / 박정선

아버지의 손 / 박정선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죽음과 아버지를 연관시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에게도 꿈이 있었고 성공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성공할 때까지 기다려주실 줄 알았다. 정말 언제까지라도 기다려주실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성공을 미뤄두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약주를 사 들고 자주 찾아뵈었을 것이다. 바람 부는 날엔 바람에 찢긴 대로 비가 오는 날엔 비에 젖은 채로 성공하지 못한 초라한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불쑥불쑥 아버지 앞에 보여드렸을 것이다. 이젠 아버지가 그리우면 아버지의 손을 닮은 손을 보러 호미곶으로 달려간다. 동해안 포항 호미곶에 가면 떠오르는 해를 받치듯이, 또는 공을 쥐듯이 손가락이 안으로 구부러진 손이 있다. 손은 오른손..

좋은 수필 2021.10.20

단추를 달며/정해경

단추를 달며 정해경 벌써 며칠 째, 옷걸이에 걸린 와이셔츠가 문틀에 매달려 드나들 때마다 춤추듯 흔들거린다. 진즉에 말랐으니 다림질 후 장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단추 하나가 떨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원상복구만을 기다리고 있다. 단추를 단 다음 다시 빨아야 될 것 같다. 괜한 내 눈총에 더러움이 더 묻어난 것 같아서다. 갈아입는 셔츠 대열에서 이탈한 채 방치되고 있는 옷이 딱해 옷걸이를 빼내고 반짇고리를 가져왔다. 별것 아닌 일에 마음이 상해 남편과 관련된 건 가급적 눈길을 피했다. 그 와중에 와이셔츠의 단추가 실이 풀려 어디론가 달아나버리고 셔츠는 영문도 모른 채 한참동안 문틀에 걸려 벌을 섰다. 그러고 보니 까닭 없이 수모를 당하고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솔기가 벌어진 것을 보고도 그냥 서..

좋은 수필 2021.10.20

손빨래하기 / 정해경

손빨래하기 / 정해경 빨래거리가 욕실 앞에 쌓여있다. 세탁기에 넣을까 손세탁을 할까. 바라보는 심정이 복잡하다. 세탁기로 빨려면 같은 색깔끼리 분리해야 하고 양이 웬만큼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손으로 빨면 귀찮고 물 낭비가 심할 텐데, 어떻게 할까. 세탁물들은 현장에서 잡힌 죄인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묻혀 들인 더러움이 어찌 눈에 뵈는 것뿐이랴. 죄인을 닦달하여 자백을 직접 받아내는 것도 짜릿하지 않을까. 힘 뒀다 뭐하나. 그래, 손으로 반 번 빨아보자. 피의자들의 행태도 가지가지다.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되기도 전에 후줄근해져 기가 꺾이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청바지처럼 뻣뻣하게 오히려 심이 박히는 놈들도 있다. 더러는 아예 풀이 죽어버려 한 손안에 쥘 정도로 존재감이 작아..

좋은 수필 2021.10.20

꺼꾸리/김정옥

꺼꾸리 / 김정옥 얼마 전부터 허리가 안 좋았어. 병은 자랑하랬다고, 여기저기 소문을 냈더니 이구동성으로 허리 근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거야. 걷는 것도 좋고 몸을 거꾸로 뒤집는 것도 허리에 도움이 된다더라고. 천생 겁쟁이인 나는 뒤집는다는 게 무척 두려웠어. 어릴 적에 물구나무를 서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언감생심 어림없었거든. 걷는 것이 허리 근육 강화에 좋다니 그거야말로 참 쉽겠다 싶어 당장 실천했지. 뒷산을 걸었어. 정상 언저리 평평한 곳에 이르니 여러 운동기구가 있는데 그중에 ‘꺼꾸리’가 눈에 확 뜨이더군. 꺼꾸리는 기구 아래에 발을 걸고 천천히 뒤로 넘어가면 되잖아. 그런데 몸이 뒤집어질수록 쑤셔 박힐까 봐 겁이 나지 뭐야. 도저히 혼자 힘으로 할 수가 없었어. 든든한 옆지기의 도움으로 겨우겨..

좋은 수필 2021.10.20

차력사/유홍준

차력사[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7〉 돌을 주면 돌을 깼다 쇠를 주면 쇠를 깼다 울면서 깼다 울면서 깼다 소리치면서 깼다 휘발유를 주면 휘발유를 삼켰다 숟가락을 주면 숟가락을 삼켰다 나는 이 세상에 깨러 온 사람, 조일 수 있을 만큼 허리띠를 졸라맸다 사랑도 깼다 사람도 깼다 돌 많은 강가에 나가 나는 깨고 또 깼다 ―유홍준(1962∼) 얼마 전에 북한군이 차력을 선보였다는 뉴스가 있었다. 강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맞다. 차력은 놀랍고, 차력사는 강하다. 요즘에 차력은 무예보다는 묘기에 가깝지만 그래도 힘이 센 사람만이 행할 수 있다. 이런 것은 강한 자의 차력, 그리고 소수의 차력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약하디 약한 차력사도 있을까. 소수가 아닌 다수가 하는 차력도 있을까. 나는 ..

좋은 시 2021.10.18

무싯날/이정화

무싯날 이정화 아무날도 아닌 날이 아니었다. 휑하던 장터에 다섯 손가락을 꼽으면 전이 펼쳐진다. 그날이 오면 돈이 돌고, 곡식도 돌고, 인심도 돌아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제사장 보러 진고개를 넘어 온 할배의 쌈짓돈과 이른 새벽 황장재를 넘어 온 자반고등어는 주인을 바꾼다. 장터에 해가 떠오른다. 높다란 장대에 노란 고무줄, 흰 고무줄, 검정고무줄을 두툼하게 매달아 든 사내가 다가온다. 설핏 보면 사람 없이 긴 고무줄 장대가 저 혼자 움직이는 것 같다. 구경꾼이 겹겹이 둘러선 곳에는 원숭이가 곡예를 넘는다. 자발없는 원숭이가 웅크리고 앉은 여자아이 꽃핀을 낚아채자 아이는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친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지포라이터와 돌, 손전등과 커다란 건전지와 잡동사니를 부려 놓고 파는 ..

좋은 수필 2021.10.15

앉은뱅이 밥상/정영선

앉은뱅이 밥상 ​ 정영선 ​ 오늘은 식탁을 놔두고 낡은 상에 밥을 차려 먹는다 청암동 비탈진 곳 구멍가게 뒷집 문간방과 가난해도 좋았던 나의 신혼과 함께 먹는다 연탄불에 갓 지은 냄비 밥과 석유곤로에 끓인 국과 소찬 몇 가지 정갈하게 앉히고 서른 살 신랑 앞에 다소곳이 내놓았던 작은 밥상 밥은 설고 국은 짜고 반찬은 싱거웠지만 밥상 앞에 마주 앉은 신혼 입맛은 딱, 두 가지여서 고소하거나 달콤했다 탱탱했던 내 얼굴이 늘어지고 골이 생겼듯, 옻칠 발라 반질거렸던 상 얼굴도 찰과상에 다리 관절은 삐걱거린다 우린 사이좋게 나란히 늙어간다 훤칠한 6인용 식탁에 곳간 열쇠 다 내주고 조용히 뒷방으로 물러난 그는 알고 보면 집안 내력 다 꿰는 우리 집 상床 노인이다

좋은 시 2021.10.14

돌담, 쉼표를 찍다 / 허정진

돌담, 쉼표를 찍다 / 허정진 ‘골목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마시게’* 집과 집으로 이어진 돌담이다. 담장 너머 안주인의 생이 조각보처럼 바느질된 것 같기도 하고, 기승전결이 완벽한 퍼즐처럼 삶의 편린들이 제자리를 찾아 맞춰진 것 같다. 채마밭처럼 푸른 이끼로 덮인 돌담들이 세월의 눈가에 주름진 그리움을 품고 있다. 그 돌담 위로 호박넝쿨이 느릿하게 타고 오른다. 안과 바깥의 경계가 아니라 원래부터 그들의 언덕이고 기둥이었던 것처럼 오래된 생을 끌어안고 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길이 탈출구를 찾아가는 미로 같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순간 나를 잃고 자리에 멈춰 선다. 귀를 기울이고 코를 벌렁거려본다. 뭔가 알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방향과 표식보다 자기에게 익숙한 소리와 냄새를 쫓..

좋은 수필 2021.10.13

궤적(軌跡) /윤남석

궤적(軌跡) /윤남석 오동나무 줄기는 뒷날개 보호망 아래쪽에서 앞날개 보호망 위쪽으로 관통되었다. 굵은 줄기는 전․후망 고정 장치를 사정없이 찢었고, 보호망의 외주연테는 표피에 잔인한 궤적을 퍼렇게 그리고 있다. 마치 오동나무 토막이 유선형의 날개를 꿀꺽 삼켜버린 듯하다. 축받이에 달려있는 날개는 강하게 회전하며 찰나적으로 예리하게 후벼 판 듯 박혀 있다. 전동기가 회전축에 붙은 날개를 힘껏 돌리려했지만, 오동나무는 몸통이 심하게 베이면서도 악물스럽게 날개의 회전을 막아선 것처럼 보인다. 오동나무는 복부에 박힌 그 플라스틱 날개 때문에 여태껏 겨워하는 표정이다. 게다가 전․후망 고정 장치가 터지면서 질긴 스테인리스 재질의 외주연테가 오동나무 줄기를 심하게 옭아매고 있다. 통고痛苦의 여파가 얼마나 컸으면,..

좋은 수필 2021.10.11

헌책방을 읽다/김이랑

헌책방을 읽다 김이랑(김동수) 텅 빈 가게, 빛바랜 간판만이 여기가 한때 버림받은 책들의 처소였음을 알린다. 아무런 안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지도에서 사라질 모양이다. 발품을 보태 법서를 사던 시절부터 허기를 채워준 곳인데, 허전한 걸음으로 나는 다른 보물섬을 찾아 떠난다. 헌책방의 질서는 뒤죽박죽이다. 정해진 자리는 형식일 뿐 계급이나 서열이 없다. 펄벅의 대지 위에 한국의 야생화가 피고 백과사전에 눌린 시집이 숨을 못 쉬겠다고 엄살을 떠는가 하면, 돈키호테가 이순신 장군에게 창을 겨누며 어서 칼을 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큰스님의 어깨에 발을 척 걸친 동화를 보며 명랑만화가 깔깔거리고 명심보감이 옆에서 웃음을 꾹 참으며 앉아있다. 법전을 깔고 앉은 사형수의 참회록과 명작 위에 드러누워 낮잠을..

좋은 수필 2021.10.09

어머니의 기억/ 박종희

어머니의 기억/ 박종희 계절은 늘 누군가의 손을 잡고 돌아온다. 매화꽃이 세상을 물들일 때면 하얀 기억 속을 걷던 어머님 생각이 난다. 기억은 잊었어도 몸짓말로 나를 반기던 어머님이 올해도 어김없이 봄을 데리고 왔다. 빼꼼히 열린 병실 문 사이로 나를 발견하고는 쑥스러운 듯 당신 코를 잡아당긴다. 기다렸다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어머님만의 몸짓이다. 어머님 눈에 낯익은 눈부처가 들어앉는가 싶더니 이내 잇몸을 다 드러내며 까르르 웃는다. 병실에서 무에 그리 웃을 일이 있을까만 며느리를 웃게 하려는 어머님의 배려일 성싶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꼿꼿하던 어머님이 큰아들을 앞세우고 나서는 맥없이 들어앉았다. 불덩이 같은 오 남매를 품어 키우느라 당신 몸이 녹아내리는 것도 모르고 살았던 어머님한테 아주 특..

좋은 수필 2021.10.08

소멸에 대하여/이성복

?소멸에 대하여? - 이성복 ​ ​거실 화장실 수건은 늘 아내가 갈아두는데 그중에는 근래 직장에서 받은 입셍로랑이나 란세티 같은 외국물 먹은 것들도 있지만, 1983년 상주구계서원 중수 기념수건이나 (그때 아버지는 도포에 유건을 쓰고 가셨을 거다) 1987년 강서구 청소년위원회 기념수건도 있다 (당시 장인어른은 강서구청 총무국장이었다) 근래 받은 수건들이야 올이 도톰하고 기품있는 태깔도 여전하지만, 씨실과 날실만 남은 예전 수건들은 오래 빨아 입은 내의처럼 속이 비친다 하지만 수건! 그거 정말 무시 못할 것이더라 1999년, 당뇨에 고혈압으로 장인어른 일년을 못 끌다 돌아가시고, 2005년 우리 아버지도 골절상으로 삭아 가시다가 입안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셨어도, 그분들이 받아온 낡은 수건들은 앞으로도..

좋은 시 2021.10.07

소처럼 느린 당숙/김용택

소처럼 느린 당숙 김용택 여름엔 점심밥을 먹으면 모든 동네 사람들이 강가 정자나무 아래로 모여든다. 누가 오라고 하지도 않고 누가 부르지도 않고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네 사람들은 모두 밥숟갈을 놓기가 바쁘게 정자나무 아래로 끄덕끄덕 더위와 힘든 일에 지친 몸을 이끌고 모여드는 것이다. 진메 마을 정자나무는 툭 터진 강가에 있기 때문에 그 그늘 아래 들면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선풍기 아래 앉아 있는 것보다 몇백 배 시원하다. 그렇게 정자나무 아래 앉아 잠자거나 쉴 때 이따금씩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칠 때가 있다. 비는 꼭 우골이라는 골짜기에서 묻어오게 마련인데 누군가 “우골에 비 묻었네” 하면 사람들은 하나둘씩 잠에서 부스스 깨어 잠을 쫓으며 저 비가 참말로 여그까장 소낙비로 올랑가 안 올..

좋은 수필 2021.10.06

신기료 / 신성애

신기료 / 신성애 삼 층 요리 학원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 감영공원 한 귀퉁이 도장 가게 처마 밑에 풍경처럼 신기료장수가 있다. 오늘도 담벼락을 등지고 낡은 의자에 걸터앉은 노인이 돋보기안경 너머 아스팔트 길을 내려다본다. 또각또각, 뚜벅뚜벅 땅을 울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신발의 상태를 가늠하는 모습이다. 널빤지에 ‘신발 닥음, 신발 수선’ 이라고 엉성하게 쓰인 글씨에는 고삐를 놓아 버린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오전에는 햇살이 들이 비춰 적나라한 모양이 어설퍼 보여도, 그늘이 반쯤 내려오면 제법 오래 된 가게 티가 난다. 사람도 공구도 반지르르 세월이 묻어나는 짙은 갈색이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곳이 십 리라도 되는 양, 나는 흐느적거리는 걸음새로 신발을 끌며 갔다. 멀리서 볼 때는 ..

좋은 수필 2021.10.06

미용실 소묘/신성애

미용실 소묘 신성애 “죽일까요? 살릴까요?” 나는 날이 선 금속의 차가움을 손끝으로 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엉거주춤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순간 어깨를 움찔거린다. “죽여주세요.” 소파에서 책을 뒤지던 여자가 목소리를 높인다. 남자는 살려달라고 하고, 여자는 죽여 달란다. 이 순간 나는 냉철한 집행관이 되어야 한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빈틈없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잘 갈아진 기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바짝 말라있는 머리카락에 촉촉이 물을 뿌려야 한다. 미세하게 숨 쉬는 머리키락의 아우성은 귀가 먹은 사람처럼 못 들은 척 완전히 무시해버려야 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일 곳과 살릴 곳을 정확히 찾아내어 사람의 지붕 하나를 꾸미는 일이다. 처음 지붕을 올릴 때는..

좋은 수필 2021.10.06

발/최장순

발 최 장 순 jschoi0426@hanmail.net “발목 잡힌 정부, 야당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뉴스가 발목을 잡는다. 소파에 앉아 무심히 발을 내려다본다. 지금 나의 걸음을 막은 것은 나의 발목, 그렇다면 내 발목을 잡은 것은 누구인가. 맨발이 멀뚱멀뚱 올려다본다. “고생이 많다” 굽은 발가락이 대답이라도 하듯 꼼지락거린다. 왜 나는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이 발에는 무심했을까. 나를 온전히 받쳐준 든든한 바닥. 발은 주춧돌이다. 몸의 끝자락에서 나를 지탱해준다. 수많은 뼈와 관절, 근육과 인대, 혈관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구조다. 발바닥에는 인체의 각 기관과 상응하는 반사구가 밀집되어있다. 이곳에 자극을 주면 피돌기가 좋아지고 통증이 가라앉아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사람들이 발마사지를 즐기는 이..

좋은 수필 2021.10.05

거미/ 배종필

거미/ 배종필 아무리 봐도 그는 신이 내린 건축가임에는 틀림없다. 덫이라 하기엔 짜임새와 균형, 간격이 한치의 빈틈도 없어 적어도 먹잇감이 걸리기 전까진 아름답고 섬세한 고품격의 구조물이다. 눅눅한 이불을 널려 베란다 방충망을 열어놓은 사이, 거미가 들어와 베란다 들창과 회벽을 축으로 그물을 짰나 보다. 그물의 얼개가 되는 발판실과 세로실은 거미 뱃속의 점액이 공기와 맞닥뜨리는 순간 굳어진 거미줄로, 거미의 이동을 위한 통로이면서 그물의 축을 이룬다. 그러나 정작 사냥의 비결은 가로실에 있다. 가로실은 공기와 접촉을 해도 끈적끈적한 끈끈이로 남아 걸려든 곤충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물살처럼 퍼져나간 동심원의 한가운데 블랙홀에 거미는 낮게 엎드려 이 가로실의 미동을 감지한다. 어린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

좋은 수필 2021.10.05

업어준다는 것/박서영

업어준다는 것/박서영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하략) ―박서영(1968∼2018) 무릇 세상에는 안 해보면 모르는 일이 아주 많다. 업는 것도, 업히는 것도 그렇다. 업혀보지 않았다면, 혹은 업어보지 않았다면 이 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서로 업어주고 업혀주는 것..

좋은 시 2021.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