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1

모서리의 변명 / 남태희

모서리의 변명 / 남태희 내질러지지 않는 소리를 삼킨다. 너무 아프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저 주저앉아 부딪힌 이마를 문지르며 오금을 옴찔옴찔 비틀어 본다. “어우야!” 한참이 지난 뒤에야 소리가 터져 나온다. 거울을 보니 책상 모서리에 찍힌 이마에 벌겋다 못해 검푸른 자국이 선명하게 올라왔다. 푸른 멍이 일주일은 족히 갈 것 같다. 다시 신음이 나온다. 사무실 책상과 책상 사이에 떨어진 볼펜 한 자루를 줍다가 모서리에 이마를 옹골차게 부딪쳤다. 여덟 평이나 될까 한 사무실에 싱크대며 냉장고, 책꽂이에 책상 두 개, 둥근 테이블까지 들어차 있어 조금만 몸을 과하게 움직이면 뭔가 떨어뜨리거나 어딘가에 부딪힌다. 조심성을 잃는 순간 사고가 터지는 법이다. 물건에게나 사람에게나 그 이치는 별반 다르지 않..

카테고리 없음 2021.11.25

후식 같은 하루/남태희

후식 같은 하루 / 남태희 ​ ​ 직장인에게 일요일은 달콤한 후식 같다. 한 주에 닷새 근무하는 사람이야 덜하지만 일요일 하루 쉬는 사람에게는 아껴 먹는 디저트처럼 감질난다. 밀린 잠도 자야하고 미룬 집안일도 해야 한다.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여 못다 한 인사들도 챙겨야 한다. 일요일 내내 평일 못지않게 나름 종종댄다. 눈을 뜨니 아침 아홉 시다. 이불 속에서 좀 더 꼼지락거리며 휴일의 평화를 즐길까 하다 벌떡 일어난다. 커다란 머그잔 가득 커피를 타고 티브이 리모컨을 무의식적으로 켰다가 끈다. 한구석에 쌓아 올려진 책과 우편물을 정리해야겠다는 강박에 마음이 바쁘다. 읽은 책들과 읽어야 할 책들, 답을 줘야하는 책을 분리한다. 봉투에 적힌 신상은 검은 매직으로 지워버린다. 몇몇 책을 책꽂이에 꽂으며 나의 ..

좋은 수필 2021.11.25

십일월/이재무

십일월 -이재무 십일월은 의붓자식 같은 달이다. 시월과 십이월 사이에 엉거주춤 껴서 심란하고 어수선한 달이다 난방도 안 들어오고 선뜻 내복 입기도 애매해서 일 년 중 가장 추운 달이다 더러 가다 행사가 있기는 하지만 메인은 시월이나 십이월에 다 빼앗기고 그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허드레 행사나 치르게 되는 달이다 괄호 같은 부록 같은 본문의 각주 같은 산과 강에 깊게 쇄골이 드러나는 달이다 저녁 땅거미 혹은 어스름과 잘 어울리는 십일월을 내 영혼의 별실로 삼으리라

좋은 시 2021.11.23

앞치마를 두르고/조말선

앞치마를 두르고 ​ 조말선 앞치마를 두르고 시를 쓴다 앞치마를 두르고 독서를한다 전문가들은 앞치마를 두른다 앞치마를 두른 생선장수 앞치마를 두른 생닭장수 앞치마를 두른 화가 앞치마를 두른 엄마 앞치마를 두르면 피를 튀긴다 피 튀기게 열중이다 앞치마를 두르면 함부로 버젓이 칼을 휘두른다 앞치마를 두르고 하는 짓은 앞치마가 다 받아준다 피를 보고야 말 사람들은 앞치마를 두른다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죽어 있는 것을 또 죽이고 죽어서 살아가는 전문가의 작품들 전문가용 앞치마는 뒤가 트여 있다 전문가용 앞치마는 간혹 눈요기용 프릴이 있다 전문가용 앞치마는 팽개치기 간편하다 피가 잔뜩 묻은 앞치마 오물이 깊이 있게 얼룩진 앞치마 앞치마를 벗으면 시는 사라진다 ​ 시 감상평 ​ ​작업의 용도에 맞게 모양이나 재질도..

좋은 시 2021.11.20

기다리는 나무/조현숙

기다리는 나무 조현숙 소낙비 연주에 고요하던 숲이 수런거린다. 빗방울이 푸른 느낌표를 찍을 때마다 한 뼘씩 나무들은 자라고 시나브로 가을도 깊어진다. 하늘과 땅이, 음악소리조차 깊숙이 가라앉은 날, 비 내리는 날은 기다림의 색도 짙푸르다. 비 그친 뒤 고요한 적막이 나무의자에 길게 앉아 있다. 비 탓인지 밤나무는 오늘따라 더 쓸쓸해 보인다. 등에 커다란 옹이가 여럿 있는 걸로 보아 나이가 많은 나무다. 중심을 곧추 세울 기력조차 없는 걸까. 이웃한 언덕바지를 짚고 선 것이 영락없이 지팡이를 쥔 노인의 모습이다. 언제부턴가 낡은 의자처럼 허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산후 후유증 탓이거니 했는데 내 나이도 어느덧 지천명, 생(生의) 가을에 이르렀음에도 용수철처럼 팽팽하리라 믿고 몸을 혹..

좋은 수필 2021.11.19

10월/기형도

10월 -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좋은 시 2021.11.19

모과의 위치/ 조정인

모과의 위치 ​ 조정인 그 윗가지 그 옆가지 그 아래가지에 문득문득 새처럼 날아 앉은 푸른 모과들 깃 치는 소리 낮게, 더 낮게 내려앉은 모과의 동쪽은 지금 스스로 벅차오르는 기쁨의 위치 사물이 지닌 기쁨의 흘수선을 파드득 치고 날아오르는 조무래기 천사 발뒤꿈치를 좇다가 놓치고 들어온 이후 잎사귀 사이 모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과 쪽으로 얼굴을 돌려 모과만을 보여주었다 풀밭에 내려앉은 까치가 호젓한 하느님에서 훌쩍, 까치 쪽으로 건너뛴 이후처럼 선반 위의 퉁명한 모과는 어느 날 불쑥 한 덩어리 의혹을 내밀며 갈색 반점으로 뒤덮인 살덩이 쪽으로 옮겨 앉는다 지층의 그늘을 표면으로 다 우려낸 지상의 마지막 얼굴 같은 모과는 지금 갈애를 품은 심장의 위치 또 어느 날의 모과는 요절한 시인의 초상처럼 외로..

좋은 시 2021.11.19

두부의 공식/마경덕

두부의 공식 마경덕 저것은 네모난 공식 문제를 풀면 네 개의 각을 얻을 수 있다 ​사방을 나누고 눈어림으로 재는 중량 해답은 말랑해서 비닐봉지에 담기거나 팩에 담긴다 ​첫 문장은 함부로 구르고 튕겨나가는 딱딱한 공식 변수가 있어 정량의 물을 더하고 거품을 뺐다 ​회오리처럼 휘돌다가도 뜨거운 불길만 무사히 건너면 잘 될 거라 믿었던 사내 완성품을 기다리며 허기진 시간을 견뎠다 간수를 넣는 과정만 통과하면 쓸 만한 물건이 될 거라고 부글거리는 잡념까지 걸러내었다 ​순두부처럼 몽글거리는 아들에게, ​반듯하게 살아라 물러터지면 아무 짝에도 못 쓴다 네모난 틀은 아버지의 공식 거름포를 깔고 뭉친 마음을 부었지만 반듯한 각을 얻지는 못했는지, ​구치소 앞 두부를 들고 기다리는 아버지 ​저기 물렁한 두부 한 모 걸어..

좋은 시 2021.11.19

나선형의 등 / 조옥상

나선형의 등 / 조옥상 달팽이가 더듬이를 내밀었다. 사방이 풀밭인데 어디로 가는 걸까? 제 등을 옮기자니 한나절이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길은 위험천만이다. 빠르게 이동하는 개미떼가 아무리 부러워도 눈길 한번 줄 수 없다. 잠시도 해찰부릴 수 없는 달팽이는 아무도 등 떠밀지 않았음에도, 이 세상을 기도하기위해 구도자의 길을 나선 어느 수도자와 비슷하다. ​ 나선형의 등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는 르네상스시대의 건축양식을 능가한 전위예술가요, 타고난 재주 또한 기묘하다. 아름드리나무에 빨판처럼 달라붙어있는 밀착성에 더하여, 곡예사처럼 유리벽을 오르내리는 아슬아슬한 면모(面貌)를 보여준다. 이러한 달팽이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다. 그 눈물은 다소 짭조름하다. 달팽이도 한때 바다가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 비개..

좋은 수필 2021.11.19

먼 길 /박금아

먼 길 / 박금아 차는 가파른 황톳길을 돌아 북녘을 향해 달린다. 시고모님과 함께 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다. 우리는 외투 차림으로 앉아서 가는데 고모님만 내가 골라 드린 삼베옷 한 벌 입고 누워서 간다. 죽음은 살아 있는 이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가. 차에 앉은 사람들은 오감이 정지된 듯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누구 한 사람 차 앞을 가로지르는 이 없고, 경적을 울리며 재촉하지도 않는다. 풀어헤친 몸으로 누웠던 땅도 일어나 옷깃을 여민다. 생을 다하고서도 이루지 못한 귀향이었다. 평양이 고향인 고모님은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와 이승을 떠나던 날까지 타향에서 살았다. 열아홉에 결혼하여 시집에 들어가 살다가 친정 나들이를 갔던 길에 전쟁을 만났고, 혼자 피난길에 올랐다고 했다. 금방이면 돌아갈 ..

좋은 수필 2021.11.18

미용실 소묘 / 신성애

미용실 소묘 / 신성애 “죽일까요? 살릴까요?” 나는 날이 선 금속의 차가움을 손끝으로 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엉거주춤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순간 어깨를 움찔거린다. “죽여주세요.” 소파에서 책을 뒤적이던 여자가 목소리를 높인다. 남자는 살려달라고 하고, 여자는 죽여 달란다. 이 순간 나는 냉철한 집행관이 되어야한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빈틈없게 일을 처리해야한다. 잘 갈린 기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바짝 말라 있는 머리카락에 촉촉이 물을 뿌려야한다. 미세하게 숨 쉬는 머리카락의 아우성은 귀가 먹은 사람처럼 못들은 척 완전히 무시해 버려야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일 곳과 살릴 곳을 정확히 찾아내어 사람의 지붕 하나를 꾸미는 일이다. 처음 지붕을 올릴 때는 비..

좋은 수필 2021.11.16

삭발 / 신성애

삭발 / 신성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바람이 한줄기 따라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낯익은 모습의 그녀가 성큼 들어서고 있다. 말없이 털썩 의자에 앉는 그녀의 뒷모습이 잎새 떨구어낸 겨울나무같이 썰렁하다. “살 빠졌어요? 날씬해진 것 같아요” “십 오 킬로그램이 빠졌어” “그래요, 참 좋으시겠어요” “나, 빡빡 밀어줘요”” “정말, 결혼식은요?" "상관없어요" 그녀의 단호한 음성을 듣고 약해지려는 내 마음을 다잡았다. 바리캉을 집어 들고 숱 많은 그녀의 머리를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움켜잡았다. 무성하게 자란 머리카락은 발 디딜 틈 없는 뻣뻣한 억새풀 밭 같다. 부처님을 집에 모시고 있는 그녀는 얼마 전부터 무남독녀를 시집보내기 위해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자라난 머..

좋은 수필 2021.11.16

꽃 보자기/이준관

꽃 보자기 ―이준관(1949∼ ) 어머니가 보자기에 나물을 싸서 보내왔다 남녘엔 봄이 왔다고. 머리를 땋아주시듯 곱게 묶은 보자기의 매듭을 풀자 아지랑이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남녘 양지바른 꽃나무에는 벌써 어머니의 젖망울처럼 꽃망울이 맺혔겠다. 바람 속에선 비릿한 소똥 냄새 풍기고 송아지는 음메 울고 있겠다. 어머니가 싸서 보낸 보자기를 가만히 어루만져 본다. 식구들의 밥이 식을까봐 밥주발을 꼭 품고 있던 밥보자기며, 빗속에서 책이 젖을까봐 책을 꼭 껴안고 있던 책보자기며, 명절날 인절미를 싸서 집집마다 돌리던 떡보자기며, 그러고 보면 봄도 어머니가 보자기에 싸서 보냈나 보다. 민들레 꽃다지 봄까치풀꽃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꽃 보자기에 싸서. 겨울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봄은 한 걸음..

좋은 시 2021.11.16

11월에 머물고 싶다 / 서성남

11월에 머물고 싶다 / 서성남 나는 11월을 좋아한다. 가을 같기도, 겨울 같기도 한 그 모호함이 좋다. 책장을 넘기듯 분명하게 가르지 않고 다 어우르는 넓은 마음 같아서다. 떨어지는 나뭇잎, 두 장 남은 달력,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옅은 햇살들이 쓸쓸하고 허전하게 하면서도 아직 한 달이 남았다는 위안을 주어서 좋다. 곰곰이 생각하면 11월이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어릴 적 11월은 풍성한 달이었다. 시골에서는 벼를 베면 그 자리에 길게 줄가리를 쳤다. 그러고는 보리파종을 끝내고 콩이며 고구마를 수확하여 저장을 다 마친 뒤에야 벼 타작을 했다. 타작을 끝낸 마당에는 짚으로 된 두지가 만들어지고 축담에는 벼 가마니가 쌓였다. 곳간과 빈방마다 곡식이 차곡차곡 들어찼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했다는 안도감과..

좋은 수필 2021.11.14

저승꽃/김원순

저승꽃 / 김원순 하늘색 철 샛문에 저승꽃이 만발했다. 구순이 넘은 어머니 육신 곳곳에 핀 저승꽃처럼, 살짝 손만 대도 부스스 떨어진다. 생전에 피우지 못한 꽃송이 피워보고 싶었던 것일까. 저승의 문턱에 닿아서야 흐드러지게 피운다. 여류하는 세월의 물살에 떠밀려 갈라지고, 찢기고, 벗겨진 육신의 진집마다 핀 붉어서 서러운 꽃, 서러워서 진정 애달픈 꽃. 굴곡진 삶의 고비를 넘을 때마다 흘린 피눈물로 피운 꽃이며,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 흔전만전 뿌리는 꽃이다. 이승을 떠나는 날 담담히 즈려밟고 갈 저승꽃에서 샛문의 지난했던 삶의 지문과, 당당하고 지엄한 자존과, 어기차게 살아온 시간의 지층을 읽는다. 사는 날까지 뜨겁게 살다가 떠날 때는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속절없이 지는 차갑고 따가운 꽃이다. 육신에..

좋은 수필 2021.11.11

가을 손/이상범

가을 손 이상범 두 손을 펴든 채 가을 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 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이상범(1935∼ ) 땅 파서 장사하는 사람 없고, 남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인생을 보라. 가는 게 있어도 오는 게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분명히 줬는데 남들은 기억도 못 하는 경우는 더 많다. 준 것과 받을 것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미움이 깃든다. 내 마음과 시간, 재물과 돈을 가져..

좋은 시 2021.11.08

호박꽃 / 변재영

호박꽃 / 변재영 신념의 꽃이 있다. 옥토와 박토를 고집하지 않는다. 논두렁 밭두렁이면 어떠랴. 햇빛 한 줄기 드는 곳이면 쇄석 자갈밭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뼘의 빈 땅만 허락하면 가나안의 복지인 양 바득바득 덩굴손을 뻗어 꽃을 피운다. 인심 넉넉한 외할머니를 닮은 꽃, 담장 위에 노란 별로 뜨는 꽃이 호박꽃이다. 소낙비 한 줄금 긋고 간 아침, 텃밭을 뒤지던 뒤영벌 한 마리가 나를 시간 저편으로 끌고 간다. 유년시절, 초가집 일색인 동네에 유일한 기와집이 우리 집이다. 땡감나무에 몸을 숨긴 쓰르라미가 목청을 돋우면 담장 위에는 분칠한 듯 노랗게 핀 호박꽃이 맑고 투명한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셨다. 내겐 어머니가 둘이다. 살을 주신 어머니는 내가 일곱 살일 때 병마로 하늘의 별이 되셨고, 지금은 키..

좋은 수필 2021.11.08

식은태 / 이정숙

식은태 / 이정숙 식은태는 순수한 우리말로 도자기에 균열이 생긴 상태를 말하는 데 태토胎土와 유약의 수축률이 달라서 생기는 금이다. 이것을 한자로 말하면 빙렬氷裂이다. 글자 그대로 얼음 빙자는 ‘세차다, 없다’의 뜻이 있고, 열은 ‘찢어진다. 무너진다’이다. 이를 이어 보면 비약된 표현일지 몰라도 얼음과 불의 조합은 얼음이 세차게 무너짐을 말한다. 온종일 말없이 지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사막처럼 고독하다. 변방으로 밀려나 고독을 일상처럼 함께했다. 역시 사람은 더불어 혼자 사는 존재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거침없는 사막에서 통제와 간섭이 무시 때보다 더 더워져 숨이 막혔다. 한 방향을 향해 느낌을 공유하며 지낸 열흘, 열악한 긴 여정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포만감이 있었더라면 발생하지 않..

좋은 수필 2021.11.05

양밥 / 김아인

양밥 / 김아인 현관 신발장 문고리에 걸린 가위가 놀리듯이 내려다본다. 애써 피한다. 수십 년 고수한 가치관을 바꾸는 데는 한순간이었다. 그럴싸한 말솜씨의 유혹에 넘어갔다하면 변명이 될까? 그만큼 답답해서라고 하면 조금 덜 부끄러울까? 연말에 구미 사는 지인 내외분이 찾아오셨다. 연고 없는 도시에서 누군가의 방문은 빈손이어도 반갑기 그지없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생선회까지 사오셨으니 상기된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낮부터 몇 순배의 술잔이 돌았다. 오래 전에 짜놓은 각본인 듯 흥겨운 분위기가 건조한 겨울 피부에 수분크림을 바른 것처럼 촉촉해졌다. 이사 이야기가 나왔다. 새집으로 안 가느냐는 질문에 이 집이 팔려야 가지요, 하면서 속사정을 꺼냈다. 불황 탓도 있겠지만 타이밍을 한번 놓치자 영 기회가 오지 ..

좋은 수필 2021.11.05

물들이다 / 전미경

물들이다 / 전미경 서녘 하늘은 불의 몸짓이다. 노을이 짜낸 주황빛을 스러지는 뒤태라 하기엔 되살아난 축제장이다. 긴 그리움을 지나 재회의 순간을 맞이하는 연인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달뜬 붉음에 눈빛만 담아도 온몸을 붉게 물들일 것 같은 태움의 시간이다. 마음은 이미 붉음으로, 시간보다 더 빨리 닿아 있다. 이렇듯 붉은 날이 온몸에 스며들 때면 아끼던 소지품 하나 둘 꺼내어 마음을 성형하듯 물들이고 싶다. 서랍 속 빛바랜 손수건이 재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때는 부러울 것 없는 귀족의 삶이 아니었던가. 드러내는 일에 가장 먼저 얼굴 내밀던 시절이 있었다. 예를 갖춘 자리일수록 그의 가치는 더했다. 외출할 때나 슬픔을 이기지 못할 때 마음을 닦아 내며 평정심을 유지시켜 주기도 했다. 다시 세상으로 ..

좋은 수필 2021.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