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1

바다달팽이/김수우

바닷달팽이 김수우 늙은 달팽이들이 버스에 오른다 매달린 집도 삐딱하니 늙었다 공동어시장 충무동 새벽시장 자갈치시장, 남항(南港)의 비린 터널을 통과하는 30번 버스 안 닳은 관절로 끌고 온 검은 봉지들 비릿한 아침을 물컥물컥 쏟아낸다 온몸 발이 되어 엉금엉금 경사진 하늘을 끌고 가는 비린 몸뻬들 수직을 잊은 지 오래 하지만 쥐라기의 사랑을 잊지 않았으니 비늘로 된 집을 지고 초록 신호등을 매일 기다리면서 시계집 정확당 철물점 대성건재 명성약국 차례로 지나면서 낯익은 지옥도 낯선 천국도 허공처럼 걸어 구부러지고 또 구부러진 몸 한 번도 배우지 못한 하늘의 섭리를 국밥처럼 먹는 떠난 자식 잊힌 안부를 슬리퍼처럼 끄는 저 수학적 기울기 비릿한 점액질에 묻어나는 비밀, 투명하다 무수한 찰나를 미끄러져 우리 앞에..

좋은 시 2021.10.05

옛집 /김길녀

옛집 김길녀 이제 옛집 빈터에는 산수유꽃만 사태지고 있다 버즘처럼 썩어가는 모과와 꽃바람에도 꿈쩍 않는 늙은 감나무 옆 부르튼 살결의 산수유 가지 끝에 차마 떨구지 못했던 지난해 붉은 산수유 열매 할머니 쪼그라든 젖꼭지 같다 서둘러 골짜기로 찾아드는 저녁 햇살 붉다 덩그마니 댓돌 위에 앉은 흰 고무신 바람그늘 속 그네 타는 노란 꽃귀신들 풍장으로 뼈만 남은 허물어진 담벼락 감싸 안은 초록 넝쿨은 금이 간 장독 안에서 새벽이슬을 낳는다

좋은 시 2021.10.05

이빨의 싹/신종호

이빨의 싹 ​ — 생명은 모종(某種)의 분노. 신종호 짧고 굵은 분노다. 수백만 겹의 부드러운 함성이 씨앗의 정수리를 뚫고 4월의 땅으로 솟구쳐 올랐다. 예민하고 단단한 녹색의 송곳니들이다. 검은 흙 위에 음표처럼 박혀 바람의 연주를 기다리는, 일촉즉발의 폭탄들. 길들은 소리의 뇌관이 되어 나의 무력(無力)을 탐색한다. 싹들의 분노가 나의 혈관을 점령하고, 나는 그들의 확성기가 된다. 어둡고 우울했던 심장의 벽을 물어뜯는, 낯설고 강렬한 이빨들의 아우성. 4월의 주먹들이 팽팽하다.

좋은 시 2021.10.05

부사와 인사/김애란

부사와 인사/김애란 나는 부사를 쓴다. 한 문장 안에 하나만 쓸 때도 있고, 두 개 이상 넣을 때도 있다. 물론 전혀 쓰지 않기도 한다. 나는 부사를 쓰고, 부사를 쓰면서, ‘부사를 쓰지 말아야 할 텐데’하고 생각한다. 나는 부사를 지운다. 부사는 가장 먼저, 또 가장 많이 버려지는 단어다. 부사가 있으면 문장의 격이 떨어지는 것 같고 말의 진실함과 긴장이 약해지는 것 같다. 실제로 훌륭한 문장가들은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부사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나는 부사가 늘 걸린다. 부사가 낭비된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그 문장을 고쳐 읽게 된다. 한 번은 문장 그대로, 또 한 번은 부사를 없애고. 그러곤 언제나 나중 것이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문장에 부사가 있었다는 걸 부사가 없는 자리를 보며 기억한다...

좋은 수필 2021.10.04

전설 따라 삼천리 / 최민자

전설 따라 삼천리 / 최민자 아득한 옛날, 인간들은 에우그놋이라 이름하는 작은 토룡 한 마리씩을 제각각의 우리 안에 가둬두고 살았다. 몸길이 7~8센티 몸무게 50그램 안팎의 이 원시적 생명체는 어둡고 음습한 동굴에 갇혀 말라 죽지 않을 만큼의 물기로 연명했다. 눈도 코도 없었고 아가미나 지느러미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고생물학자들은 그것이 캄브리아 환형동물의 변종이거나 고생대 말쯤에 출현한 초기 파충류의 조상일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하였다. 축축한 피부와 두루뭉술한 정수리, 미련한 듯 유연한 몸놀림으로 보아 그것들이 과연 이무기나 자라 같은 생물과 계통학적 상관관계가 있을 거라는 주장은 그런대로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신화학자들의 의견은 달랐다. 동굴에 엎드려 때를 기다리는 잠룡처럼 하반신이 결박된 ..

좋은 수필 2021.10.04

복국/허은규

복국/허은규 복국 식당 앞에서는 가끔 복卜집, 점집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용한 점집의 무당처럼 식당 안에 돗자리를 깐 복어가 사람들의 막히고 엉킨 속을 상담하고 있다. 신 내린 무당인양 제 살점을 휘휘 풀어 국탕 속에서 한바탕 살풀이굿을 하고 있다. 복국집 간판에 그려진 은밀복의 웃고 있는 표정이 문득 애기보살의 볼때기 같다는 문과적인 상상이 스친다. '복어 맑은탕'을 '복지리' 또는 '복국'이라고 부른다. 복어로 만든 요리를 대하면 누구나 한 움큼의 긴장이 어리기 마련이다. 성냥개비 머리만한 미량에도 사람이 절명할 수도 있다는 풍문이 자꾸만 의식될 수밖에 없지만 이 야릇한 긴장이 도리어 맛을 깊게 각인시킨다. 국물 한 숟갈에도 온 미뢰를 집중하여 맛을 감별하게 만드는, 오묘한 집중을 낳는다. 특유..

좋은 수필 2021.10.03

덤/이재은

덤/ 이재은 겨울은 기별도 없이 오고 있었다. 겹겹의 푸른빛으로 빛나던 하늘도, 햇솜처럼 닿아주느라 분주하던 햇볕도 어느새 창백하리만치 투명하다. 코끝을 타고 들어와 손끝까지 저리게 하는 이른 된바람이 떠나는 가을을 절감하게 한다. 아무리 손끝을 감싸 쥐고 주물러 보아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감각이 둔해진 것은 손끝뿐인데 온 몸에 냉기가 감도는 듯하였다. 이럴 땐 알싸하게 목구멍을 타고 들어와 알차고 뜨거운 부피로 온 몸을 일어나게 해 줄 것이 필요하다. 진한 생강 향을 떠올렸다. 비스듬히 비추던 햇볕이 금방이라도 누워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생강을 사기위해 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마음만큼 조급해졌다. 소란함이 들끓어 편안함이 우러나는 곳이 시장이다. 골라 골라, 싸다 싸, 구경은 거저, 맛없으면 공짜 소..

좋은 수필 2021.10.03

간 맞추기 /최희명

간 맞추기 /최희명 나긋나긋해진 노란 배추속이 음식이라기보다는 잘 찍은 사진이나 그림 같다. 붉은 양념으로 침범하기가 저어된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이든 뻣뻣하게 구는 게 싫어져서 올해는 조금 오래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 얌전히 숨죽인 채 물기가 빠지고 있는 채반에서 여리고 노란 배추속잎 하나를 뜯어 양념과 함께 간을 본다. 나긋함 속에 고집을 드러낸 짠 맛이 혀를 제압한다. 나는 배추에 간을 맞췄는데 배추는 나긋한 몸으로 내 눈을 맞추었고 짠맛은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왔다. 충분히 조율하지 않고 강요하듯 맞춘 간은 그저 짜거나 싱거울 뿐 진정한 의미의 간은 아닌 모양이다. 누구나 첫걸음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첫 아이가 그렇다. 최선의 선택이라 우기며 강요하거나 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개입한 ..

좋은 수필 2021.10.03

대구탕을 끓이는 시간/정희승

대구탕을 끓이는 시간 정희승 회사일로 가족과 떨어져 지방에서 장기체류하던 때가 있었다.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주중에는 회사에서 마련해준 변두리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야 했다. 돌이켜보면 퍽 외롭고 힘든 시기였다. 그때만큼 가족이 소중하게 느껴졌던 적도 없었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오면, 나를 맞아주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불 꺼진 썰렁한 방이었다. 괴괴한 어둠 속에 꼭 닫혀 있는 현관문 앞에 설 때마다 왜 그렇게 낯설고 외롭게 느껴졌는지. 시한을 맞추기 위해 하루 종일 바동거리다 온 날이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 또는 어쩔 수 없이 양심을 져버리면서까지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돌아온 날이면 더욱 기분이 울적했다. 그때마다 가정이란 한 남자의 초라한 하루를 늘 용서해주고 ..

좋은 수필 2021.10.03

벽, 너를 더듬다/허효남

벽, 너를 더듬다 허 효 남 벽을 본다. 벽, 너는 등을 보이며 돌아앉아 있다. 더는 나아갈 곳 없는 절해고도의 끝점에서 안간힘으로 무한대의 시간을 버티고 있는 듯하다. 척박한 지평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조차 부딪혀서 흩어지고 마는 몸체를 우두커니 지탱하고 있는 벽, 온종일 정물에 불과한 너의 잿빛 등뼈 사이로 오도독거리며 언어들이 막 깨어난다. 입을 열지 않는다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허공으로 산화될 무연한 것들을 주워 담으며 도리어 너는 발설할 것들을 제 안으로 찬찬히 되 넣고 있다. 너의 곁을 떠다니는 먼지와 역습하는 기류, 눅눅한 습기와 싸한 감정의 동요마저도 너에게는 언어의 씨앗이 된다. 면적을 가늠할 수 없는 넓은 가슴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 담으며 안으로 발화하는 법을 너는 익히는..

좋은 수필 2021.10.02

바닥론(論) / 최미지(본명 고경숙)

바닥론(論) / 최미지(본명 고경숙) 바닥은 한 번도 무엇을 밟고 일어선 적이 없다. 태곳적부터 오체투지의 자세로 모든 존재의 무게를 떠받들고 산다. 퇴화된 눈으로 세상을 보나 말하지 못하는 입을 가졌고, 우격다짐으로 삼킨 눈물은 귓바퀴를 두드리다 돌아나간다. 날선 울음으로 온몸을 곧추세우고, 묵상에 잠긴 밤하늘의 독백을 듣는다. 농밀한 어둠은 본능적으로 감지할 뿐 함부로 건드렸다간 절벽 아래로 처박히는 수가 있다. 조심하라. 붉은 심장의 박동소리 같은 것은 없다. 그렇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지렁이 한 마리가 땅속 집을 빠져나와 용케 차도로 기어오른다. 화물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헐떡이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한나절 땡볕에 달궈진 지열이 화끈거리는지 길을 움츠렸다 폈다, 배밀이하듯 끌고 간다..

좋은 수필 2021.10.02

고 사 목 / 고경숙

고 사 목 / 고경숙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새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시간은 일어선다 이마에 매지구름 걸쳐놓고 진눈깨비 맞는 산, 박제된 새소리가 나이테를 안고 풍장에 든 까닭 차마 발설할 수 없어 활활 피우는 눈꽃은 은유다 명조체로 흐르는 햇살이 서술하는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나무의 필적이 행간을 읽는 동안 다하지 못한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허공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숨찬 몇 권의 눈부심이 사리처럼 반짝인다 새떼들 젖은 울음이 밑줄을 긋고 구전하는 말씀들 일편단심이다 생은 뼈를 삭이는 절명시다 맨몸으로 그루잠을 건너온 울창한 기억들 작자미상의 목판본 한 질을 집필하고 있다

좋은 시 2021.10.02

혈(穴)을 짚다 /고경숙

혈(穴)을 짚다 고 경 숙 아프다, 까마득하게 먼 기억이 강처럼 흐르는 곳 어딘가를 누르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벌판 한복판 말안장에 얹혀진 돌덩이 하나 늘어진 신경 끝으로 죽은 장미의 검붉은 체액이 길을 내고 있다 전생의 마지막 귀가다 푸른 늑대의 유령이 달 없는 밤에만 나타나 여자의 붉은 살을 뜯는다는 계곡을 지나며 살아 숨쉰다는 안도에 호흡이 불규칙해지면, 별은 무리지어 이마에 박히고 접신하는 주술사처럼 동물의 이빨을 목에 건 모래바람이 삽시간에 눈과 귀와 입을 막는다 아프다, 관자놀이 가까이 머물며 비속한 쾌감을 즐기기 위해 끊임없이 강언덕에 화살을 날리는 전생에 관해 유감스럽다거나 '제발'이라는 단순함 외에 아무 생각도 안 드는 것은 펄떡이던 강물이 메마르며 뜨거운 공기가 헉! 길을 막고 있기..

좋은 시 2021.10.02

클로즈업 / 최장순

클로즈업 / 최장순 소란스럽다. 붕붕거리는 유혹, 어느새 손은 열고, 초단위로 대화가 달린다. 사진이 속속 뜬다. 좋아요, 멋져요, 아니 이런, 내가 왜 이러죠? 시끄럽다. 일정과 사건과 장면이 고스란히 뜬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시시콜콜한 단체카톡방. 참을성이 없다. 어디든 재빨리, 쉽게 날아가는 영상들.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전송되는 사진들은 대기권 어딘가에 하나의 층을 이룰 것이다. 맘에 들면 다행이지만, 감추고 싶은 것이 드러났을 때 당사자는 불쾌하다. '난 당신에게 끌렸거든', 단 한 사람을 클로즈업한 사진은 자신이 행위의 주체였음에도 '끌리게' 했다는 객체를 핑계 삼아 접근한다. 오래지 않아 고지서처럼 다시 날아든다. 드러내고 싶지 않다. 주름이나 잡티 같은 것들. 할리우드의 연륜 ..

좋은 수필 2021.10.01

다리/김미향

다리 김미향 아릿한 통증이 인다. 키 큰 나무 아래서 또다시 멈춰 선다. 무릎 속의 반란으로 주저앉은 게 몇 번째인지 모른다. 몸의 무게가 화근이었을까. 오십여 년 동안 나를 지탱해 준 다부진 다리, 절름거리는 걸음이 어색하여 잠시 몸을 벤치에 내맡긴다. 머리만 늙나보다 했던 생각은 망각이었을까. 나이는 비켜 가는 곳 없이 온 몸 구석구석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건망증이 일고 육신이 피로해질 무렵 뜻하지 않은 무릎이 나를 붙들어 매고 만다. 이태 전, 어머니는 성치 않은 무릎에 결국 칼을 대셨다. 견디고 견디다 더는 견딜 수 없는 통증이 팔순 노모의 발목을 잡았다.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믿었던 젊음의 단단한 뼈도 세월에 바람이 들고, 물컹하던 연골도 말라갔다. 치미는 아픔도 숨기고 살아왔던 어머니, 돌아보..

좋은 수필 2021.09.30

가마솥/정현숙

가마솥 - 정현숙 - 나이가 들수록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처럼 금방 지은 밥인데 윤기가 없다. 어려서 먹던 싸래기로 지은 것도 아닌데 현란한 세상에 고급스러워진 혀끝이 변덕을 부리는가. 맛을 잃어 버린 슬픔을 알아 버렸을 때 오는 허기, "식욕은 성욕이요, 성욕은 성취욕이라. 식욕이 없어지는 것은 살맛을 잃은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이 떠오른다. 선생님을 뵙기 위해 서울 외곽에서 흙과 남은 인생 보내시는 선생님을 찾았다. 선생님의 대쪽같은 성품이 묻어나는 집안 구석구석은 서재에 고서를 꽂아 놓은듯 정갈히도 삶의 흔적들이 꽂혀있다. 모처럼의 시골정경을 가슴에 한컷 담아두려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헛간 가장자리에 천년의 한(恨)을 머금고 녹이 슬어 있는 무쇠가마솥이 눈에 스친다. 귀퉁이가 뭉게져 떨..

좋은 수필 2021.09.27

무종霧鐘 /조옥상

무종霧鐘 조옥상 새벽이면 세상의 아버지들은 바다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짭조름한 바람에 아침 햇살이 반짝이면 부두에 매여 있던 배들도 뚜우뚜우 뱃고동 소리를 내며 출항을 서두른다. 세상물살에 등 떠밀리듯 떠내려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갯벌처럼 질척인다. 언 손을 비비며 고향 하늘을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향수를 헤아려 주듯 바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가슴을 후린다. 장지문으로 새어나오던 아버지의 한숨이 자식들의 귓전을 맴돌다 스러졌다. 마당에서 두엄더미를 해작거리던 수탉 한 마리를 본 기억이 있다. 갑자기 몰려 온 구름이 비를 퍼붓자 날개 젖은 수탉은 횃대에 오르지 못하고 담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수탉은 마치 싸움에서 패배한 패잔병 같았다. 축 처져서 푸드득거리던 아버지의 어깨도 그랬다..

좋은 수필 2021.09.27

출 가/박시윤

출 가/박시윤 푸르스름한 새벽을 밀고 들어오는 반짝이는 햇살이 갓난아이 얼굴처럼 익살스럽다. 흐릿해져 버린 추억을 상기시키듯 애틋함이 묻어 있어 더욱 그런 것만 같다. 주울 수만 있다면 호주머니 한가득 담아두고 그리울 때마다 꺼내보고 싶다.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폐 속 깊숙이 드나드는 은은한 절간의 향내를 따라 조용히 사색을 즐긴다. 추억이 서린 듯 낯설지 않은 향기는 산책의 묘미에 한층 더 빠져들게 한다. 이슬 젖은 흙은 좀처럼 일어날 줄 모르고, 아직 깨지 않은 숲의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는 그리운 이를 만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는 작은 긴장감마저 갖게 한다. 이른 아침, 불국사 공양주 보살들이 몸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내 시선이 보살들의 하얀 고무신을 따라 더 바빠지는 것은 어쩌면 낯설지 않은,..

좋은 수필 2021.09.25

민들레 영토/조옥상

민들레 영토/조옥상 봄을 알리는 기척이 옹골지다. 보도블럭이나 콘크리트 틈새에서 겨울잠이나 제대로 잤을까. 환한 등을 지천으로 켜 놓고 어서 봄 마중 나오라고 납작한 손을 흔든다. 방긋거리는 노란색 길을 따라 걷노라니 어둑했던 동면冬眠에서 해방된 기분이다. 마음이 상쾌하니 꽃들의 환대에 가벼운 답례 정도는 해야 되지 않나 싶다.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할까. 아님 엎드려 입을 맞출까. 생뚱맞은 예의에 민들레도 어색한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에게 다 내주는 자연의 섭리가 언제 이렇다 할 생색을 냈던가. 어디든 내려앉으면 내 자리 내 집이니 저리도 평온한 얼굴인 것을. 너른 들이나 막다른 골목 어느 귀퉁이에서도 해맑게 피는 민들레. 우아한 향기와 반듯한 자리를 탐내지 않음은 본시 소박한 민초의 천부적 태..

좋은 수필 2021.09.25

비나리/정성희

비나리/정성희 바다는 늘 젖어있다. 항시 축축하다. 철썩철썩 쏴악, 어깨 너머로 초록빛 바다가 출렁댄다. 언젠가 내 어머니가 보퉁이 안에 담아온 낯익은 바다가 아니던가. 태반 같은 둥그런 봇짐 속에 저 푸르른 바다를 이고 세상 밖에서 허우적대는 딸에게 챙겨준, 바로 그 바다가 아니던가. 그래서일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내 안에는 꺼지지 않는 바다가 샘물처럼 고여있다. 거친 세상바람이 구멍난 인생을 스칠 때면 일상을 냅다 가로질러 바다를 찾는다. 제 키를 훌쩍 웃도는 절망의 질곡에서 엎어져 꼬부라질 때도, 긴 언덕길을 올라 바다로 향한다. 비릿한 갯내음에 묵은 갈증을 달래듯, 눈앞에 들어선 바다의 웅대한 위용을 내 안으로 쟁여 넣는다. 물속을 들여다본다. 삶에 지쳐 허둥대다 속절없이 시들어버린 인생의 허..

좋은 수필 2021.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