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헛글 / 황선유

헛글 / 황선유 ‘나’는 실재의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입니다. 나는 진실의 인물이 아니라 허위의 인물입니다. 그러니 이 글은 가상으로 허위로 쓰는 글로 이른바 헛글이죠. 그렇다고 실존과 진정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니 누군가 이 헛글의 행간에 웅크린 참나를 찾아낼지도 모르겠어요. 그리 안 해도 그만이지만요. 십이월 치고는 포근한 한 날의 저녁 어스름에 강둑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이곳을 ‘강둑길’이라니 대번에 거짓임을 눈치채겠지요. 대놓고 거짓이니 글쓰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나는 무언가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는 당위의 심정으로 이즈음 안팎으로 머리를 죄던 일들을 떠올립니다. 떠올려진 것들이 잠시 가을 하늘 고추잠자리처럼 머릿속을 선회하다가 일제히 한 곳으로 응집됩니다. 손에 들고 있던 스타벅스 커피의..

좋은 수필 2022.02.03

황홀한 노동/송혜영

황홀한 노동 / 송혜영 그들이 왔다. 긴 머리를 야무지게 뒤로 묶고 왼쪽 귀에 금빛 귀걸이를 해 박은 대장을 선두로 그들은 우리 마당에 썩 들어섰다. 젊은 그들이 마당을 점령하자 이끼 낀 오래된 마당에 활기가 넘쳤다. 대장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재며 장비를 풀어놓았다. 그리곤 진군하듯 헌 집을 접수해 나갔다. ‘두두둑’ 오랜 세월 소임에 충실했던 노쇠한 양철지붕이 끌려 내려왔다. 이가 빠진 창문도 급히 몸을 빠져나왔다.. 제 구실을 못한 지 오래된 굴뚝이 뭉개졌다. 마당 가득 유월의 때 이른 폭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마로, 귀 뒤로, 싱싱한 뒷덜미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셔츠의 등판은 금세 땀에 젖어 몸에 척 들러붙었다. 나는 바람 한 점 없는 이른 무더위가 내 탓인 것만 ..

좋은 수필 2022.02.03

빈집에 대한 시

빈집 / 복효근 ​ 큰딸 집에 간 할머니 지난 겨울 죽은지도 모르고 마당엔 동백꽃이 한창 ​ - 복효근,『꽃 아닌 것 없다』(천년의시작, 2017) ​ ​ ​ ​ 빈집 / 이상국 ​ 박정희 때 이은 슬레이트 지붕이 마분지처럼 낡아 바람에 미어질 것 같은데 삭아 테두리만 겨우 걸린 도라무깡 굴뚝 위에 새 한 마리 앉아 집을 보고 있다 ​ - 이상국, 『집은 아직 따뜻하다』(창작과비평사, 1998) ​ ​ ​ ​ 빈집 / 고광헌 ​ ​저 산에 홀로 피어 발길 붙드는 꽃들 이쁘다 ​ 저 빈집에 홀로 피어 발길 붙드는 꽃들 눈물난다 ​ - 고광헌, 『시간은 무겁다』(창비, 2011) ​ ​ ​ ​ 빈집 / 기형도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으로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

좋은 시 2022.02.02

감성어 낚시 / 고경서

감성어 낚시 / 고경서 불 꺼진 방 안은 심해를 방불케 한다. 한낮의 쪽빛 바다를 여러 번 덧칠한 듯 검은 색채를 띤다. 자정이 지났으나 파도 소리에 뒤척이는 잠을 열고 문밖으로 나선다. 캄캄한 어둠을 끌어다 덮은 바다도 잠들지 못한 채 출렁거린다. 심연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 이곳은 대뇌라는 바다다. 리아스식 해안처럼 들쭉날쭉한 전두엽의 해역이다. 먼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에 이르는 생의 해류를 타고 이동해가는 욕망의 바다, 이를테면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생각이나 기억 따위가 유영하는 황금어장인 셈이다. 나는 감성 낚시를 한다. 아니 감성어 출조에 나선다. 시각과 청각, 후각이 가장 예민하다는 '바다의 제왕'을 포획할 참이다. 슬픈여*가 마주 보이는 해안에 포인트를 잡는다. 갯바위에 몸을 앉..

좋은 수필 2022.01.29

손/최장순

손 / 최장순 골똘히 생각을 받치고 있는 저쪽이 클로즈업된다.. 저 손은 지금 아득한 고민을 감당하고 있을까. 탁자의 찻잔은 이미 식은 듯하다. 문득, 생각을 괴었던 나의 손을 내려다본다. 손을 잡아준 따스함 덕분에 나는 고민을 내려놓은 적이 있다. 인간은 섬세한 손을 가졌다. 원숭이의 손이 인간과 닮았다지만, 세밀한 움직임은 따라올 수 없다. 원숭이의 두 손이 네 발의 일부라고 생각해 볼 때, 온전히 손의 역할만 감당하는 인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엄지가 짧아 다른 손가락 끝과 합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외부의 뇌’로 불릴 만큼 뇌의 가장 큰 지배를 받는 운동기관이자 감각기관인 손. 먹이를 사냥하고, 무언가를 만들고, 온갖 감정을 표현하지만, 가만 살펴보면 손은 여러 의미를 집..

좋은 수필 2022.01.29

시장을 품다 / 김정화

시장을 품다 / 김정화 삶에 지칠 때 시장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그곳에서 퍼덕이는 물오른 생선과 상인들의 힘찬 목소리에서 잃었던 활력을 얻는다. 뿌리째 탄탄한 푸성귀를 고르고 뜨끈한 장터국밥 한 그릇 먹으면 시들했던 삶에도 생기가 돋게 된다. 우리 동네는 바닷가라서 배릿한 해변시장도 있고 오래된 담장을 끼고 사시절 골목시장도 열린다. 틈을 내어 버스라도 타면 역전시장에도 가고 도떼기시장이라 부르는 국제시장도 닿고 구제품이 즐비한 깡통시장까지 구경한다. 해변시장은 갈치와 꽃돔과 꼼장어가 얼음판 위에 버티고, 골목시장에는 아직도 맷돌을 돌려 콩물을 내리며, 명절이면 뻥튀기 기계를 돌려 쌀강정을 만드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어디 그뿐인가. 돼지껍데기가 쥑이는 집도 있고 서울 사람도 알아주는 부산 오뎅집도 반기..

좋은 수필 2022.01.29

잠의 종류

잠의 종류 갈치잠, 발칫잠, 칼잠, 봉놋잠, 새우잠 ​ 장소 문제로, 즉 공간이 좁아서 제대로 편하게 자지 못하는 경우를 묘사한 말들이다. ​ 갈치-잠 명사 / 비좁은 방에서 여럿이 모로 끼어 자는 잠. 좁은 방 한 칸에 열두 명이 자려니 어쩔 수 없이 모두 갈치잠을 잘 도리밖에 없었다.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 갈치라는 생선이 길고 좁기 때문에, 아마도 이런 외형의 특징을 빗대 만들어진 낱말일 듯하다. ​ 발칫-잠 발음 [ 발치짬 ] [ 발칟짬 ] 명사 / 남의 발이 닿는 쪽에서 불편하게 자는 잠. 발칫잠을 자다. 어려서부터 길러 내듯이 보아 오던 문희니 발칫잠쯤 재우는 것이 싫을 것은 없었다.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 ‘발칫잠’은 대개 경험해본 일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씩은 발칫잠을 ..

향기로운 글 2022.01.27

김치찌개 평화론/곽재구

곽재구(1954 - ) ‘김치찌개 평화론’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춧잎을 닮은 딸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 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 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 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 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 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 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 염병할,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 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 식구들은 눈..

좋은 시 2022.01.26

시래기, 정(情)을 살찌우다 / 허정진

시래기, 정(情)을 살찌우다 / 허정진 소 눈망울같이 순한 집들이 옹기종기 하얀 눈을 덮고 있다. 시간이 멈춘 듯 수묵 깊은 처마 아래 무청 시래기가 익어간다. 겨우내 얼고 녹고, 정한(情恨)도 맺고 풀며 달빛 향기 층층이 내려앉는다. 고드름에 숙성하고 된바람에 건조한다. 털어내야 가벼워진다지, 제 욕심 비워낸 자리마다 푸른 숨결 영혼으로 살찐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서걱거리는 속살에 “댕그랑” 풍경소리가 들릴 것 같다. 무서리가 내리고 찬 바람이 불어오면 처마 밑이 분주해진다. 드높은 가을하늘 아래 푸르게 자란 무, 살이 통통하게 오른 무를 수확하고 나면 그 줄기와 이파리가 시래기로 탈바꿈하는 시간이다. 굴비 두름처럼 볏짚으로 엮어 바람이 잘 통하는 응달에 줄줄이 매달아 놓으면 보는 것만으로..

좋은 수필 2022.01.26

저녁이면 돌들이/박소란

저녁이면 돌들이[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30〉 저녁이면 돌들이/서로를 품고 잤다 저만큼/굴러 나가면/그림자가 그림자를 이어주었다 떨어져 있어도 떨어진 게 아니었다 간혹,/조그맣게 슬픔을 밀고 나온/어린 돌의 이마가 펄펄 끓었다 잘 마르지 않는 눈빛과/탱자나무 소식은 묻지 않기로 했다 ―박미란(1964∼) 저녁이면 돌들이 서로를 품고 잤다.” 첫 구절만으로도 이 시에 대해서는 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맛집에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은 법이다. 저녁에 서로를 품고 자는 돌들이라니. 이 말을 들은 순간 우리는 그것들을 본 적도 없으면서 이미 본 듯도 하다. 사실 우리는 저 돌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궁금하면 어두운 밤중에 깨어 있으면 된다. 피곤에 찌든 남편은 방구석에서 이를..

좋은 시 2022.01.25

박소란시모음 20편

박소란시모음 20편 《1》 감상 박소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 《2》 고장 ..

좋은 시 2022.01.24

골무/이어령

골무/이어령 인간이 강철로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대립을 이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칼과 바늘일 것이다. 칼은 남성들의 것이고 바늘은 여성들의것이다. 칼은 자르고 토막내는 것이고 바늘은 꿰매어 결합시키는 것이다. 칼은 생명을 죽이기 위해 있고 바늘은 생명을 감싸기 위해 있다. 칼은 투쟁과 정복을 위해 싸움터인 벌판으로 나간다. 그러나 바늘은 낡은 것을 깁고 새 옷을 마련하기 위해서 깊숙한 규방의 내부로 들어온다. 칼은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하고 바늘은 안으로 들어오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대립항의 궁극에는 칼의 문화에서 생겨난 남성의 투구와 바늘의 문화에서 생겨난 여성의 골무가 뚜렷하게 대치한다. 투구는 칼을 막기 위해 머리에 쓰는 것이고 골무는 바늘을 막기 위해서 손가락에 쓴다. 남자가 전쟁터에..

좋은 수필 2022.01.24

밥/강윤수

밥/강윤수 무척 가깝고도 먼 것이 있다. 사람들은 밥을 앞에 놓고 신神을 섬기며, 밥을 먹으며 구원을 바란다. 허구한 날 두세 끼를 먹으니 밥은 그저 세속적이고, 도무지 그 경지에 이르기 어려운 해탈과 보이지 않는 진리는 밥 저 너머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밥 없이 과연 그런 삶이 가능할까. 세상에는 섬기고 싶어도 섬길 밥이 없고 밥이 구원인 인류도 많다. 한때, 우리 가족의 밥이 몹시 위태하였다. 재화에 과도한 탐욕과 집착을 부리다가 내가 우리 집 살림을 거덜내고 말았다. 적빈이 된 것이다. 한국의 이별 문화에서 '밥 잘 먹고……'라는 송사를 어찌 빼놓을 수 있으랴. 그 말 속에는 절망하지 말고, 잘 견디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환란을 피해 나는 가족에게 가족은 나에게 그저..

좋은 수필 2022.01.24

달의 등 / 박월수

달의 등 / 박월수 내가 사는 곳은 대구의 서쪽 끝이다. 달의 등을 뜻하는 이곳을 태어나고 지금껏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 유년의 기억 속에 달의 등은 조용한 소읍이었다. 나지막한 집들과 너른 들을 둘러친 앞산 줄기가 전부였다. 밤이 되면 앞산 마루에 뜬 달이 평평하게 생긴 소읍을 고루 비추었다. 달의 등짝처럼 펑퍼짐한 마을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디서부터 인사할 채비를 해야 할 지 항상 헛갈렸다. 거치적거릴 것 없이 훤하다는 것이 주는 불편함은 늘 같은 곳으로 귀결되고는 했다. 앞 서 걷는 이의 뒤통수가 눈에 익은 사람이면 숫기 없는 나는 가던 걸음을 늦추어야 했다. 그 속에서 자라던 유년을 떠올리면 항상 아버지가 있다. 내가 아홉 살이 될 무렵 날마다 조금씩 허리가 한 쪽으로 기울었다. 자..

좋은 수필 2022.01.24

그늘 제조법/전영관

그늘 제조법 외 4편 불 꺼진 시장통로는 삼우제 끝난 상가 같다 어둠이 발목을 휘감으며 질겨진다 고양이가 떡집 좌판 밑에 웅크리고 이쪽을 응시한다 예민함이란 공포를 미화한 방패임을 들킨 듯 날카로운 동공을 세운다 손님이 놓고 간 생선가게 비린내가 통나무 도마 틈새에 남아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바람풍선은 척추를 접은 채 잠들어 있다 내복가게 마네킹과 눈이 마주쳤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의 굳은 표정이 낯설지 않다 아침햇살 분주한 건널목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어둠에 익숙한 나는 습관대로 머뭇거리다가 낙타처럼 눈을 가늘게 떠본다 그늘이란 비겁한 경계나 완충지대가 아닌 마음의 빗장을 풀어도 괜찮은 침대 같은 곳이다 뒷골목으로 들어서며 번번 실패한 그늘 제조법을 아쉬워한다 어둠과 빛을 배합하는 연금술로 구전되었으..

좋은 시 2022.01.22

먹물/박후기

먹물/박후기 먹물을 품고 사는 건, 문어나 낙지나 오징어나 인간이나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그 쓰임새는 많이 다르다. 오징어나 문어는 놀라거나 성이 나면 먹물을 뿜는데, 이는 포식자의 시야를 가리는 연막 효과는 물론이고 포식자의 후각이나 미각 등 전반적인 감각기능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사회의 먹물 쓰임새는 다르다. 달라도 많이 다르다. 특히 우리나라 현실에서 먹물은 아주 비열하게 쓰인다. 흔히 공부깨나 한 사람을 보고 먹물 좀 먹었다는 말로 빗대곤 한다. 가방끈이 길다는 말과도 한통속인데, 먹물 좀 먹은 것과 끈이 긴 것으로 치자면 바다에 사는 문어나 낙지를 따라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먹물 티를 내고 가방끈을 논하는, 이른바 ‘끈 이론’으로 우주의 모든 것을 재단하는 자..

좋은 수필 2022.01.22

이어폰/이원

이어폰/이원 이어폰, 귀는 열리고 입은 닫히는 순간 여기가 좋다. 안도 밖도 아닌. 두 개인 것이 좋다. 귀가 두 개인 것과는 무관하게. 밖에서 보자면 양쪽 귀를 막는 것이고, 안에서 보자면 어떤 세계가 계속 도착하는 것. 입이 아닌 귀에 관여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 입은 너무 많이 말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미소를 짓고 있다 해도 왜 말은 하지 않고 웃고만 있느냐고 한다. 입은 말을 하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침묵의 기관이기도 한데 말이다. 누군가의 말이 들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입을 닫는다. 세계는, 입은 닫히고 귀가 열릴 때 시작되는 곳은 아닐까. 입이 닫히면 귀가 열리고, 귀가 열리면 눈도 열린다. 비로소 들리고 보인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귀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

좋은 수필 2022.01.22

쌍둥이칼/김경후

쌍둥이칼/김경후 아줌마들이 쌍둥이칼이라 부르는 칼이 있다. 원래 이름이 헨켈이고, 독특한 공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정보는 아무 소용 없다. 태양은 하루 한 번 뜨지만 우리는 하루 세끼를 먹는다. 끼니 사이사이엔 간식을, 그리고 달이 뜬 후엔 야식을 먹는다. 쌍둥이칼이든 쌍칼이든 일단 들고 썰고 자르고 다져야 한다. 끼니는 가끔 거를 수 있지만 끼니 만드는 걸 거르는 건 곤란하다. 곧 다음 끼니가 닥쳐온다. 다행스럽게도 난 음식을 맛있게 만들지 못한다. 자주 음식 만드는 걸 가족들이 말려준다. 하지만 내 쌍둥이칼을 들고 있는 시간을 난 정말 사랑한다(오해하지 말길, 다른 용도로 절대 쓰지 않는다. 칼 들고 부엌에서 조리만 한다). 내게 쌍둥이칼은 다락방이다. 숨어 있기 좋은 오두막이다.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모..

좋은 수필 2022.01.22

저울/장석남

저울/장석남 가끔 수영을 합네, 탁구를 합네 하며 몸뚱이를 움직인다. 살아온 내력을 몸에 고스란히 지닌 터라 중년이라고 불리면서부터, 그대로 두었다가는 몸이 주저앉을 판이라고 경고를 받은 바이다. 말년에 뭔 영화를 보겠다고 극성을 떠는 꼴 같아 구차스러운 맘 텁텁한데,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까닭을 헤아리니 또 한둘이 아니다. 이, 계속 늘어나는 생의 구속 사유들을 어쩔 것인가! 운동이랍시고 하고 나오면 샤워를 하고 저울에 올라간다. 눈금을 바라보면서 실망하기 일쑤다. 좀체 체중이 줄지 않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저울 옆에는 탈수기가 놓여 있다. 물 철철 흐르는 수영복 가지들을 그 안에 집어넣고 다이얼을 돌려놓은 다음 저울에 올라가게 되는데, 이내 털털거리면서 요동치는 탈수기는 또 뭐란 말인가. 나는 순간적..

좋은 수필 2022.01.22

봇짐/이현경

봇짐/이현경 노란 주전자에 새알 가득 들은 동지팥죽을 들고 열여덟 살 여고생은 엄마 심부름을 가던 중이었다. 밤은 추웠고 길은 약간 미끄러웠다. 목포예식장을 휙 지나쳐가다 여고생은 뒤돌아보았다. 뭔가가 그녀를 잡아끈 것이다. 한 손으로 봇짐을 꼭 안은 여자가 목화송이 같은 눈을 한 손으로 받고 있었다. 자석에 이끌리듯 여자에게 맞은편 포장마차를 가리켰다. 여자는 군말 없이 따라와 여고생과 함께 오뎅과 붕어빵을 먹었다. 기차역은 한참 더 가야 하는데 여자 입에서 칙칙폭폭 칙칙폭폭 소리가 느닷없이 흘러나왔다. 봇짐을 아기처럼 꼭 껴안으면서 아아앙 아아앙 으버버 으버버 칙칙폭폭…… 여고생은 여자의 말을 알아들었다. 몇 년 전, 기차역에서 아기를 뺏긴 여자가, 눈 맞으며, 눈에 눈물 가득 달고, 서 있는 것이다..

좋은 수필 2022.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