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변명과 거짓말, 그리고 새벽 4시 / 노경실

변명과 거짓말, 그리고 새벽 4시 / 노경실 남동생 부부와 사는 엄마와 나누는 아침 통화.. 나는 문안인사 뒤, 늘 같은 질문을 한다. "오늘은 어땠어요" "오늘도 울고 갔지." "오늘은 왜요?" 그때마다 엄마의 답은 다양하다. '머리 모양 마음에 안 든다고', '반지 끼고 간다고', '비 오는데 구두 신고 간다고', '체육복 입고 오라는데 원피스 입고 간다고', '팔찌를 두 개나 차고 간다고', '밥 먹기 싫다고', '졸리다고', '괜히 짜증을 내고.' 6살이 된 조카, 채원이는 날마다 날마다… 어린이집 버스를 타기 전까지 할머니와 제 부모를 뒤흔들어놓는다고 한다. 공주 되는 게 꿈이라는 어린아이 앞에서 팔십 인생을 살고 있는 백발과 청청한 마흔 초반의 두 사람이 절절매는 것이다. 단지 그 아이가 울며..

좋은 수필 2022.02.21

도마소리 / 정성화

도마소리 / 정성화 함성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사이로 '다각다각' 하는 소리가 끼어들고 있었다. 도마소리였다. 잠결에 듣는 소리는 가까이 들리는 듯하다가 다시 멀어진다. 그래서 아련하다. 윗동네의 예배당 종소리나 이른 아침 '딸랑딸랑' 들려오던 두부장수의 종소리, 도마 소리가 그러했다. 어머니는 소리로 먼저 다가오는 분이었다. 펌프질을 하는 소리, 쌀 씻는 소리, 그릇을 챙기는 소리 등. 그 중 도마소리는 잠을 더 자라고 토닥여주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이불 삼아 다시 잠에 빠져들곤 했다. 한 스무 평밖에 되지 않는 집이었다. 부엌이 집 가운데에 자리하고 양쪽으로 방이 붙어있는 ㄷ자 구조의 집이라 부엌에서 나는 소리와 냄새는 어느 방으로든 이내 전해졌다. 도마소리가 잠잠해지고 '보글보글' '자글..

좋은 수필 2022.02.21

유안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유안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겨울에는 불광등이 여름에는 냉천동이 생각나듯 무릉도원은 도화동에 있을 것 같고 문경에 가면 괜히 기쁜 소식이 기다릴 듯하지 추풍령은 항상 서릿발과 낙엽의 늦가을일 것만 같아 춘천(春川)이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할 거라 녹다만 눈 응달 발치에 두고 마른 억새 께벗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피고 있는 진달래꽃을 닮은 누가 있을 거라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에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 봄 한 아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 가 본적은 없지 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좋은 시 2022.02.20

대통밥 / 이정록

대통밥 / 이정록 화살도 싫고 창도 싫다 마디마디 밥 한 그릇 품기까지 수 천년을 비워왔다 합죽선도 싫고 죽부인도 싫다 모든 열매들에게 물어봐라 지가 세상의 허기를 어루만지는 밥이라고 으스대리니, 이제 더는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 땔감도 못되는 빈 몸뚱어리가 밥그릇이 되었다 층층 밥솥이 되었다 칼집처럼 식식대는 사람아 내가 네 밥이다 농담도 건네며 아궁이처럼 큰 숨 들이마셔라 불길을 재우고 뜸들일 줄 알면 스스로 밥이 된 것이다 하늘 끝 푸른 굴뚝까지 칸 칸의 방고래마다 밥솥을 걸고 품바, 품바, 품바 푸르게 타오르는 통큰 대나무들

좋은 시 2022.02.20

새해라서 당신/전영관

새해라서 당신/전영관 붙박이장처럼 완고해서 당신을 숨막히게 했다 채칼 같은 단호함을 명쾌함이라며 타협도 없는 일곱 살마냥 우쭐거렸다 고장난 전기주전자여서 그칠 때를 찾지 못하고 불안하게 했다 후춧가루만큼 예민한 성격을 자상함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떨어뜨린 소금 그릇처럼 강퍅으로만 악화시켰다 가득찬 쓰레기통 속 나태를 머뭇거림의 매력으로 둔갑시켰다 내심 반성하면서, 부러워하면서 도마만큼 자명한 타인의 결단들을 무모함이라 빈정거렸다 냉동고같이 외골수로 지겹게 했다 깨진 간장 항아리로 쓰러져 당신의 통곡이 응급실을 채웠다 가족이란 천막 안에서 당신을 막막하게 했다 무관심을 고부 관계의 중립이라 착각했다 사위 노릇을 손님인 척하는 것으로 알았다 눈치 없음을 시라는 몰입의 부작용이라고 방심했다 동그란 뒷모습에서 ..

좋은 시 2022.02.19

부왕산터에서/전영관

부왕산터에서 기단도 버젓한데 기둥 없다고 기와가 스러졌다고 공간까지 무너진 건 아닙니다 바람은 누대의 습성대로 추녀에 달려 있던 쇠붕어를 찾습니다 잔해를 헤치고 마루판까지 뜯어간 산촌 필부들도 쉽게 아궁이에 던지지는 못했을 일입니다 사천왕이 출타 중이니 승병인 양 불두화가 법당 협시를 지속합니다 동지까지는 달포도 남지 않았는데 초록 발심(發心)을 견지합니다 나의 문장은 삽날에 찍힌 뱀의 몸짓 계절병으로 흔들리다 풍경에 밑줄을 긋습니다 구름이 백운대 이마를 훤하게 씻어놓았습니다 터라는 어휘는 과거형이면서 다가올 것에 대한 예감이기도 합니다 종결과 착수가 맞물리는 11월 폐업과 개업이 하나의 화환에 나란한 문구로 걸린 11월 끝까지 폐허라고 말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도 있음을 부언하지 않겠습니다 (전영관 시..

좋은 시 2022.02.19

약속도 없이/전영관

약속도 없이 전영관 하룻밤 물에 불린대도 멥쌀의 찰기로는 허기를 채우지 못할 거 같아 찰밥 해드려야 안심이지 싶은 사람 하나 있다 수수꽃다리가 조청만큼 달달하니 서둘러 왔는데 늦었다 해도 넘겨줄 수 있겠다 찬 없는 두레상에 모셔도 결례는 아니려니 어스름 무렵에야 찹쌀 뼈가 다 무르면 만월과 겸상으로 올려드리련다 비린 것 한 토막을 앞으로 밀어놓고 잔가시 없는 등 쪽으로 떼어드리련다 숭늉 권하는 동안도 꽃은 피고 봄은 뜸 들고 여름을 당겨올 것처럼 눈빛이 짙어지리라 창밖으로 만발한 이팝나무 숭어리가 보인다 바람으로 씻고 늦은 안개에 불려 헛밥이나 짓는다 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봄을 다잡아보려 찰밥이라 고집 부리는 것이다 내 것인지네 것인지도 모르게 뒤엉겨 어쩔 수 없으니 주저앉자고 생떼라도 써볼 사람을 기..

좋은 시 2022.02.19

그리움에 익다 / 이문자

그리움에 익다 / 이문자 태풍에 얹혀온 가을이 상처투성이로 보채다가, 어느새 순환의 섭리에 맞춰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촌부들이 내놓은 좌판을 훑어 애호박 한 아름을 안아다 창가에 썰어냈더니, 조금씩 들어앉는 볕 덕분에 오글오글 잘 마르고 있다. 호박오가리와 벌이는 ‘사랑 놀음’에 빠지다 보면 애지중지 손자 녀석들 보듬는 듯해서 가을날의 소소한 일상이 행복한 여인네로 만든다. 결벽증(?) 다분한 남편이 창문 열어놓고 산다고 성화가 심해 어렵사리 이 일을 하면서도, 첫서리 전까지 끝 호박 사 나르는 일을 접을 수가 없는 건, 백로가 지나면서부터 도지는 내 유년의 그리움 때문이다. 새발 마냥 가는 다리를 총총거리며 내가 제일 신나했던 심부름은, 저녁밥솥에 쌀을 안치며, ‘어서 호박 따오라.’시..

좋은 수필 2022.02.19

진수식( 進水式 ) /조숙

진수식( 進水式 ) 조 숙 큰댁에서 분가하면서 받아온 목숨이 이 배 한 척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날이 정월 초아흐레 아버지의 생신날이었답니다. 사람사이에 인연을 몇 억겁의 세월을 건너 만나지는 것이라면 아버지와 우리 배 어승호와 인연은 어떤 세월의 강을 건너서 다다른 것일까요. 어린 싹이 아름드리나무가 되고 그것이 한 척의 배로 건조되어지기까지 시간의 나이테를 되돌려 점 하나로 시작되었을 그날을 떠올리자면 말입니다. 어승호는 아버지의 몸과 같은 생채리듬을 가졌습니다. 아버지는 몸으로 말하지 않아도 배의 휴식 즈음을 아시고 도크에 올립니다. 바다의 이빨에 물린 상처와 격랑을 건너온 관절을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푸른 힘줄 불끈거리는 아버지의 손 어디에 그 토록 자상한 부드러움이 숨어있었던가. 도크에 올려 ..

좋은 수필 2022.02.18

미역할매의 노래 / 조숙

미역할매의 노래 / 조숙 미역에서 풀내가 난다. 미역도 등줄기 꼿꼿한 한그루의 바다나무다. 줄기, 잎사귀, 뿌리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척박한 바윗덩어리에 뿌리박고 포자로 번식하여 일가를 이루는 것이 나무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년 전에 동남아의 어느바다에서 스킨스쿠버로 물속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소음 한 조각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 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미역 숲이 마치 육지의 밀림과도 같았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역을 식용으로 하지 않는 나라이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처녀 숲인 셈이다. 물속에서 천천히 헤엄치며 미역이 물결 따라 일제히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꿈꾸듯 바라보았다. 재래시장에 갔다가 참기름 바른 듯 반질거리는 미역을 사왔다. 철지난 미역이라 날것으로 먹기에는 좀 억세다 싶은데 ..

좋은 수필 2022.02.18

글탁 / 문경희

글탁 / 문경희 "짜구 잡은 지 십이 년 됐어요…" 뭉툭한 경상도 억양 탓일까. 턱밑으로 바짝 들이대는 카메라에 곁눈도 주지 않고 하던 일에만 묵묵한 청년에게서 남다른 뚝심을 읽는다. 잘 익은 누런둥이 호박처럼 둥글 길쭉한 나무통에 구멍을 뚫고 속을 파내느라 여념이 없는 노옹을 흘낏 돌아보며 머쓱하게 내뱉는 말에는 '아직 멀었지요.'라는 한마디가 말줄임표로 매달려 있는 듯하다. 아버지이자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듯 사선으로 슬쩍 비쳐 앉은 품새가 단단히 그러진 금기의 벽처럼 섣부르게 욕심내기에는 언감생심인 경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눈치다. 다만 다른 상의 찬을 넘겨다 보는 아이처럼 부러운 기색만은 은연중에라도 감출 수가 없는지 자귀를 움켜쥔 투박한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백여 년에 걸쳐 삼대가 온전히 ..

좋은 수필 2022.02.18

당연한데도 민망한 / 정재순

당연한데도 민망한 / 정재순 아뿔싸, 몸이 춤 트기를 한다. 미스터트롯 열풍으로 방송채널마다 네 박자가 난무하는 바람에 온 집안이 들썩거린다. 어깨와 발바닥이 근질근질거리는가 싶더니 남편 앞에서 춤을 추고 만다. 순전히 익숙해진 탓이다. 설마하니 내가 이럴 줄 몰랐다. 판이 제대로 깔리고 분위기가 딱 들어맞아야 춤이 나왔었다. 하물며 뽕짝이 나오면 귀를 닫아버리던 때가 어저께 같은데……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튼 몸은 부끄러움을 잊은 모양이다. 쿵짜작 쿵짝, 발라드나 힙합이 나와도 찔뚝 없이 장단을 맞춘다. 빙긋이 웃으며 쳐다보던 그가 티브이 화면을 막아선 나를 피해 자리를 옮겨 앉는다. 관계가 돈독해지면 자연스레 마음의 담장을 허문다. 격식과 거추장스런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트기가 시작된다. 춤은 물..

좋은 수필 2022.02.18

댓돌/우광미

'댓돌' 우 광 미 . 그곳은 성전의 들머리다. 저마다 순례길 같은 일상에서 지고 온 남루들을 벗어놓는다. 하루치의 자잘한 삶의 편린들을 정화시킨 후 비로소 맨발을 방으로 들인다. 또 날이 새면 어김없이 새로운 다짐을 찍으면서 나선다. 돌은 연장이 되기도 하고 염원을 담아 얹으면 탑이 되기도 한다. 성벽의 돌처럼 우러러봐야 할 정도로 높이 쌓은 것도 있고, 보일듯 말듯 나지막이 집 담장으로 둘러진 경우도 있다. 그 쓰임새가 다양하나, 집채를 오르내리도록 만든 계단인 댓돌은 유난히 살갑다. 비상하는 새들도 머무르며 쉼표를 찍듯이, 생각이 흐트러질 때엔 시골집에 와서 댓돌을 바라본다. 칼에 베인 시간처럼 빈집의 공허가 창백하다. 내 시간의 긴 침도 모 닳은 댓돌 위에 멈춰 있다. 각이 서 매사 반듯하던 젊은..

좋은 수필 2022.02.17

볶은 콩/마경덕

볶은 콩 ​ 마경덕 ​ ​ 날콩을 볶는다 비린 피가 고소해지도록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콩, 뜨거운 냄비를 주걱으로 휘저어도 아직 비리다 타닥타닥 튀어오른다 콩의 말을 한 번도 배운 적 없어 참 다행이다 내가 아는 말은 도르르, 콩콩, 데굴데굴, 겨우 그 정도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흩어지지 않게 자루에 넣거나 봉지에 담는 정도 둘러앉아 콩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들 콩 한 줌에 벌어지는 입들 고소한 피 냄새가 거실까지 날아간다 콩대는 콩잎을, 콩잎은 꽃을 피워 방방마다 콩을 낳고 꼬투리 꼭 닫아건 ​콩, 오늘 내 손에 죽었다 콩의 말을 알지 못해 참 다행이다

좋은 시 2022.02.16

저녁의 나이/마경덕

저녁의 나이 ​ 마경덕 ​ 해질 무렵 허물어진 돌담을 서성거리는 저녁을 보았지 어둑한 굴뚝을 빠져나와 그을음이 묻은 ​ 손으로 문지르면 까맣게 번지는 저녁의 나이 ​ 이끼 낀 돌담 사이 썩은 밑동을 보려고 먼길을 달려온 저녁의 뒤꿈치가 나무뿌리보다 질겼네 ​ 길목을 지나며 나무에게 들려준 산 너머 마을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매미를 섞어 그늘을 잇던 나무는 둥근 의자가 되어버렸네 ​ 한철 그늘을 빌려 쓴 노인들이 나무 아래서 시드는 것처럼 ​나무도 그늘을 짜다가 늙어갈 줄만 알았는데, ​ 사라진 느티나무 얼굴은 느티나무보다 오래 살아남은 저녁만 알고 있네 ​ 시작 노트 ​ 시간 밖에서 바라보다 ​ 강가에 구르는 작은 돌멩이, 길가에 핀 풀꽃 한 송이도 예사롭지 않다. 돌멩이가 되기까지, 꽃이 되기까지의 시간..

좋은 시 2022.02.16

동백의 기별 / 허상문

동백의 기별 / 허상문 동백에 대한 기억은 비장하고 엄숙하다. 어느 겨울날 남도 땅 선운사를 방문했을 때, 절 뒤편에서 하얀 눈 위에 선혈처럼 뚝뚝 떨어진 동백꽃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래전 꽃 한번 피우지 못하고 떠난 시인의 각혈이 생각났다. 평생 직업다운 직업 한번 가져보지 못한 채 오직 한 편의 좋은 시를 남기기 위해 몸부림치다 간 친구였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어린 아들이 지켜보던 장례식 날, 마지막 생명의 햇살은 한 송이 붉은 동백꽃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 대정벌에 귀양 와서 위리안치되었을 때, 친구였던 초의선사가 그를 방문해서 아내의 타계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때 추사적거지 오두막의 새하얀 눈밭에는 동백꽃이 아내의 붉은 눈물같이 뿌려졌다. 그 모습을..

좋은 수필 2022.02.16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외 4편/김남권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외 4편/김남권 김치를 담그려고 마트에서 사온 배추를 다듬다가 수세미처럼 줄기만 남은 배추 이파리를 보았다 얼마나 달고 고소했길래 이파리의 뼈대만 남기고 갉아 먹었을까 어두컴컴한 배춧잎 속에서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 지금쯤 가을 하늘을 날고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날개를 달아준 일이 없지만 오늘 사온 배추 한 포기 속에서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 배추벌레들을 생각하면 가슴속에 등불 하나가 생긴다 배추벌레들이 먹고 남은 것들을 겨우내 몸속에 채워 넣고 나면 내년 봄, 내 몸에도 푸른 날개가 돋아나지 않을까 지상의 마지막 종점에서 도움닫기를 하며 푸른창공을 향해 달려갔을 배추벌레들의 날갯짓, 11월의 푸른 허공에 하얗다 고철이 고철에게..

좋은 시 2022.02.15

부지깽이 / 정재은

부지깽이 / 정재은 어둑신한 토방 부엌 바닥 아궁이 앞에 치마 앞자락에 불빛을 발갛게 받으며 이모님과 나란히 앉았다. 갈비처럼 착착 재어 놓았던 콩풀렸다 다독였다 하시며 불길을 조정하신다. 부지깽이가 너무 짧아져서 이모님의 손등은 금시 새빨갛게 되었다. 짧아져서 못 쓰게 된 부지깽이를 아궁이 속에 던져 놓고 시렁위에 두었던 부지깽이단을 내리셨다. 엄지손가락 굵기에 1미터의 길이쯤 될까. 마디가 없고 휘지 않는, 매촐하고 맞춤한 부지깽이감 여남은 개가 칡끈에 묶이어 있다. 소나무는 가벼우나 빨리 타 버리는 것이 흠이고, 참나무는 야무지나 무거워 다루기 불편한 것이 흠이어서 가볍고 단단한 싸리나무나 아카시 가지가 부지깽이감으로 귀여움을 받는다. "불 좀 보겠니? 나갔다 오마." 부지깽이를 넘겨주시고 이모님은..

좋은 수필 2022.02.14

된장/정성화

된 장 정 성 화 친정어머니는 양손에 든 보따리 때문인지 조금 휘청거리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또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오르내려서 딸네 집에 오는 길이다. 어머니의 어깨에 내려앉은 세월을 느끼며 우울해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그제야 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셨다. 신문지에 쌓인 참기름병 하나가 부산 구경이라도 하려는 듯, 보따리 한 쪽으로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얼른 어머니의 보따리를 풀었다. 된장과 오이소박이, 참기름, 그리고 된장에 넣어 삭힌 고추와 무장아찌가 들어있었다. 그 냄새만으로도 나는 어느새 고향 마을에 가 있는 기분이었다. “얘,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젊어 한때 고생이라고 하지 않니.” 어머니가 나를 볼 때마다 하는 말이다. 선장인 사위가 집을 떠나 있어도 딸이..

좋은 수필 2022.02.12

콩 / 김산옥

콩 / 김산옥 나는 순덕이 아줌마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양구 대암산 깊은 계곡을 흐르는 두타연 일급수를 먹고, 부지런한 농부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키가 큰다. 때때로 찾아와 보듬어주는 넉넉한 순덕이 아줌마 사랑을 먹으면 한여름 불볕더위도 견딜 수 있다. 나는 대암산이 붉게 물들 즈음, 순덕이 아줌마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통통하게 살이 오른다. 내 작은 몸은 땅의 온기와, 햇빛과 달빛, 산소와 비, 바람과 농부의 땀으로 완성된다. 온 우주가 담겨진다. 대암산 아래 넓은 벌판에 희끗희끗 서리꽃이 피면, 나는 순덕이 아줌마 곡간에 둥지를 튼다. 봄, 여름, 가을이 총총히 내 곁을 지나가는 동안, 나도 분주했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제때 열매 맺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이제 고단함을 내려..

좋은 수필 2022.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