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구멍/마경덕

구멍 ​ 마경덕 ​ 구멍은 사방에 있었다. 물 샐 틈 없는 바다마저 구멍이 있어 파도에 발을 헛디딘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밤마다 호롱불 아래 아홉 켤레의 양말을 기웠고 옆집 아저씨는 노름빚에 시달려 온몸에 구멍투성이었다. 솥이나 냄비를 때우러 다니던 땜쟁이 영감은 위장에 빵구가 나서 평생을 골골거렸다. 막히거나 뚫려도 걱정인 것이 바로 구멍이었다. ​ 내게도 기워야할 구멍이 얼마나 많았던가. 믿었던 사람에게, 느닷없는 운명에 걷어차여 뻥뻥 뚫린 흔적들. 나는 막힌 하수구를 뚫고 물이 새는 수도관을 틀어막으며 살아 왔다. 구멍에 익숙한 나는 단춧구멍 같은 구멍으로 간신히 목을 디밀고 살았다. 실이 풀린 단추처럼 간당간당 구멍에 매달려 살았다. 오래된 구멍, 은밀한 구멍하나를 기억한다. 돼지우..

좋은 수필 2022.03.16

상처를 응시하는 몸의 기억들/마경덕

상처를 응시하는 몸의 기억들 마경덕(시인) 무언극에서 관객의 시선은 배우의 손짓, 발짓에 집중된다. 섬세하고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몸동작은 대사(臺詞)와 같다. 최윤우 연극평론가는 “무대에는 소통을 위한 약속이 있다. 연극이 상황에 대한 약속이라면, 마임은 경험과 느낌에 대한 약속이다. 그 경험이 마임이스트의 몸짓과 만났을 때 무대는 한 몸으로 같은 동선을 그려간다. 마치 같은 붓을 잡고 스케치를 하듯. 마임 공연은 그렇게 관객들과의 소통에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고 하였다. 시 창작에서도 ‘경험’은 시의 거름이며 ‘느낌’은 수확물이다. 시는 동작으로 말을 대신하는 팬터마임(pantomime)처럼 부호 하나도 언어로 작용한다. 짧은 문장으로도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시(詩)이기에 압축된 문장은 가..

평론 2022.03.16

멸치액젓/김덕임

멸치액젓 김덕임 추자도 앞바다가 펄펄 끓는다. 수천 마리 멸치가 장작불 가마솥에서 녹아내린다. 가느다란 멸치 떼는 잿빛 파도가 된다. 풀어진 살점들이 뜨거운 물마루 끝에 솟았다가 솥 바닥으로 내리꽂힌다. 봄부터 미뤄왔던 젓장을 내린다. 산들바람이 불쏘시개가 되어 아궁이의 장작불이 활화산 같다. 시어머니가 정갈하게 가꾸던 장독대 맨 끝에는 항상 젓갈 항아리가 자리했다. 작년 여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독대 청소를 하다가 그 항아리를 열어보았다. 역시나 어머니의 손끝이 함께 버물어진 멸치젓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 익은 것 같았지만 혼자서 젓장 내리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음해 봄에나 내리려고 뚜껑을 덮고 말았다. 그러던 것이 봄이 지나고 여름도 지나갔다. 며칠 전 시골집에 가서는 작심하고 그 항..

좋은 수필 2022.03.16

동태 / 김덕임

동태 / 김덕임 꽃샘바람이 분다. 운명의 신이 나를 시샘이라도 한 것일까. 죽어서도 감지 못한 똘망똘망한 내 눈. 그 속에는 오호츠크해의 끝 모를 수평선이 빗금처럼 그어져 있다. 까치파도에 부대끼는 수평선 위로 주먹만 한 별들이 밤마실을 내려왔고, 나는 세상모르고 그별들과 밤드리 노닐었다. 매초롬한 몸매로 파도 속을 유영하던 날이다. 촘촘한 그물이 느닷없이 내려왔고, 검푸른 바다를 붕새의 날개처럼 에워쌌다. 그때는 검은 바다의 물주름도 숨을 죽였다. 출구가 빤히 보이지만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미로였다. 갖가지 편법에 능숙한 인간들은 이럴 때도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갈 텐데, 마음속에서만 수백 겹의 물마루가 굽이쳤다. 나에게는 그런 재주가 겨자씨만큼도 없다. 내 탓일까. 조상 탓일까. 그 후, 몸단도리..

좋은 수필 2022.03.16

지막리 고인돌/조후미

지막리 고인돌 - 조후미 옌날에는 전라남도 진도를 沃州옥주라고 했어라. 땅땡이가 겁나게 넙고 지름징께 그케 불렀다고 합디다. 요새는 뱃꾼보다 농사꾼이 더 많애라. 째깐매한 섬이지라잉. 지도를 치고 진도 동쪽을 찬찬히 살피믄 첨찰산 끄터리에 지막리라는 마음이 걸쳐 있어라. 뒷산에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었응께 상당히 유서 깊은 동네것지라잉. 동네로 나댕기는 질 한피짝에는 찔쭉한 도팍이 서 있는디라 어른신들이 그 독을 슨돌이라고 부릅디다. 마을에 슨돌이 있다는 것이 뭔 뜻인지 아요? 그것은 엔날꼰날부터 거그서 사람들이 살았다는 뜻이제라. 시방은 서울 같은 도시서 사람들이 오굴오굴 몰려 살지만 선사시대 때는 맹수들이 무사서 섬에서들 살았당께라. 섬에서 살다가 차근차근 육지로 퍼져나간 것이지라. 선사시대부터 ..

좋은 수필 2022.03.15

풍차 / 김영식

풍차 / 김영식 바람을 독법 하는 저 수직의 삶이라니. 표표한 공중의 벼랑에 뜨거운 심장을 걸어놓고 제 삶의 중심을 응시하는 고독한 아나키스트. 거인처럼 우뚝 솟아 수평선 너머를 예지하는 수도승의 모습으로. 바람의 시원始原이자 바람의 완결자인 그는 바람이 머무는 육체이자 바람의 정신을 이루는 뇌다. 찰나 속에서 영원을 꿈꾸며 영원 속에서 찰나를 완성하는 은둔의 철학자이다.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과 강하고 약함과 생성과 소멸을 한 몸에 아우르고 있는 시간의 아메바다. 빛나는 비굴절의 이마를 가진 그는 한 번도 삶을 등지거나 회피하거나 우회한 적이 없다. 직립의 우직함은 언제나 정공법을 선택한다. 변화지향주의자인 구름은 그런 그를 보고 평면적이라거나 비타협적이라며 비판하지만 그건 천성이 정직하기 때문이다...

좋은 수필 2022.03.14

바람의 영토에 들다/문경희

바람의 영토에 들다 문경희 미완의 그림처럼, 자그마한 어촌마을은 여백으로 넘쳐난다. 붉고 푸른 지붕이 퍼즐처럼 아귀를 맞추고, 연초록 색감의 야트막한 언덕은 키 작은 인가들을 넉넉하게 아우른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 대신 푸른 바다를 마당삼아 거느린 탓일까. 여백이 키워놓은 마을의 배포가 여간 두둑해보이지 않는다. 따끈한 햇살이 소박한 화폭을 분주하게 오간다. 시시각각 채도를 달리하는 태양의 화법에 그림 속의 풍경들이 소리 없이 뒤척인다. 내내 펄떡이던 숨결을 한 템포쯤 늦춰주는, 묘한 위력의 그림 앞에서 잠시 망연해진다. 해금강의 길목, 거제 도장포마을이다. 바다와 길이 만들어내는 절경 속을 한참 동안 달려왔다. 간만에 ‘빨리’를 벗어 놓고 가능하면 느리게 해안길을 에둘러 온 참이다. 내비게이션은 연..

좋은 수필 2022.03.14

끝/박시윤

끝/박시윤 땅 끝에 와 있다. 물결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바다 앞에 아이를 안고 섰다. 바알갛게 부서져 내리는 노을이 아이와 나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다. 해는 수평선 끝에서야 비로소 마지막 한계를 불살라 놓고 유유히 사라진다. 묽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멀리 보이는 건물과 산들이 엷은 실루엣을 드러내고, 틈틈이 비워진 공간마다 어둠을 채워나간다. 해넘이가 끝난 사방천지는 어둡고 싸늘하다. 끝을 본 전쟁터의 뒷날처럼 숨죽인 채 어떤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자연의 섭리 속에 파도 소리만이 가슴으로 자작이 흘러든다. 모래밭에 다다라서야 조각조각 깨어져 생을 마감하는 파도의 눈물은 가슴으로 쓰디쓴 눈물을 삼켜보지 않은 이는 알지 못하리라. 아이를 품에 꼬옥 안고 바람을 맞는다. 뜻하..

좋은 수필 2022.03.13

햇살요양사/손준호

햇살 요양사 / 손준호 뭉그적뭉그적, 해종일 저러고 있다.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에 푸져 앉아 혼잣말을 무슨 알약처럼 복용하고 있다. 먼길 오느라 솔찬히 욕봤소, 합죽한 노파는 함부로 반말을 던지지는 않았다. 기력 잃은 대문은 입을 헤벌쭉하고 민무늬 불록담은 군데군데 관절이 나갔다. 빨래집게는 틀니로 헐겁게 바람을 물었고 툇마루를 수발 중인 섬돌은 등허리가 반질반질했다. 해진 소매 끝단에 겨운 졸음 매달고 빈 들녘 볏단같이 모짝모짝 말라가는 노구. ​ 어디 좀 봐요, 햇반은 잘 데워 드시나요? 볕살 몇 장 꺼내 정수릴 쓰담쓰담하자 터앝머리 모과나무가 참새 떼 한 됫박 쏟아붓고 왁자해진 독거에 마당은 혈색이 확 도는데, 외려 먹구름처럼 그늘지는 안색. 문득 눈물길로 차올랐을 것이다. 손금을 툭 놓친 사람, ..

좋은 시 2022.03.13

몽돌/백명철

몽돌 백명철 쏴 밀려왔던 파도가 스르르 밀려나간다. 봄날 오후, 눈부신 햇살아래 바다가 고른 숨을 내쉰다. 푸근한 그 품에 안겨 눈을 감는데 신기하게도 자그락거리는 숨은 소리가 들린다. 연인들의 은밀한 속삭임 같기도 하고, 아픈 상처를 하소연하는 웅얼거림 같기도 하다. 돌이 파도에 구르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있는 바닷가에는 크고 작은 돌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옅은 갈색, 검은 색, 회색 등 색깔은 제각각이지만 모양새는 동글납작한 것이 대부분이다. 자세히 보니 어느 돌이나 몸 전체가 부드러운 곡선이다. 얼마만큼의 세월이 흘렀을까?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구르면서 서로 다듬어 마침내 둥그스름한 모습이 되었다. 문득 저 돌들처럼 나의 각진 삶도 하루하루 밀려오는 삶의 파..

좋은 수필 2022.03.12

뒷모습을 읽다/황진숙

뒷모습을 읽다/황진숙 뒷모습을 읽는다. 의식하거나 꾸미지 못해 정직한, 말이 없어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숨겨진 마음을 보여주는 다층의 실루엣이 뒷모습이다. 따라가다 보면 훤히 읽히기도 한다. 저물녘인데도 병원은 대기 환자로 북적인다. 진료를 마치고 출입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뒤통수에 알밤이 날아든다. 약간은 장난스럽게, 살며시 튕기는 감촉이 생급스럽다. 뉘라서 꿀밤을 날리는 건가. 뒤돌아본다. 키가 껑충한 웬 젊은이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를 올려다본다. 이제 곧 그가 아는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몇 초가 흘렀을까. 여전히 그는 요지부동이다. 누구시죠. 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미숙씨 아니에요. 부드러운 말투로 그가 되묻는다. 아닌데요, 사람 잘못..

발표작 2022.03.12

글의 과녁 / 김시래

글의 과녁 / 김시래 얼마전 MBC ‘놀면 뭐하니?’를 연출한 김태호 PD가 백상예술대상에서 한 수상소감은 의아했다. 그는 “큰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놀면 뭐하니?’가 시즌제로 가야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재석씨가 혼자 끌어가는 것이 큰 스트레스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덧 2년을 향해 달려갑니다.유재석씨가 데뷔 30주년을 맞았는데 센스있는 백상예술대상에서 그 선물을 준비해 주려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평소 담백했고 겸손한 프로듀서였다. 이날도 수상의 영광을 파트너의 수고와 공으로 돌려 시상식의 스포트라이트를 양보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는 다소 방심했다. 시상식의 주인공은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아니라 시청자다. 시청율을 올려준 것도,시상식을 보는 사..

수필 이론 2022.03.12

섬돌/박양근

섬돌 박양근 별스럽지 않은 돌이다. 산이나 들판 웬만한 곳이라면 어렵잖게 찾을 수 있는 한 자 남짓 넓이의 돌덩이다. 주춧돌이 될 만한 모양새는 애당초 타고나지 못했고 솜씨 있는 석공의 마루와 마당 사이의 성긴 틈을 메우는 돌은 이것이 제격이다. 이 돌이 섬돌이다. 집채를 오르내리도록 만든 평범한 돌층계이다. 하지만 찬찬히 보면 황토가 곱게 다져진 앞마당을 다소곳하게 내려다 보듯 대청마루를 혼신의 힘으로 떠받치듯, 단단하게 괸 물상이다. 처음 그것이 놓여질 때는 빈틈도 흔들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온갖 발자국을 가슴으로 받으면서 채석장의 파석처럼 부서져 내린다. 예나 지금이나 제자리를 지켜내는 미명의 아픔이 쌓이듯 박혀지는 곳이 섬돌이다. 시골에서는 지금도 집안 어른이 섬돌을 오르내릴 때의..

좋은 수필 2022.03.11

율포의 기억/문정희

율포의 기억/문정희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좋은 시 2022.03.11

돌의 미학/조지훈

돌의 미학/조지훈 돌의 맛─그것도 낙목한천의 이끼 마른 수석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달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의 마당 귀에 작은 바위를 옮겨다 놓고 물을 주어 이끼를 앉히는 거라든다, 흰 화선지 위에 붓을 들어 아주 생략되고 추상된 기골이 늠연한 한 덩어리의 물체를 그려 놓고 이름하여 석수도라고 바라보고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흐뭇해진다. 무미한 속에서 최상의 미를 맛보고, 적연부동한 가운데서 뇌성벽력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이 돌의 미학에 통해 있기 때문이다. ​ 동양화, 더구나 수묵화의 정신은 애초에 사실이 아니었다. 파초 잎새 위에 백설을 듬뿍 실어놓기도 하고, 10리둘레의 산수풍경을 작은 화폭에다 거두기도 하고, 소쇄한 산봉우리 밑, 물을..

좋은 수필 2022.03.11

너와집/김이랑

너와집/김이랑 죄라도 지었을까. 유배라도 떠난 듯 너와집은 두메에 있다. 산촌박물관에 전시된 집은 박제일 뿐, 그 영혼을 찾으려면 숨 가쁘게 오르내리는 주가곡선株價曲線에서 뛰어내리고 쿵쾅거리는 세상일랑 하루쯤 버려야 한다. 도시를 벗어나 산 넘고 물 건너는 길에 유랑민의 노래 몇 소절 뿌리면 좋다. 저만치 누가 온들 돌아오는 사람이겠냐는 듯 너와집은 무덤덤하다. 화려한 삶을 꿈꾸지 않았으니 허름해도 좋고, 빈틈없는 삶을 바라지 않았으니 허술해도 괜찮다며 매무시를 여미지도 않는다.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이 없으면 어떻고 물 한 그릇 건네는 이 없으면 또 어떤가. 먹어보고 입어보라는 새빨간 장삿속에 넋을 빼앗기지 않아도 되니 얄팍한 지갑 걱정이나 마음의 무장일랑 내려놓고 자적自適에 들어본다. 새끼 짊어지고 고..

좋은 수필 2022.03.10

돌갗/김정화

돌갗 김 정 화 눈가리개를 벗으니 세상이 눈부시다. 어른거리는 주변의 물체들을 제치고 하얀 천위에 놓인 콩알만 한 돌에 눈길이 꽂힌다. 그 동안 말문을 가로채고 침샘의 길을 막았던 숨은 주범이다. 몰골이 초췌하다. 몸속에서는 제 맘대로 돌아다니며 한시도 나를 편안하게 해 주지 않던 결석이 세상에 나오면서 꼼짝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사리 같은 고매한 품격과는 너무나 먼 한낱 돌조각에 지나지 않는 모양새다. 내가 수행자도 아닌 터에 내 돌은 결석일 뿐, 짝퉁 사리로도 여길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돌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격이 달라진다. 얼마 전 턱밑 침샘에 결석이 생겼다. 어쭙잖은 사람에게는 아픈 곳이 유별나다. 작은 돌이 입속 통로를 막는 바람에 며칠 동안 목이 부어올라 음식물을 잘 삼키지..

좋은 수필 2022.03.10

돌/함민복

돌 매끈한 강돌이 있다 돌의 나이테는 돌 바깥에 있다 돌의 나이테는 닳아 없어진 만큼 있다 돌의 나이테 속에 돌이 있다 점점 시야가 흐려진다 - 함민복(1962~ ) "강돌에는 흘러간 물의 물살이 기록되어 있다. 빠르고 센 물살은 동의 얼굴을 매끈하게 만들었다. 나무는 나이를 알 수 있는 둥근 테를 몸 속에 만들지만, 돌은 나이테를 겉면에 새긴다. 작아진, 더욱 매끈해진 돌일수록 나이가 많 다. 점점 몸집이 작아지고 겉쪽이 반드럽게 되면서 돌은 고령에 이른다. 돌의 나이테는 무었일까? 시 '돌에'를 읽어보면 시인은 '돌에는/ 세필 가랑비/ 바람의 획/ 육필의 눈보라/ 세월 친 청이끼// 덧씌운 문장 없다/ 돌엔/ 부드러운 것들이 이미 써놓은/ 탄탄한 문장 가득하니' 라고 썼다. 아마도 돌 의 나이테 문양..

좋은 시 2022.03.08

늦가을 문답 ― 임영조(1943∼2003)

늦가을 문답 ― 임영조(1943∼2003) 그동안 참 열심히들 살았다 나무들은 마지막 패를 던지듯 벌겋게 상기된 이파리를 떨군다 한평생 머리채를 휘둘리던 풀잎도 가을볕에 색 바랜 몸을 뉘고 편하다 억척스레 살아온 저마다의 무게를 땅 위에 반납하는 가벼움이다 가벼워진 자만이 업을 완성하리라 허나, 깨끗하게 늙기가 말처럼 쉬운가 … (중략) … 잎 다 진 청미래 덤불 가시에 찢긴 저녁 해가 선혈이 낭자하게 저문다 잡목숲 질러 식은 조각달 물고 가는 저 부리 길고 뾰족한 홀아비 새는 거느리는 식솔이 몇이나 될까 내 빈 속이 문득 궤양처럼 쓰리다 어서 그만 내려가자, 더 늦기 전에 가을의 정취는 쓸쓸함이고, 정취의 최고조는 늦가을이 제격이다. 꽃도 지고 잎도 지고 이제는 가을마저 지려고 하는 때다. 이제, 이 ..

좋은 시 2022.03.07

마루 / 임영도

마루 / 임영도 마루는 불평하지 않는다. 찍히고 밟히고 뛰어도 아파하지 않는다. 따뜻한 온돌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벽창호로 막힘을 거부한다. 방밖에 앉아서 계절의 변화를 밤낮으로 바라보지만 감탄의 소리도 지르지 않고 무표정이다. 앞마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간섭하지 않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마루는 집안 생활의 동선을 이끄는 으뜸자리이다. ​ 경남 함양에 있는 일두一蠹 정여창 선생의 고택을 찾아 민박을 한 적이 있다. 마을 전체가 유서 깊은 선비의 고장답게 고샅길마다 고풍스러운 운치가 깃들어 발길을 멈춰 세운다. 솟을대문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뒤틀린 서까래에서 애잔한 세월의 흔적이 담뿍 묻어난다. 단정하게 배열된 집들은 하늘로 비상하는 듯이 솟아오른 팔짝 지붕의 추녀마루마다 대학자의 기품..

좋은 수필 2022.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