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디지털 시대의 문장력 / 김시래

디지털 시대의 문장력 / 김시래 상도동 중앙대학교 후문에 유명한 닭볶음탕집 식당이 있다. 종로에 본적을 둔 계림닭도리탕이다. 대로변에서 올려보면 2층창문에 "곧 60년"이라는 문구가 눈에 뜨인다. "곧"이라는 토를 단 이유가 뭘까? 대학동기의 손에 이끌려 점심과 반주를 겸한 그곳의 인상은 그렇게 다가왔다. 솔직한듯해서 나쁘지 않았다. 반면 다소 의심쩍기도 했다. 방송국이 추천한 맛집이라며 제멋대로 미끼를 던지는 식당이 어디 한둘이던가. 가게안으로 들어서니 주방쪽 테이블 벽쪽에 걸린 액자에도 다소 긴 문장이 적혀 있었다. "맛있으면 이웃에게 알리고 맛없으면 주인에게 알려주세요". 라는 글귀였다. 무슨 큰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창문에 적힌 글과 더해 가식없는 주인의 마음씀씀이를 가늠케했다. 그..

수필 이론 2022.04.19

나무의 꿈 / 문정영

나무의 꿈 / 문정영 내가 직립의 나무였을 때 꾸었던 꿈은 아름다운 마루가 되는 것이었다 널찍하게 드러눕거나 앉아있는 이들에게 내 몸 속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낮과 밤의 움직임을 헤아리며 슬픔과 기쁨을 그려 넣었던 것은 이야기에도 무늬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내 몸에 집 짓고 살던 벌레며, 그 벌레를 잡아먹고 새끼를 키우는 새들의 이야기들이 눅눅하지 않게 햇살에 감기기도 하고, 달빛에 둥글게 깎이면서 만든 무늬들 아이들은 턱을 괴고 듣거나 내 몸의 물결무늬를 따라 기어와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의 꿈속에서도 나는 편편한 마루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신비롭지 않을 때쯤, 나는 그저 먼지 잘 타고 매끄러운 나무의 속살이었을 뿐, 생각은 흐려져만 갔..

좋은 시 2022.04.16

멍석딸기, 수숫대, 까치밥 / 김서령

멍석딸기, 수숫대, 까치밥 / 김서령 멍석딸기. 어머니, 멍석딸기는 왜 이름이 멍석딸기지요? 멍석딸기는 넝쿨을 옆으로 떨치지 않느냐. 멍석처럼. 어머니, 멍석딸기는 왜 열매가 크지요? 잎도 크고 꽃도 크니까 그렇겠지. 어머니, 멍석딸기는 왜 맛이 신가요? 그건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수숫대. 수숫대와 옥수숫대 밑동에는 설탕이 들어 있다. 공기뿌리가 삥 돌려난 마디의 바로 윗마디를 잘라 이로 껍질을 벗겨내고 뚝뚝 베어먹었다. 입술이며 입속을 베기 일쑤였다. 단물을 다 빼먹고 빡빡해진 섬유소를 뱉어내면 핏물 스민 것이 보이기도 했다. 까치밥. 양지꽃과 꽃다지와 지칭개와 제비꽃이 피는 봄의 논두렁과 길섶에는 까치밥이 여물었다. 신부 족두리에 꽂혀 있는 영락(瓔珞)처럼 파르르 떨고 있는 까치밥을 한 움..

좋은 수필 2022.04.15

신문으로부터의 사색 - 원정란

신문으로부터의 사색 - 원정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그 책을 읽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때 가장 값진 글감이 진실이란 것을 알았고 뼛속까지 정직하고 싶던 때라 더 울림이 컸다. 그러나 실현에 옮기는 일은 얼얼한 감동만큼이나 오래 걸렸다. 그 후로도 좋은 책을 만나면 출렁거렸고, 그리고 40년 동안 은근하고 은밀하게 나를 중독시킨 안방마님 ‘신문’은 그 세계와의 소통에 다리가 되어주었다. 조간신문, 변화무쌍한 나를 매일 붙잡고 있는 절대불변의 공간, 한동안 아이들 뒷바라지로 분주한 풍경 뒤에서도, 이제 각자 무대로 진출해 호젓한 풍경 뒤에서도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주고 있는 친구. 그 잉크 냄새가 커피 향과 섞이면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쾌감으로 뻑뻑했다. 이내 목을 타고 내리는 커피 ..

좋은 수필 2022.04.14

글쓰기와 관점 / 김시래

글쓰기와 관점 / 김시래 도전에 응한 이유를 묻자 48살의 추성훈은 '쉬운 길보다 어려운 길을 가야 배울 것이 많을 것'이란 아버지의 가르침을 꺼내들었다. 모두 감동했다. 남은 그의 여정도 그럴 것이다. 백전노장의 말에는 인생을 대하는 관점이 담겨있다. 말과 글은 관점의 도구다. 글속에 담긴 관점은 그의 인생처럼 유일무이해야 한다. 공감마저 얻는다면 세상을 넓히고 세상을 키울 자격을 얻는다. 단어와 어휘가 사용되고 매끄러운 문장력이 동원 될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라. 단골 손님이 그릇 구경하러 음식점에 가는 게 아니다. 맛 때문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은 문체가 아니다. 관점이다. "그리운 건 그대일까, 그 때일까" ,"구겨진 종이가 더 멀리 간다". 하상욱 작가의 단문이다. 댓구로 이뤄진 감각적 문..

수필 이론 2022.04.11

채독/이순혜

채독/이순혜 자금산 기슭에 내려앉은 덕동마을은 어머니의 품같이 편안하다. 오래된 나무와 고택이 어우러져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덕동마을은 농재 이언괄 선생이 양동에서 옮겨와 정착하면서 마을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택 사이를 거닐다 덕연관 앞에 섰다. 이곳은 대대로 내려온 고문서, 생활 용구, 농기구 등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곳이다. 문화마을로 지정되면서 흩어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유물을 주민들이 기꺼이 내놓아 보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전시관 입구에 부끄러운 듯 돌아앉은 채독이 눈길을 끈다. 채독은 나무 항아리다. 싸리나무의 낭창한 성질을 이용하여 큰 장독처럼 모양을 빚어 안쪽과 바깥쪽에 창호지를 바른다. 채독은 통풍이 잘되어 주로 마른 곡식을 갈무리하거나 옷을 보관하는 데 사용한다. 내 기억..

좋은 수필 2022.04.06

장조림/길상호

장조림 길상호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의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스위치를 끄면 어둠이 고여드는 방 밤은 적당히 짜고 달고 매콤하고 얽힌 손길에 더는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지금은 저 방에 나란히 갇혀야 해요 배꼽 속 지루한 인연이 모두 우러나오고 눈에 담긴 통증도 흐물흐물 풀리면 액자 속 다정했던 시절로 우리 찰칵 찰칵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요 방 안 가득했던 어둠이 졸아들면 정수리에 모여든 쓸쓸한 거품을 걷어주면서 이제 어떤 말에도 쉽게 상처받지 않는 짭조름한 심장을 갖고 살기로 해요 한없이 뒤척이게 되더라도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배어들기 위한 일 검은 밤이 너무 일찍 끝나버리면 안 되니까 심장의 불꽃을 중불로 내려주세요

좋은 시 2022.04.06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꿈/하여진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꿈 하여진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저녁의 문고리에 묶어두고 온 예순두 살 금례씨의 걱정이 교실 문턱까지 따라온다 틈만 나면 아픈 나이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희망야학 교실에는 저녁 7시가 켜진다 쪼글쪼글한 입술 괄약근이 열렸다 닫혔다 ㅏㅑㅓㅕㅗㅛㅜㅠ 비누 물방울처럼 소리가 둥둥둥 떠오르고 누리반 교실은 힘껏 달구어진다 뜨거운 물에 넣으면 원래대로 부풀어 오르는, 탁구공처럼 학생들의 찌그러진 마음이 부풀오 오른다 뭉턱뭉턱 빠져나간 젊음과 늘어나 버린 시력과 휘어지고 주름살 진 꿈을 구부리고 앉아 종이에 한 땀 한 땀 그려박는 글씨들 바다를 쓰면 바다 냄새가 나고 꽃을 쓰면 향기가 나고 새를 쓰면 새울음 소리가 나고 네모 칸 밖으로 자꾸 삐져나온 바다, 받침을 빠뜨린 태양을 지우고 다시..

좋은 시 2022.04.06

부산/ 손택수

부산/ 손택수 솥이라면 바닥이 까맣게 탔겠다, 누룽지 긁는 쾡한 숟가락에 밑바닥 구멍이라도 났겠다. 울 아버지 밥 벌러 온 땅 밥 벌러와 병을 얻고 누운 땅 대학병원 창문 밖 산과 산 사이가 말 그대로 가마솥 모양이다. 소금이라도 굽듯 산과 산 사이에 바다를 퍼담고 있다. 벚꽃이 산능선을 끓어오른다. 밥거품처럼, 무쇠솥뚜껑 들어 올리는 몇 해만 몇 해만 더 머물고 뜨자던 땅 산능선 기어오른 집 차마 떨치지 못하고 쉰 해를 더 눌러앉고 만 땅 꽃빛이 까칠한 능선 경계를 넘어간다. 제 몸을 넘어가는, 넘 어가는 저 산빛 묵직하게 내려앉은 몸을 들어올리는 산빛, 살도 아니고 뼈도 아닌데 몸은 몸이라 그친 몸을 들썩거린 다, 며칠째 깨어나지 않는 이마를 짚고 돋아난 소금별 하나.

좋은 시 2022.04.06

독도, 닻을 내리다 /김만년

독도, 닻을 내리다 김 만 년 섬은 일월풍진에 깎여 온 흔적이 역력하다. 두 개의 암청색 바위가 푸른 하늘과 맞닿아있다. 먼 바다를 응시하는 풍모가 초병의 눈빛처럼 의연하다. 끼룩끼룩! 괭이갈매기들이 옥타브를 높이며 머리 위를 선회한다. 섬기린초 괭이밥 날개하늘나리......,여리고도 강인한 생명들이 가파른 바위에 매달려 반가운 손짓을 한다. 모두가 친숙한 모국어들이다. 만리 밖 초동樵童을 만난 것처럼 풀 한 포기 돌 하나에도 애틋한 시선이 머문다. 아! 여기서는 갈매기도 아리랑곡조로 울고 파도도 휘모리장단으로 철썩이는구나. 나는 독도가 백두대간의 핏줄임을 단번에 알아챈다. 암벽에 손을 얹으니 잔잔한 파동이 느껴진다. 지구가 소용돌이치던 어느 신생의 아침에 백두대간의 지층을 뚫고 불쑥 솟아올랐으리라. 창..

좋은 수필 2022.04.05

노루발/김지희

노루발 김지희 자운영 붉게 핀 옷감 위를 노루발이 겅중겅중 뛰어간다. 두 귀 쫑긋 지나간 자국마다 박음질된 실들이 오솔길처럼 펼쳐진다. 촘촘한 길 가로 새소리며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챠르르! 챠르르! 할머니가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눈부신 천들이 지어져 나온다. 노루발은 재봉틀의 부속품이다. 박음질 할 때 옷감이 밀리지 않도록 눌러주는 역할을 한다. 지그시 누르는 힘이 없다면 실이 끊어지거나 선이 비뚤어져 낭패를 보기 일쑤이다. 중간이 갈라져 끝이 살짝 들린 생김새가 노루의 발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누가 처음 그렇게 불렀는지 언제 들어도 정답고 살갑다. 몇 번씩이나 이삿짐을 꾸릴 때마다 엄마는 신주단지처럼 재봉틀을 모셨다. 혹여 생채기라도 날까봐 이불로 고이 싸매고 난 후에야 다른 짐을 챙겼다..

좋은 수필 2022.04.03

먹감나무/신정애

먹감나무/신정애 한 폭의 수묵화가 펼쳐진다. 시간이 응축된 결 사이로 먹빛 농담들이 그윽하게 번져 있다. 백년의 세월 속에 잠시 머물렀던 시간들이 망설이듯 멈춰 섰다간 일필휘지 굽이쳐 흘렀다. 마을회관을 지으려고 빈 집을 허물면서 베어진 감나무였다. 차탁으로 귀히 쓰인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찾아간 자리였다. 반으로 자른 단면을 손으로 쓰다듬으니 아릿한 기억들이 묻어나온다. 감이 주렁주렁 달린 시골마을이 열두 폭 병풍처럼 펼쳐진다.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이면 담장을 넘어온 가지마다 홍시가 탐스럽게 익었다. 초가집 일색인 마을에서 단 하나 뿐인 기와집이 할머니의 집이다. 고샅길 막다른 곳에 이르면 솟을대문이 어린 나를 압도했다.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증조할아버지가 아래채에 기거했고 본채의 큰 방이 할머니..

좋은 수필 2022.04.02

거룩한/김정화

거룩한/김정화 누구나 마음에 담아두는 말 한두 마디 정도는 있을 게다. 주변인에게 물어보면 대답이 제각각이다. ‘흙둔지’라는 말에는 향수를 느낀다는 친구. ‘보고 싶다’라는 글자만 보아도 심장의 무게가 내려앉는다는 사람. ‘카르페디엠’을 외치면 엔도르핀이 솟는다는 지인도 있다. 반면, 삶이 순탄치 않은 K시인은 통곡하기 알맞은 장소를 찾아 몇 년째 ‘호곡장好哭場’이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다니기도 하고, ‘눌인訥人’이라는 단어가 어눌한 자신을 칭하는 것 같다며 아예 아호로 정해버린 스승도 있다. 그들처럼 나도 요사이 관심을 두게 된 말이 하나 생겼다. 바로 ‘거룩한’이라는 다소 무거운 형용사이다. 이 말을 좋아하게 된 연유는 오로지 H 선생님 덕분이다. H 선생님과는 수년간 같은 지역의 문학단체 회원으로 ..

좋은 수필 2022.04.01

오척단구 / 이희승

오척단구 / 이희승 연령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유형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아마 대인과 소인으로 구별될 것이다. 그리고 또 대인이든지 소인이든지 이것을 각각 두 가지로 다시 나눈다면, 인간개체에 육체와 심령이 있고, 인생 생활에 물심양면(物心兩面)이 있으며, 대우주 자체에 물질면과 정신면이 있듯이, 대인에도 정신적인 대인이 있을 것이요, 소인에도 또한 마찬가질 것이다. ​ 그런데, 소인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육체적인 것에 대하여는 별로 주석이 없으며, 오직 정신적인 소인에 대하여서만, (1)세민(細民) (2)불초(不肖)한 사람 (3)스스로 겸손하는 말(自謙之詞) 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세민이라 함은 빈천한 사람을 의미하고, 불초한 사람이라 함은 학덕(學德)이 없고 성질이 사악한 사람을 가리..

좋은 수필 2022.03.31

돌담 / 윤남석

돌담 / 윤남석 볼쏙, 돌담 위로 볼쏙 고개 내민 야나한 호박순이 산들바람에 살랑인다. 호박순이 앙증스런 손마디를 나풀대며 맨 위에 얹힌 돌, 움켜쥘 기회를 엿본다. 똬리 튼 호박순의 곰질대는 폼이 능청맞다. ​ 저러다가 ​ 절호의 기회다, 싶으면 확실한 확보에 나서겠지. 그렇게 안정된 확보가 이루어지면, 뒤따라 넝쿨이 휘감으며 올라서고, 그다음에 호박잎이 담을 아늑하게 감싸겠지. 넝쿨과 잎줄기 사이에 돋아난 노란 꽃잎은 벌을 끌어들여 가루받이하고, 작달막한 열매 맺게 하겠지. 보송한 솜털 돋은 열매는 이슬방울로 목을 축이고 풀벌레와 소곤거리겠지. 그렇게 바깥세상에 눈뜰라치면 제법 보로통해지겠지. 얄따란 옷 속으로 비치는 속살처럼 관능미를 넌지시 흘리면, 이내 손을 타겠지. 하지만 널따란 잎사귀 속에 숨..

좋은 수필 2022.03.30

돌 자리를 앉히며 / 김선화

돌 자리를 앉히며 / 김선화 8년 전, 도시생활에 권태를 느낀 나는 산마을 이곳저곳을 돌며 구옥을 구경했다. 빈 집을 꼼꼼히 돌아보며 세월의 흔적을 이고 서 있는 돌담에 매료되곤 했다. 섬세하지 않아 더러는 무너져 내린 곳도 있었지만 그러한 곳은 고쳐 쌓으면 될 일이라 여겨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친정어머니는 줄곧, 산마을보다는 평지의 친정집을 수리해 살라고 이 딸을 꾀어냈다. 뒤꼍은 산에 닿았고 대문 밖은 소로인데 길 아래로는 무논이 이어져 벼 익는 모습도 한 눈에 들어오는 마을초입이다. 대식구가 살다 나와 비어있는 구옥 토방엔 고라니·노루 등이 칩거하여 흙벽이 아예 굴이 되어가고, 어쩌다 대문을 열면 인기척에 놀란 놈들이 미끄러지며 허겁지겁 뒷산으로 올랐다. 그런 곳을 기어코 딸의 떠돌..

좋은 수필 2022.03.30

봉노 / 안희옥

봉노 / 안희옥 마당엔 어느새 눈발이 성글고 있었다. 뒤란 대숲엔 멧새떼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리고 윙윙 감나무가 울었다. 일찍 저녁밥상을 물린 우리 자매는 쉬 잠이 오지 않아 살금살금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당신을 찾아온 손녀들을 함박웃음으로 반겼다. 봉노엔 벌써 밤과 고구마가 맛깔스럽게 익어 가고 있었다. 광에서 가져 온 홍시도 녹아서 말랑말랑한 채 오지그릇에 담겨져 있었다. 숯불을 담아 놓는 그릇인 화로의 옛말이 봉노다. 할머니는 화로라는 말 대신 봉노라는 말을 썼다. 추운 겨울 날, 화력이 오래 간다는 참나무 장작을 태워서 남은 숯불을 봉노에 담았다. 그 위에 재로 덮어 오랫동안 불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했다. 재와 재 사이로 빼꼼하게 보이는 불꽃들이 눈을 덮어쓴 산수유 열매처럼..

좋은 수필 2022.03.30

뚝배기/오귀옥

뚝배기/오귀옥 맵시는 부족해도 푸근한 오지그릇이다. 아가리가 넓고 속이 깊은 건 제 안에 담긴 음식을 한껏 품어내기 위해서다. 그 안에서 노랗게 봉싯 부풀어오른 계란찜은 더없이 맛깔스럽다. 바글바글 끓는 청국장은 헛헛한 몸의 기운을 돋군다. 무게감 없는 양은냄비는 왠지 경박해 보이지만, 투박하니 묵직한 뚝배기에는 이름 그대로 뚝심이 배어 있다.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맛을 담아내는 데에는 뚝배기만한 그릇도 없다. 뚝배기는 완전한 것보다 조금은 허점이 있어야 더 친숙하다. 한두 군데 이가 빠진 아가리 둘레로 와글와글 개구리 울음소리를 내며 국물이 끓어넘쳐야 제 맛이다. 자르고 찌르는 서양음식에 비해 입술을 쑥 내밀고 숟가락을 후후 불어가며 뚝배기에서 떠먹는 우리 음식에는 여유로운 정이 흐른다. 뚝배기의 질감은..

좋은 수필 2022.03.30

대문 / 서명순

대문 / 서명순 노모가 홀로 계시는 친정집 대문을 고치느라 난리가 났다. 적당히, 녹이나 걷어내고 기름이나 먹이면 되리라 쉬이 여겼던 작업은 장정 4명이 달라붙어 꼬박 이틀이 걸렸다. 망치, 펀치, 절단기에, 전동 드릴기, 이장 집에서 빌려온 CO2 용접기까지. 왱왱거리는 기계소리가 고즈넉한 골목을 흔들며 온 동네 관심사가 되었다. 무릎이 시원찮은 팔순 노모가 우여곡절 끝에 차(車)를 구입했다. 토끼와 거북이로 속도를 조절하는 전동차는 대문 턱 앞에서 정지하고 말았다. 4m 남짓 되는 대문이 아귀가 맞지 않아 빗장을 풀기도 어렵고 닫기도 곤란했다. 빗장이 두 문짝을 쉬이 갈고리해야 하는데 앙살 맞은 소리만 낼뿐 여간해서 빗장이 움직이질 않았다. 자식이란 자가 민망한 것은, 마당에 대 놓았던 제 차가 빠져..

좋은 수필 2022.03.30

등받이의 발명 /배종영

등받이의 발명 배종영 의자는 누구든 앉히지만 스스로 앉아본 적은 없다 의자가 특히 이타(利他)적 사물인 것은 등받이의 발명 때문이다 사람의 앞이 체면의 영역이라면 등은 사물의 영역이지 싶다 기댄다는 것, 등받이는 혈족이나 친분의 한 표상이지도 싶다 갈수록 등이 무거운 사람들 등받이에 등을 부려놓고 비스듬히 안락을 느끼는 것이다 언젠가 본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취한 남자가 끝까지 넘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몸에 등받이 달린 의자 하나 들어 있지 싶었다 취약한 곳에는 대체로 이타적인 것들이 함께 있다 혈혈단신한테도 온갖 사물이 붙어있어 결코 혼자인 것은 아니지 싶다 등받이는 등 돌리는 법이 없듯이 나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등에서 절대적인 등을, 등받이를 배운 사람이다 계산 없이 태어난 사물은 없지만 정..

좋은 시 2022.03.28